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반드시 광야에서 죽으리라 하셨음이라 이러므로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한 사람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민수기 26:65
여호와는 그들의 힘이시요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구원의 요새이시로다
시편 28:8
사랑은 짧고 연민은 지난하다. 정들면 지옥이라는 말이 연민 때문이다. 가엾이 여겨 서로 끌리는 마음인데 대책이 없어 끝이 보이지 않는다. 종종 이를 사랑이라 오해하고 지루해하지만 사랑은 불꽃처럼 짧게 뜨거웠다가 순식간에 시들 뿐, 거듭나는 꽃 같다. 아이는 시무룩해하였고 나는 모르는 체하였다. 종종 나는 내가 원하는 나와 전혀 다른 나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말이 많은 사람이기보다 들어주는 사람이었으면 좋겠고, 무슨 일에 끼어들기보다 마주하고 기다려주는 사람이고 싶고, 책을 읽기보다 그리 살고 싶고, 누구 말을 인용하여 글을 더하기보다 한 말에 깊이 빠져들고 싶고, 말씀을 읽고 되새김질이 오래 오래였으면 좋겠다. 그런데 보면 내가 원하는 나는 없고 내가 원하지 않는 나만 줄창 나로 살고 있으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굳이 더하지 않아도 말씀은 나열하는 것으로 말씀이었다.
결국은 다 죽고 죽어져야 들어갈 수 있는 땅이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반드시 광야에서 죽으리라 하셨음이라 이러므로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한 사람도 남지 아니하였더라(민 26:65).” 나는 날이 풀리면서 자전거를 탄다. 어디가 자주 아프다는 것은 지겨운 일이다. 그래서 연민 중에서도 자기연민이 제일 무서운가보다. 하나님도 나를 몰라주시는 것 같아서 말이다.
어찌 저 둘만 남았을까? 남겨진 자들의 속은 감격과 기쁨보다 두려움이 더하지 않았을까? 때론 하나님의 여지없음에서 사랑의 단면을 본다. 사랑은 냉정하고 가차 없는 것이다. 문득, 어릴 때 무릎 수술로 서너 달째 다리에 통 깁스를 하고 있었다. 깁스를 풀고 굳어진 무릎을 꺾어야 하는데 이 고통이 지옥이라.
고통을 참지 못하고 악악거리자 의사도 간호사도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복도에 있던 나의 부친이 들어와 나의 뺨을 한 대 올려붙이고는 눈 깜짝 할 사이에 무릎을 냅다 꺾어버렸다. 눈에서 불이 번쩍하였고 나는 외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서러웠다. 비슷한 또래 누구도 같은 시기에 같은 수술을 하였는데 저는 이내 무릎을 꺾지 못해 뻗정다리로 지냈다.
사랑은 종종 잔인하다. 아닌 건 아닌 거고 긴 건 긴 거다. 긴가민가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고로 사랑은 확신의 결정체다. 그거 하나면 나머지 전부를 포기할 수 있다. 이 또한 이상적인 것이지 실제 사람과 사람의 사랑이란 얼마나 나약한가. 연민도 사랑 같고 그저 좋은 감정도 사랑 같다. 사랑이면 더 잔인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그때 내 아버지를 두고 얼마나 원망하고 서러워했는지 모른다. 기억이 맞는다면 며칠 동안 씩씩거리며 억울해했던 것 같다. 그런데 또래 누가 뻗정다리로 굳어져 수술을 안 하니만 못하게 되었을 때 알았다. 그런 거보면 고마움이란 항상 뒤늦은 후회처럼 한 걸음씩 늦는다. 얼마쯤 더 나이가 들고 늙어야 나는 순해질 수 있을까?
모처럼 자전거를 타고 병원에 갔다. 어깨, 허리, 무릎 안 아픈 데가 없는 것처럼 몸이 발광을 하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가슴이 답답하고 금방 숨이 막혀 죽을 것 같다고 말해도 의사는 그럴 수 있다며 대수롭지 않게 뭐라 적었다. 생각을 적게 하고 스트레스를 받지 말라는데 하나마나 한 소리였다. 아픈 델 말하며 진통제를 달라니까 정말 한 움큼을 주었다. 내 연령대의 정신과 의사는 흰소릴 나보다 더해서 종종 내가 듣다가 오는 기분이다. 그래도 진통제에 몸이 반응하여 다행이었다.
