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

전봉석 2019. 4. 2. 07:19

 

 

 

가령 발락이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나는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간에 내 마음대로 행하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말하리라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민수기 24:13

 

여호와여 내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시편 26:8-9

 

 

결국 발람은 하나님의 백성을 저주할 수 없었다. 발락은 자신의 권세로 저에게 부귀영화를 약속하였으나 이를 따를 수 없었다. “가령 발락이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세상이 그 어떤 약속을 하고 실제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다 해도, “내 마음대로 행하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말하리라.” 하는 저의 자세는 여러 번 물린 시행착오 끝에 나온 결과이다. 우리는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고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이다.

 

이를 어제 낮에 읽은 내용으로 가져오면,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4:11).” 나름 저들은 이 세상의 건축자들이었다. 바리새인이었고 서기관이었으며 대제사장이었고 이 땅에 권세 잡은 자들이었다. 누구보다 낫다고 여기고 잘 안다고 여기던 이들이, 예수를 버렸다. 그 버려진 돌이 우리 구원의 집 머릿돌이 되었다. 건물을 구축하는 데 있어 굳건한 초석이고 디딤돌이 되는 것이다.

 

저는 말하였다. “발락이 발람에게 노하여 손뼉을 치며 말하되 내가 그대를 부른 것은 내 원수를 저주하라는 것이어늘 그대가 이같이 세 번 그들을 축복하였도다 그러므로 그대는 이제 그대의 곳으로 달아나라 내가 그대를 높여 심히 존귀하게 하기로 뜻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그대를 막아 존귀하지 못하게 하셨도다(24:10-11).” 무엇이 존귀인지, 무엇이 초석인지, 어리석은 자는 알지 못한다. 자신들이 지금 무얼 버렸는지 알지 못한다.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118:22).” 그러므로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28).” 이를 붙들고 아는 것이 복이다. 그런데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14:1, 53:1).” 그러니 어쩌겠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12:20).” 무엇이 중하고 무엇이 먼저인지 아는 게 능력이었다. 나는 스스로 나의 상함을 고칠 수 없다. 나는 내가 나를 다룰 수 없다는 데 항복한다. 무슨 일로 바닥을 휘저으면 우울과 소외와 고립감과 열등감과 외로움과 편집증과 강박과 실패감과 깊은 자격지심이라는 부유물로 마음은 금세 혼탁하기 이를 데 없다.

 

혐오스럽고 한심하기만 한 모습이라, 어찌 솔직하게 서술할 엄두도 나지 않는다. 이래저래 심기가 불편하였다. 점심을 먹으러 집에 갔다가 아내의 꼬투리를 잡아 마음을 휘저었다. 모진 말과 신세한탄과 어디서 그런 혈기가 올라올까싶을 정도로 화가 치밀어 한바탕하였다. 돌아와 금방이라도 어디 멀리 숨어버리고 싶었다. 한심하고 답답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말은 말 이상의 말로 마음에 담긴 것들을 고스란히 쏟아내곤 하는 법이다.

 

잠깐 베드로의 돌 이야기를 더 들어보자.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4-5).” 그러니 그렇게 다시 교회로 올라가 할 수 있는 게 말씀뿐이라. 딱 이 대목을 읽는데 괜히 서러운 것이다.

 

미안하고 미안해서 아내에게 더 그 지랄을 떨었다. 나는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런데 수업을 끝낸 아내가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하였다. 점심께 그처럼 지랄을 떨어 기어이 울려놓았는데, 또 아무렇지도 않게 용서를 하고 언제 그랬냐는 듯 상냥한 목소리로 얼른 와서 저녁 먹자고 하는 것이다! 때마침 딸애도 전화를 하였다. 우리는 밖에서 만나 딸애가 좋아하는 칼국수를 먹고 들어갔다. 나의 미안하다는 말이 공허하였다. 딸애가 자꾸 눈물을 보였다.

 

우리는 침대에 둘러 앉아 같이 울었다. 나는 미안하고 또 부끄러워서 울었다. 아내는 안쓰럽고 속상하여서 울었다. 딸애는 서러움에 울었다. 나는 사실 저 둘의 눈물을 짐작할 따름이다. 그냥 좋다니까, 그냥 그러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나는 헤어지라 한 그 아이를 위해서도 울었다. 같이 붙들고 기도를 하였다. 엄마 품에 안긴 아이들처럼 꺼이꺼이 울었다. 내가 얼마나 구제불능인지 고하였다. 아내와 딸애의 마음을 위로하여 주시기를 바라며 울었다. 저 애도 주께서 인도하시기를 두고 울었다.

 

눈물은 물 풍선처럼 펑, 하고 터져 쏟아졌다.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6-8).” 우리가 세워지는 터는 견고하였다.

 

보배로운 모퉁잇돌이 되시는 이가 우리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이다. 기어이 나는 반대할 수밖에 없으나 헤어지라고 한 그 아이를 위해서도 기도하였다. 우리는 주 없이 살 수 없는 모두가 연약한 자들인 것이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53:6).” 그렇지 않고는 도저히 구제불능이라. 나는 늘 내 감정에 휘둘리고 내 말에 어지러울 따름이다.

