[묵상글]

내가,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

전봉석 2019. 3. 27. 07:14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에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

민수기 18:20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의 오른손의 구원하는 힘으로 그의 거룩한 하늘에서 그에게 응답하시리로다

시편 20:6

 

 

하나님이 나의 분깃, 나의 기업이 되신다는 말씀 앞에 한참을 머문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다.’ 하시는 말씀 앞에서는 언제나 먹먹한 느낌이다. 왜냐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3:17).” 얼마나 감사하고 소중한지. 송구하고 부끄러울 따름이지만,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가 택하신 기업이로다(32:9).”

 

이것이 나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라는 데 확신을 더한다. 오늘에 이르러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려고,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9).” 나의 죄를 내게 돌리지 않으셨다. 그리고 이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부탁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6).” 때가 차매 우리 죄를 속량하신 것이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4:4-5).”

 

저에게 우리 죄를 담당시키셨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53:6).” 그런 우리의 사망을 폐하신 것이다.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딤후 1:10).” 예수는 우리의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셨다. 그런 이가 우리로 쉬게 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11:28).” 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빛이 되심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1:3).” 이로써 우리의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하나님이 운행하시었다(2). 이와 같이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우리로도 끝까지 감당할 수 있게 하시는 거였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1:6).”

 

아침에 일어나 이와 같이 말씀을 따라가다 보면, 전날에 있었던 나의 모든 것과 오늘 나에게 두시는 모든 것까지도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가운데서 소용되고 유용할 것을 믿는다. 잘 다독이고 건사한다고 하는데도 몸이 자꾸 힘들다. 산책을 하고 늦은 점심을 먹고 들어왔다. 허리가 아프고 엉덩이가 배겨 오래 앉아 있을 수 없어 서서 서성거리며 책을 읽고 메모를 하다보면 다리가 아프다. 몸이 아프다는 건 마음이 아픈 것보다 오히려 간결하고 단순하다.

 

가슴이 답답하고 숨을 쉬기 힘들면 어떤 불안이 먼저 엄습한다. 안정제를 먹고 말 그대로 가만히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사는 게 그렇듯 가만히만 있을 수 있겠나. 누굴 만나는 일은커녕 어딜 가는 것도 점점 힘든 일이라, 종일 들어앉아 있으려니까 안 되겠다 싶어서 조금씩 더 멀리 산책을 나갔다 온다. 늘 보면 나에게 가장 어려운 건 나 자신이 아닌가 싶다. 그러니 누굴 염려하고 누구에게 어떤 도움이 된다는 건 참으로 묘연할 따름이다. 다 저녁이 됐는데도 아이의 연락이 없었다.

 

혹시 몰라 이어폰을 꽂고 천천히 걸어서 돌아오고 문자를 남기고 몇 번씩 전화를 했는데도 답이 없었다. 그러려니 하고 말면 되는데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는가, 하는 마음에 불안이 또 초조가 나를 옥죄는 것인지. 숨이 가쁘고 호흡이 곤란하여 안정제를 한 알 더 먹고 있을 때 아이는 잔업이 있어 야근을 했다며 퇴근 중이라고 문자를 주었다. 정말 이것 때문인지, 혹은 어떤 병이 있는 것인지. 그저 심리적인 요인인지, 병원 의사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마는 것이어서 어쩌겠나.

 

가정예배를 드리고 누웠다가 금세 잠이 들었다. 하는 것도 없이 하루가 이렇게 고단해서야 어디. 나의 오늘을 따로 구별하여 세우신 아론으로의 삶은 세상에서 보상은 없으나 하나님이 기업이고 분깃이라는 말씀에 위로를 얻는다.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에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18:20).”

 

이와 같은 말씀이 기틀이 되어 나의 오늘이 다행이라 여겨진다. 어떠하든 하나님과 화목 된 자로 살 수 있다는 것에 말이다. 종종 누워서 영화를 한 편씩 보곤 하는데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의 고단함이 어떠한가를 늘 되새기게 된다. <살아남은 아이><죄 많은 소녀> 두 편의 한국영화를 보았는데 모두 청소년 소재의 것이라 관심을 두었었다. 나는 누구보다 나의 청소년 시절이 눈물겨웠다. 지금도 종종 꿈을 꾸면 운다.

