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네게 명령하는 이 모든 말을 너는 듣고 지키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목전에 선과 의를 행하면 너와 네 후손에게 영구히 복이 있으리라
신명기 12:28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시편 50:14-15
아이들은 참 어려운 대상이다. 뭐라 하면 마음 상해하고 그냥 두면 제멋대로여서, 윽박지르고 야단친다고 될 일도 아니고 마냥 내버려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한꺼번에 예닐곱 명이 오는 목요일은 오히려 나를 비워 수련하는 날인 것 같다. 이제들 친해졌다고 도대체 지질 않는다. 한 마디 하면 두 마디 하고, 그럴 때마다 내 안에 이는 짜증이나 성가신 마음을 마주하는 것이었으니.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6-37).”
거의 한평생을 어린 아이들과 같이 지냈다 해도 과언이 아닐 터인데, 못하겠어! 하고 아내에게 볼멘소릴 했더니 무섭게 해야지! 풀어줄 땐 풀어줘도 휘어잡아야지! 하고 뭐라 하는 것이다. 전엔 곧잘 그랬던 것 같은데 오히려 점점 쉽지가 않다. 공부도 못하고 어눌하여 늘 여기저기서 치여 천덕꾸러기처럼 구는 녀석을 나까지 뭐라 하기가. 심지어 한 녀석은 또 무슨 일로 스트레스가 쌓였는가, 그렇게 먹는 걸 좋아해서 얼굴이 살이 쪘는데 틱 장애처럼 눈을 연신 깜빡거리며 시선을 마주치지를 않는다.
아이들의 돌파구가 그저 게임이나 유튜브 방송을 보며 허무한 웃음을 낄낄거리는 게 전부니, 그나마 억지로라도 성경 한 장을 같이 읽고 한 구절 말씀을 되새기며 그 의미를 자기 생활로 연관 지어 글을 써보게 하는 일이었으니. 글쓰기의 유익함에 대하여는 수차례 언급하고 마르고 닳도록 설명해줘도 소용이 없다. 억지로 그저 숙제니까 써야 하는 글만큼 지루하고 하기 싫은 게 또 있을까? 나는 어제 그제, 종일 쓴 설교 글을 출력하여 퇴고하고, 글쓰기의 즐거움에 대하여 몸소 누리고 느끼고 있었다.
즉 아이들로 진을 빼는 일이나 글쓰기를 마치고 보면 나의 영혼이 정화된 느낌이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돌아가고 기진맥진하여 소파에 널브러지거나 글을 다 끝내고 누웠을 때 사지를 뒤틀면서 오는 피로감에 싫지 않은 것이다. 그 막간을 이용해 깜빡 잠이 들었을 때의 개운함이라니! 새롭게 추가된 내용이 구제와 기도를 하나로 본 주님의 시선이다(마 6:1-8). 의도적으로 기도를 가르쳐주시기 전에 구제의 잘못된 사례를 예로 들고 계신다.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4).”
그리고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5).” 앞서 저희의 구제에 대해서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을 경계하셨다. 이를 종합하여 간추려보면,
첫째,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둘째, 외식하는 자와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셋째, 은밀하게 하라.
넷째,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께 하라.
다섯째, 중언부언하지 말라.
여섯째, 이미 다 아시는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 기도하라.
문득 드는 생각이 빛도 나지 않는 ‘이런 아이들’을 상대하는 일이란 결국 나와 마주하는 일이고 내 안의 어린 것을 두고 일일이 대대거리는 일이었다. 어떤 아이의 어떤 점이 나의 그것과 닮았고, 싫고 미운 아이의 짓이 내가 꼭꼭 감추고 있는 죄성과 닮았다. 어쩌면 이를 외면하거나 맞닥뜨려 싸워야 하는 일이었으니. 그냥 보내시는 게 아니었고 거저 왔다 거저 가는 게 아니었다. 자꾸 신경이 쓰인다. 왜 자꾸 눈을 깜빡거려? 무슨 일 있어? 하며 아이 곁에 슬그머니 다가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배웅할 때 내 안에 이는 어떤 안쓰러움과 안타까움은 분명히 내 것이 아니다.
가정예배로 기도할 때 우리는 날마다 주님의 마음으로 주님의 사랑으로 아이들을 마주하고 대하고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을 구한다. 그 마음이 솔로몬의 기도와 같기를 바란다. “주께서 택하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 3:8-9).” 이는 이사야의 기도와도 같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사 50:4).”
그러할 때,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왕상 3:10).” 주의 마음에 드는 기도가 내 마음에 흡족한 것이다.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실 때 나도 거룩하여 지고, 주가 기뻐하실 때 나의 기쁨도 넘쳐난다. 우리가 안식하고 평안할 수 있는 게 주의 뜻 안에서다. 말이 설교 원고지, 나로서는 지극히 나를 위한 글쓰기여서 그 즐거움이란 어찌 설명하기가 어렵다.
