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

전봉석 2019. 5. 5. 07:21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신명기 21:23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니 그의 힘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

시편 59:9

 

 

토요일은 될 수 있으면 엄마와 같이 시간을 보내라고 하였다. 아이가 오지 않는 시간은 헐거웠다. 아픈 허리를 전기장판에 지지며 나는 옥수수에서 제공하는 토요 무료 영화 <증인>을 보았다. 자폐를 가진 소녀의 진술이 사건의 본말을 드러내는 줄거리였다. 보면서 여러 번 울먹거렸고 눈시울을 붉혔다. 남다른 장애를 가지고 산다는 일은 고단하고 피로한 일이었다. 모두의 이해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저들도 모르는 것이어서 그리 놀리고 오해하고 위협하고 윽박지르며 치부해버리는 일이어서, 모든 고통은 지독하게 개별적이었다. 누가 누굴 이해한다는 일은 그래서 엄청난 일이다.

 

정약종은 서소문에서 참수 당했다. 저의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누스이다. 저는 누워서 하늘을 보고 칼을 받았다.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혹자는 저의 마지막 전언을 그리 기술하였다. 형 정약전과 동생 정약용은 나란히 묶여 매를 맞았다. 둘은 흑산도로 유배당했다. 영화 <증인>을 보기 전과 후에 정약용을 읽었다. 모든 고통은 유달라서 누구도 같이 할 수 없다. 아이의 것과 아이엄마의 것을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자폐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과 일찍이 참수를 당한 정약종의 고통을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느끼는 슬픔과 내 몸의 고통을 누구에게도 이해 받을 수 없는 것과 같다. 나는 오후까지 혼자 글방에 있다 집으로 갔다. 딸애와 아내는 모처럼 늘어져 있었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5:18).” 이 극과 극의 간격을 나는 이해할 수 없어 아찔하였다. 사람이 사람으로 살다 가는 중에 누구는 어떻고 누구는 어떻고 하는 개별성에 대하여 나는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어찌 살았든 저는 죽고 저도 죽는다. 죄를 숨기려고 온갖 거짓과 음모와 음해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그럼에도 고통은 오롯이 개별적이어서 아무도 이에 나누어가질 수 없다. 고통을 나누면 반이 되고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된다는 말은 사치스런 수사다. 나는 이해할 수 없는 것 앞에서 그 개별성의 단단한 껍질을 깨물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 맛도 느낄 수 없는 것이 누구의 것인지 알 길이 없다. 다만 늘 유난히 쓰고 독한 것이 나의 것이다. 온몸에 파스를 붙이고 일찍 잠이 들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21:23).” 나는 오늘 말씀에서 십자가를 생각하였고 나의 저주를 직접 담당하신 예수를 생각하였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5:19).” 누구의 불순종이 누구의 순종이 되었고, 누구의 자기주장이 누구의 자기희생이 되었다. 누구로 인한 정죄와 사망이 누구로 인해 칭의와 생명이 되어 우리의 것이 되었다. 누구로 인한 사망권세가 누구에 의해 부활의 영생이 되었다. 정약종은 참수당할 때 누워서 칼을 받았다. 누워서 하늘을 우러르며 그 짧은 찰나에 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종종 고통이 그래서 두렵다. 내 몸의 고통도 올 때와 멈출 때의 간극이 너무 멀다. 나는 고통으로 일그러져 주를 부인하는 상상을 하면 두렵다. 고통은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받아내는 것이다.

 

스데반의 최후 진술을 찾아보았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저는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그리 말하였다. 여러 개의 돌멩이가 날아와 저의 몸을 짓이기고 있었다. 저는 그 고통 중에도 어떻게 그리 고하였을까?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7:60).” 고통은 멈추거나 지나갔을 때 앞서의 것을 거짓말처럼 금세 잊는다. 고통과 고통 사이에도 얼마나 조잡한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는지 모른다. 전에 누가 위암으로 죽으면서 그런 말을 했었다. '나는 멋지게 죽고 싶었어요. 그럴 거라 다짐하고 고상하게 눈을 감고 싶었어요.' 저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그리 말하였다. 세상에 그 어떤 고통도 고상하게 맞이할 수는 없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한 사람의 죄로 인하여 우리에게 고통이 들어왔고 한 사람의 사랑에 의해 저가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이 임하였다.