 

누가 그런 나를 본다면 더는 상종도 않을 것인데, 아내는 먼저 다가와 없었던 일처럼 위로하고 자신이 오히려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였다. 나는 눈에 안 보이는 예수를 곁에 두고 산다. 너는 속도 없냐? 하고 퉁명스럽게 말하다 내가 너무 한심하고 더러워서 구역질이 날 정도이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5).” 내 곁에 예수의 모본을 두셨다.

 

여느 마누라 같으면 모멸감에라도 길길이 뛰며 싸움을 이어가고 더 독한 바닥을 드러내게 할 터인데, 나는 손을 잡고 기도하다 미안하고 고마워서 엉엉 울었다. 나 같은 이에게 아내로 딸아이로 두신 저들이 모퉁잇돌이 되시는 그리스도 예수를 연상하게 한다. 나의 고약하고 척박한 영혼의 디딤판이 되어주는 것이라, 같이 울다 울지 말라고 달래며 주의 이름을 부르며 같이 울었다. 우리에게는 다만 예수의 이름 외에는 없었다. 구하고 아뢸 수 있는 이가 우리에게 있었다. 우리로 그 위에 세워져가게 하시는 것이다.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11:10).”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은 우리가 살아서 살아가는 동안 맛보게 하시는 가정이었다. 문득 나를 돌이켜 주가 부르실 때, 나는 그 이듬해에 바로 신대원을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한데 보란 듯이 낙방을 하였고, 이게 아닌가? 하고 있을 때 어머니가 말하였다. 먼저 가정을 세우라는 것이다. 무너진 가정을 먼저 세우시려는 것이야.

 

그때도 자주 울면서 가정예배를 드렸다. 나는 기를 쓰고 새벽예배를 나갔고, 저녁에는 다들 모이면 성경을 읽고 같이 손을 잡고 기도하였다. 말이 그렇지, 그때 그 일이 얼마나 벌줌하고 민망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다른 길이 없었다. 안 그러면 살 수가 없었고, 나는 아직 어린 사춘기 두 아이에게 살려달라고 부탁하였다. 종종 그때 일을 생각하면 신비하기만 하다. 둘 다 학원이 끝나고 돌아오면 어쩔 땐 열두 시가 넘곤 하였는데, 그래도 같이 이불 위에 둘러앉아 가정예배를 드렸다.

 

잘하고 못하고가 아니라 안 그러면 살 수가 없어서 살기 위해 나는 필사적이었던 것 같다. 어제 저녁도 그래서였을까? 머쓱하고 민망하지만 딸애가 올 때를 기다려 뭐라도 먹이고 들어가고 싶었던 것이나. 같이 둘러 앉아 이야기를 마무리하듯 되고 안 되고를 놓고 얘기하다 같이 울며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었던 것인데. 나는 주 앞에와 아내 앞에서 용서를 빌었다. 나의 추하고 더러움을 감출 게 없었다. 딸애에게도 속상하고 마음이 아프지만, 안 됐고 미안하지만, 우리의 연약함을 놓고 같이 기도하였다.

 

문득 드는 생각이 내가 개차반으로 살고 아무런 준비도 안 된 어른아이로 아빠노릇을 하며 아이들 영혼을 짓밟으며 살았는데도 아이들이 이만큼 주를 바라고, 어쨌든 우리가 주를 의뢰하며 사는 것은 다 그 어색하고 볼품없는 가정예배 때문이 아니었겠나 생각한다. 정말 염치없지만 아이들 앞에 내 바닥을 다 까발리고 용서를 빌고 찌질이로 내려앉은 게 가정예배였다. 나의 기도는 헐겁고 엉성하기 그지없다. 어설프고 염치없을 따름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우리의 이 사소함에서 신선함을 느낀다. 그 느낌으로 놀란다. 때론 이와 같은 사태가 괴이하다. 결론이 없는 이야기 같다. 보잘것없는 것 같아 버려버린 것을 주께서 머릿돌로 삼으신다. 당신이 우리 가정의, 나의 영혼의, 우리의 영혼에 모퉁잇돌이 되어주신다. 오늘 나는 말씀에서 기어이 주의 사람들을 축복할 수밖에 없는 발람의 기도를 들었다. 저도 어쩔 수 없는 주의 사랑하심과 인자하심 앞에 굴복하였다. 이내 나의 바닥은 내가 어쩐다고 어쩔 수 있는 게 아니어서, 결코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하여 나는 늘 어제의 시제로 오늘을 감사한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26:8-9).” 부끄럽고 송구하고, 한심하고 구제불능이어서 그야말로 몸 둘 바를 모르겠으나, 번번이 나의 이 사소함으로 주께서는 신선함을 깨닫게 하신다. 그리하여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흔들리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1).” 내가 완전함은 나로 완전하게 여겨주시는 주의 긍휼하심 때문이다.

 

그리하여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2).” 그러므로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하지도 아니하리이다(3-4).” 나로 주의 집과 그 영광을 사랑하게 하셨으니, “여호와여 내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8-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