이를 오늘 말씀으로 가져오면, “내가 네게 명령하는 이 모든 말을 너는 듣고 지키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목전에 선과 의를 행하면 너와 네 후손에게 영구히 복이 있으리라(신 12:28).” 주의 목전에서 주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이란, ‘그런 아이 저런 아이’를 마주하고 때론 한심하고 답답하여 욕을 퍼붓고 그만두고 싶다가도, 그리 두신 이를 생각하는 것이었으니! 고작 서너 명을 앞에 두고 말씀을 전하는 설교 원고치고 뭘 그렇게 공들이나 싶다가도 그게 다 날 위한 것이었으니!
내가 저 아이로 신경 쓰고 마음이 이끌리는 것이 때론 놀라운 이유다. 그만 오라 그러면 될 일인데, 그게 또 신기하게도 애들이 좋다고 온다.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좋다고 오는 것이고 하지도 않으면서 하라하는 이를 싫어하지도 않는 일이어서 그게 참 신기한 일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좀 이상할까? 어쩌면 내가 평생에 하나님 앞에서 그러고 있는 것이었다. 좋은데 성실하지 못하고 싫지는 않는데 좋아라하지도 않으면서 늘 주의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하시는.
어쩌면 나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 날 위해 내가 좋아서 이러고 있는 것이다. 설교 원고를 작성하는 일도, 저 아이들을 대하며 뭐라 씨름하는 일도 고역이고 때론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것 같이 억지춘향일 때도 있지만 그것이 복이었다. 내게 더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었다. 목사가 되어 설교 원고를 작성하는 일보다 더 밀착하여 성경을 읽고 다른 본문을 뒤적거리며 찾고 또 갈급해하는 복이 또 있을까? 이제는 아이의 외모가 아니라 이런저런 그 속사정을 마음에 새기며 주의 이름을 대신 부를 수 있는 일을 아무나 아무 때나 할 수 있겠나?
문득 드는 생각이 내가 복이 참 많다. 그럴 가치도 없는 위인인데 이와 같이 귀히 쓰임 받게 하시니, 평생을 돌아봐도 어디서 아저씨! 어이, 전씨! 하며 누구의 하대를 듣지 않고 살게 하셨다. 보잘것없으나 명색이 선생 소리 들으며 살았고 이제는 감히 목사라 불리며 누구의 존중과 위함을 받게 하시는 것이었으니.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4-15).”
감사란 저절로 우러나와 내 안에 이는 감격과 같은 것이다. 어찌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송구해하는 마음을 동시에 갖는다. 말씀이 놀라울 따름이다. 환난 날에 주를 부르는 일이 주를 영화롭게 하시는 일이라니! 감사를 드리는 것이 주를 영화롭게 하시는 것이어서,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23).” 이내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신다! 그 증거는 내가 몇 시간씩 글쓰기를 하며 성경을 뒤적거리는 일이었다.
그 증거는 내가 얄밉고 짜증나는 아이들 등을 토닥거리며 무슨 일 있나? 하고 다가가는 일이었다. 그러니 이런 걸 내가 하는 게 아니라고 여겨지는 것이 어찌 그저 신비한 것으로 그칠 일인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지니라(신 12:32).” 말씀 앞에 다시 자세를 고쳐 앉으며, 나는 비록 별 볼일 없는 위인이지만 나 같은 이를 들어 주께서 쓰심으로 그것이 주의 영화가 되신다면!
“전능하신 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사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시 50:1).” 언제부턴가 알람소리가 필요 없이 몸이 기억하여 일어나 앉아 말씀부터 더듬게 하시는 한 날에서,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에서 하나님이 빛을 비추셨도다(2).” 하나님이 빛을 더하셨다. 내가 잊고 있으면 꿈에라도 나타나 잊고 있던 누구를 그리워도 하게 하시고 저를 위해 주의 이름을 부르게도 하시는 것이었으니.
“우리 하나님이 오사 잠잠하지 아니하시니 그 앞에는 삼키는 불이 있고 그 사방에는 광풍이 불리로다(3).” 그렇지! 이 모든 게 주가 하시는 일이어서 나는 얼마나 감사하고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이르시되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 그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니라 하시도다(5).” 주가 다루시고 건사하신다. 주의 성도들이다. “하늘이 그의 공의를 선포하리니 하나님 그는 심판장이심이로다 (셀라)(6).”
곧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10-11).” 다 주의 것이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12).” 하나님은 이미 하나님이신 바,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13).” 그게 다 주를 위한 것이었으니,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14-15).”
곧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2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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