 

그래서 우리 가정예배의 기도 제목은 항상 안 믿는, 하나님 없이 사는 아이들과 그 가정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노여움이 아이들 심령을 멍들게 하였다. 하나님 없이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의 무모함은 본인들의 수고와 달리 자식들의 영혼을 피폐하게 만든다. 둘 다 죽음과 자살을 모티브로 한 것이어서 그랬을까? 나의 그러그러했던 그 시절의 사연과 사건과 상황이 중첩되어 몇 번을 울먹거리며 보았다. 다 보고 밀려드는 공허함에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이 축복의 날이 감사하였다.

 

이를 어떻게 하면 아이들에게 알려줄 수 있을까? 내 안의 착한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도 나에게 건강을 더하셨으면 좋겠는데, 늘 어디가 아프고 불편한 사람이라. 이러면 저게 힘들고 저러면 이게 힘들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에게 하나님은 도대체 저런 한 영혼을 맡기시면 어쩌자는 것일까? 그저 나는 아이 때문에 초조하고 마음이 쓰이는데 이것이 또 얼마나 정직한 감정인지 나는 사실 확신할 수 없다.

 

정말 저 애를 염려하는 것인지, 저 애로 인한 나의 고달픔을 다독이는 것인지.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4:8-9).” 내가 나의 어떤 노력으로 오늘 이처럼 건강한 심령을 사모하며 사는 것이 아니듯이 내가 우리가 저 애들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다만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저도 그 천하고 볼 것 없는 나사렛의 예수신데 저로 우리의 구원자가 되게 하심에 대하여.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고후 6:8).” 곧 오늘 우리로도,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9-10).”

 

때론 나의 무명이 또는 근심이 앞서서 나를 올무에 매듯 휘어잡기 일쑤여서, 실은 번번이 실의에 빠지고 의기소침 하는 게 사실이지만,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살 수 있는 것은 결국 나는 나의 연약함으로 주를 바랄 따름이다. 자꾸 어디가 아프고 힘든 몸과 제멋대로 구는 마음과 혼자 시무룩해하는 영혼을 나는 어찌할 수 없어서.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10:38).”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나의 일상은 그저 죽도 아니고 밥도 아닌데, 나는 그야말로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어서 주일에 전해야 할 본문을 찾아 개요를 작성하고 초안을 잡고 뒷받침할 성경을 따라간다. 아이들과 같이 성경공부를 할 교재를 정하고 먼저 읽고 무얼 가르쳐야 하고 무엇을 붙들어야 하는지를. 앉았다 힘들면 서서, 서서 힘들면 누워서. 누웠다가도 힘들면 천천히 산보를 나갔다가도. 나는 부끄럽지만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어서 송구할 따름이다.

 

그러니 의기소침도 주께 향하는 것이라. 돌아누우며 주님, 하고 부를 때 솟구치는 어떤 송구함과 서러움에 대하여. 내가 꼴랑 저런 애 하나 때문에, 몇 명 돼도 않는 인원을 붙들고, 종일 해봐야 한 것도 없는 일을 가지고 지금 뭘 하고 있나? 싶은 마음일 때, 오늘 아침 말씀은 나의 특별함을 상기시키신다. 땅도 다른 어떤 분깃도 아닌 하나님이 직접 내가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 하시는 것.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의 오른손의 구원하는 힘으로 그의 거룩한 하늘에서 그에게 응답하시리로다(20:6).” 비록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7).” 하는 말씀이 병약한 나의 심령을 다시금 일깨우시는 것이다. 내게 두시는 것으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내가 해야 할 이를 감당하면 될 일이었다. 고로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성소에서 너를 도와 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아 주시기를 원하노라 (셀라)(1-3).”

 

결국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우리가 너의 승리로 말미암아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깃발을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4-5).” 고로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의 오른손의 구원하는 힘으로 그의 거룩한 하늘에서 그에게 응답하시리로다(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