설교원고 초안을 잡고 소파에 누웠다. 엉덩이와 허벅지가 아파서 자꾸 일어서서 책을 읽는데 그럼 무릎과 허리가 아프다. 앉았다 섰다를 반복하다 누워버리면 소가 된 듯 게을러지는 기분이다. 진통제를 먹고 깜빡 졸고 일어났더니 한결 몸이 가벼워졌다. 남들보다 약한 육체인데 자꾸 남들처럼 살려니까 고단한가. 나는 종종 하나님 앞에서 못할 말도 한다. 어쨌든 이 몸을 주신 것도 주님이신 거니까 말이다.
항상 후회하면서도 또 똑같은 실수와 죄를 되풀이 하는 것도 지겹다. 나는 그래서 바울의 고백을 되뇐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 7:18).” 내가 얼마나 앞뒤가 다르고 엉성하고 헐거운지 하나님과 나만 안다.
오후께 옆 사무실 새로 온 여자가 와서 맡겨진 택배를 찾아갔다. 자신은 무슨 교회를 다니는데 어떤 성경을 쓴다고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인터넷에 뒤져 저의 교회를 살펴보다 치웠다. 정치인 누가 와서 시국강연을 하고 같이 예배를 드렸던 기사가 먼저 떴다. 이렇게 말하면 안 되겠지만 오늘 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형교회가 되는 덴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몰리고 모인 수는 곧 권력이 되고 돈이 된다.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욥 9:2).” 왜 저이가 시골에 살다 올라와 그 교회를 갔는지 나는 모른다. 그리고 그런 말을 생뚱맞게 내게 한 이유도 모른다. 아, 네에. 하고, 나의 대답은 싱거웠고 더 이을 말도 없었다. “우리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33).” 우리는 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종교를 갖는 게 아니다.
뭘 한들?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 13:23).” 그것으로 어떤 구원을 원하는 것일까? 자꾸 나는 정치판에 끼어드는 종교인을 경계한다. 교회 제단에서 시국강연을 하며 자신과 정당을 지지하라 호소하는 데 몰염치를 같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새로운 본성을 만들어낼 수 없다.
그 누구도 “구부러진 것도 곧게 할 수 없고 모자란 것도 셀 수 없도다(전 1:15).” 요즘 아이 일로 신경을 좀 썼더니 온 몸이 자꾸 아팠다. 나는 나의 아픈 몸이 가장 정직한 것 같아서 때론 그 고통이 경이롭기도 하다. 안이하면 늘어지고 아프면 신경을 쓴다. 서로를 위해 안 되는 건 안 되는 게 있다. 어쩔 수 없는 걸 연민에 끌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게 지옥이다.
어린 나는 뻗정다리로 테이블에 앉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쩔쩔매고 있을 때, 나의 부친의 잔인하였던 사랑을 이제는 존경한다.
내 손의 수고가
주의 법의 요구를 채울 수 없고
쉼 없는 나의 열심,
늘 흐르는 내 눈물도
죄를 사할 수 없도다.
주여 구원하소서.
주께만 구원이 있나이다.
-오거스터스 탑레이디
그래서 이번 주간은 자꾸 그 말씀에 끌렸는가보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어쩜 오늘 우리 사회에 맞지 않는 가장 외골수적인 말씀이다. 여럿 가운데 하나요, 다른 것도 좋지만 우리 게 더 좋은 정도이면 되는 진리의 와해 가운데서 우리는 완충된 주장을 거부한다. 이거 아니면 없다.
다른 이름을 주신 바 없다. 혼합과 절충이 교회를 점점 비대하게 하고 이를 마치 부흥으로 여겨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도 먼저 찾아가는 대형 교회들에 대하여는 할 말이 없다. 뭐라 한들 저들은 이제 시스템적으로도 어쩔 수 없는 지경에 놓인 것이다. 여기서 예배도 드리세요? 하고 묻는 저이의 말에 나는 멋쩍어서 할 말도 없었다. 그러게 겨우 한두 명, 우리 식구 빼면 교회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터인데.
아뿔싸! 살아서 그 땅에 들어간 이가 겨우 둘 뿐이었으니, 오늘 말씀은 두려움으로 읽힌다. “이러므로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한 사람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모세도 아론도 모두 저편에서 죽었다. 이내 우리는 우리가 버린 돌로 새로 지어져야 하는 존재였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행 4:11).”
서로 이어져 나를 멈추게 하는 말씀이 진귀하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요 17:20).” 주님의 그 앎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으로 나의 앎이 되었다니!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
다만 나는 여기 있을 뿐이다. 주신 몸과 심약함으로 쩔쩔매는 마음으로. 이내 “여호와는 그들의 힘이시요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구원의 요새이시로다(시 28:8).” 그러므로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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