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따르며 그를 경외하며 그의 명령을 지키며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를 의지하며
신명기 13:4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
시편 51:6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주를 부르는 것, 이는 우리가 감사로 주를 영화롭게 하는 일과 같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이를 오늘 말씀은 우리가 상한 심령으로 주 앞에 나와 통회하는 것으로 진술한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51:17).” 이로써 우리에게 지혜를 가르치신다. 온전히 주를 바라는 것에 대하여.
널 보면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별로 잘 사는 것 같지 않고, 그렇게 특별히 나아지는 게 없는 것 같아서 말이야! 누가 와서 자신을 두고 누가 그러더라는 말을 했다. 저의 학교 언니로 둘도 없는 사이라고 했다. 서울대를 떨어지고 재수를 하고 결국 자신과 같은 여대를 다녔다. 졸업 후에 한풀이를 하듯 서울대 대학원에서 석박사를 땄다. 이듬해에 의사와 결혼을 하였다가 아이 둘을 낳고 별거중이다. 두 아이를 혼자 키우며 그리 푸념을 했던가보다.
피차 살아봐야 아는 게 삶이다. 누가 저 잘나가던 여인의 인생이 저처럼 기구하게 될 줄 알았겠나? 평생 모았던 지식과는 상관없이 외국에서 현지 기념품을 파는 가게에 서너 시간 액세서리를 파는 알바로 밥벌이를 한다. 물론 한국에 두고 온 건물에서 월세로 입금되는 돈이 있다. 전도를 거부하고 복음을 마다하는 이유는 자신이 평생 가진 학식 때문이었다. 아 안다, 별 거 없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더 사기꾼이 많더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마 19:24).” 말씀이 괜한 게 없다. 저가 차라리 배운 게 없었더라면. 그래도 월세를 받아먹고 살 수 있는 돈이 없었더라면. 국제학교를 보내놓고 나름 위안을 삼는 자식 둘이 없었더라면. 누가 그렇게 누구 이야기를 하는 동안 나는 설교 원고 중에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하는 대목을 생각하였다.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는 것은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과 맞서 싸우게 해달라는 소리다. 하나님의 나라를 허무는 것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소리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악의 모습이 우리의 이상이다. 꿈꾸는 현실이다. 바라는 실체다. 저가 그래도 돈의 여유가 있는 게 부럽다. 가진 지식이 훌륭하고 당당히(?) 사는 모습이 대견하다. 홀가분하게 그리 여겨지는 마음이다. 하나님을 대적한다고 해서 머리에 뿔이 나고 피를 흘리며 흉악하고 혐오스러운 모습을 한 게 아니다. 오히려 이 땅에서 근사하고 멋진 모습의 삶을 구가한다.
그것으로 저들은 하나님을 대적한다. 그 말씀을 외면하고 부정하는 것이다. 우리로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는 그런 걸 부러워하지 않게 해달라는 소리이기도 하다. 특히 국가나 안보나 경제나 사회나, 공직적인 측면의 모든 권세도 그러하다.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내고도 안보상의 이유로 자신들의 공격을 정당화한다. 저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자신들이 옳다고 주장한다. 명분이 무서운 것은 그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왜곡하는 것을 자신만 모른다.
뉴스를 보면서 한숨이 절로 나오는 이유다. 각종 미디어, SNS 등 우리들로 하여금 시험에 들게 하는 것이 어찌나 극성스럽게 들끓고 있는지. 아차, 싶을 때 눈 감고 코 베이는 세상이다. 드라마나 영화에 물들고 온갖 소설과 미학적인 시어에 감수성이 젖는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결국 이 싸움은 도움이 절실한 것이지 내가 어찌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사탄이 더 선하고 의롭고 착한 빛의 천사로 우리 곁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고후 11:14).”
누가 와서 누구와 이야기를 나누다 저가 늘 부러워하고 둘도 없는 이의 삶에 대하여 들으면서 알았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겠다.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않고 미워하는 것을 행한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행하면, 그것이 옳지 않다고 알게 하는 율법이 선한 것이다. 이제는 원하지 않는 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고 내 속에 거하는 죄 때문이다. 내 속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 것을 알았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않고 오히려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는구나! 만일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고 내 속에 거하는 죄 때문이다.’ 바울 사도의 비통해하는 절규를 알겠다(롬 7:15-20).
여야가 극한 대립으로 국회가 마비됐다. ‘너는 어느 쪽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어디를 지지하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그 밥에 그 나물이다. 오히려 그리 여기는 신념과 그리 판단하는 이성과 그리 적대시하는 증오와 모함과 가식과 자아도취가 우리 영혼을 마비시킬 뿐이다. 우리는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도 악에서 구하여 주시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럼 내가 쥔 명분을 포기해야 하고 길들여진 모든 악으로부터 벗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실은 ‘여기가 좋사오니’, 그냥 살기를 원한다.
그럴 거면 이혼을 하고 새 출발을 하지 왜 별거 상태로 그러고 있어? 나의 질문은 우문이 되었다. 누구는 분하고 억울해서 이혼을 못해주겠다고 했다. 누구는 이혼 절차를 밟으면 재산분할도 이뤄져야 하는데 자신 앞으로 건물이 몇 채 있어 그걸 나눠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느니 것도 번거롭고 손해가 많아 차라리 외면하고 모르는 척 남남으로 살면 그만이라고 했다. 그야말로 이미 헤어날 수 없는 시험에 빠져든 것이다. 정리가 안 됐으니 미움과 증오는 여전한 것인데, 돈 때문에라도 그냥저냥 살겠다고 하니. 사는 게 다들 요지경이다. 그만큼 배우고 그만큼 가졌으면서 왜 그러고 사나싶었다. 정리가 안 되는 게 죄다. 원하지만 원하는 것을 할 수 없는 우리 육신이 죄였다.
널 봐도 별로 나을 게 없어서, 교회를 안 다닌다는 언니 말에 누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해하였다. 그 사람에겐 뭘 해도 똑같은 변명이 가로막을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죽은 자가 살아와서 증거해도 저들은 들을 수가 없는 것이다. 가진 게 너무 많다. 건강도, 돈도, 주변의 이런저런 여건도, 너무 부자다. 우리는 어찌할꼬?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말도 안 되지만, 저들 보기에 우리는 비루하나 우리에게는 저들이 알 수 없는 기쁨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기쁨으로 관용한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5).” 저들과 같이 우리도 앞날은 알 수 없다. 다만 그 앞날에도 계신 주님을 안다. 그러므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6).” 우리의 감사가 주를 영화롭게 하는 일이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7).”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오늘 말씀을 그리 읽는다.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따르며 그를 경외하며 그의 명령을 지키며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를 의지하며(신 13:4).” 다른 데 한눈 팔 거 없다. ‘시험에 들지 않게 하옵소서.’ 너무 바라고 꿈꾸는 것들이 우리를 유혹한다. 더 그럴듯하고 더 훌륭해 보이는 것들이 우리를 설레게 한다. 그게 왜 나빠? 하고 누가 물었다. 그것으로 우린 바늘귀를 통과해야 하는 것이다. -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시 51: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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