 

우리는 누구도 고통을 이겨낼 수 없다. 각자 자기 몫의 것을 받아내는 것뿐이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2:8).” 그러니까 고통은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받아내는 일이다. 나는 그때 저의 침대머리에서 운명을 달리하는 그에게 지금도 충분히 고상하다고 말해주었다. 고통은 그 자체로 고상하였고 우리의 고백은 그 자체로 고귀하였다. '주여 나를 받아주소서.' 자폐를 앓는 아이의 진술과 이를 수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그 어미의 마음을 짐작하다 눈물을 흘렸다. 모든 고통은 개별적이어서 각각의 것이지 모두의 것이란 없다. 어미는 또 그런 딸애의 고통으로 고통당하였다. 영화 <증인>을 보고 정약용의 이야기 <흑산도>를 읽으며, 나는 아픈 육신을 달래며 오롯이 나의 고통을 다독거렸다. 어디 꽃구경이라도 가자는 아내의 투정어린 말에 가슴이 아팠다. 종일 우울하면서 말갛게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눈물은 또 다른 신비의 힘을 감추고 있었다.

 

고통은 벼락처럼 몸에 꽂혔고 다시 벼락을 쳤다.’ 김훈의 문장에 밑줄을 긋고 그 끝이 어디인가를 상상하였다. 정약종은 서소문에 누워 참수당했다. 본래는 엎드려 땅을 보고 칼을 받아야 하는데 저의 마지막 부탁으로 하늘을 보고 누워서 칼을 받을 수 있었다. 앞선 숱한 매질보다는 평온하였을 것이다.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오는 경로는 그처럼 참혹하였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은혜의 호사는 저들에게 모두 빚진 것이다. ‘고통은 뒤집히고 뒤집히면서 다가온다.’ 사람 사는 일이 요지경이라, 오늘 본문의 말씀도 가지가지의 그릇됨을 바로잡으신다. 그 가운데 한 대목이 인상적이다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의 아버지의 말이나 그 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부모가 징계하여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의 부모가 그를 끌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면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21:10-21).” 표면적으로는 너무 냉혹하기까지 한 교훈인데, 고통보다 무서운 게 죄였다. 그저 눈 감고 모르는 척 외면하면 그만일 줄 알았는데, ‘아담의 죄는 우리의 기질이 되었고 성품이 되었고 삶의 방식이 되었다. 어쩌다 죄를 짓는 게 아니라 늘 우리는 죄 가운데 놓여 산다. 그러느니 쳐죽일지니정작 가혹한 일은 죽는 것이 아니라 사는 일이다.

 

며칠 그러다 말던 몸의 고통이 여러 날 계속 되면서, 그런 중에서 나는 감히 연단을 배운다. 아파서 짜증스러운 몸을 이끌고 설교 글을 정리하여 교재로 출력하고 주보를 만들고, 청소기를 돌리고 주일 예배를 준비하면서.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는 데까지, 받아내는 일이다. 참고 견디는 일이 아니라 그러면 또 그리 받아내는 것이었다. 연단으로 소망을 낳는 것이다. 다 모른다 해도, 아니 나 자신조차 고통과 고통 사이에서 어줍기 마련인데 그러는 중에도 주께서 함께 하신다는 확신으로, 정약종이 누워서 하늘을 보고 칼을 받은 게 아닐까? 스데반이 날아드는 돌을 맞으면서도 꽂꽂이 무릎을 꿇고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고 기도하였던 것도!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저마다 우리의 의지가 아닐 것이다.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니 그의 힘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59:9).”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16).” 이는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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