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이같이 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자이니라
신명기 22:5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이심이로다
시편 60:12
구분이 없으면 경계가 모호하고 경계가 없으면 혼용하여 어지럽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해와 달과 공중을 나는 새와 물고기를 구분하셨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고 섬기지 말도록 경계하셨다. 이를 뒤섞어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게 되면, 그럼에도 사람은 마치 존귀하여 그 이상을 추구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보다 어리석은 게 없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즉 서둘러 죽여서라도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은총이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10:23-24).” 주께 향한 마음이 누구에게 들이는 시간과 정성으로 표현되는 것이겠다. 살면서 주를 바라고 의지할 수 있는 게 귀하다. 아이와 둘이 남아 에베소서를 읽고 그런 대화를 나누었다. 모호할 때 경계는 무너지는 것이다. 뚜렷하면 거부감이 일고 받아들이기 싫을 때도 있지만 이는 내가 인정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여자는 여자이어야 하고 남자는 남자이어야 한다.
예전의 우리는 죽었다.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살전 1:10).” 현재의 고충과 어려움은 댈 것도 아니다. 오히려 지금의 환난이 우리로 인내를 이루게 하고 인내로 연단을 얻어 하나님과 더욱 인격적인 관계로 나아간다. 그것으로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말씀을 전하면서 내가 더 큰 은혜를 입었다. 오늘의 어려움이 나로 하여금 장래의 노하심을 피하게 하는 것이구나.
가령 아이 하나가 우리로 함께 하나가 되게 하였다. 응대하고 호응하며 지지하고 응원하는 것이 성도의 도리다. 같이 걷는 자의 예의다. 같이 점심을 먹고 나오면서 아이가 아이를 돌보고 위하는 것을 보고 느꼈다. 아이가 돌아가고 아이가 남아 같이 성경공부를 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늘 우리의 어려움조차도 허투루 버려지는 게 아니었으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8:28).” 우리가 이제는 이를 잘 안다. 서로 보아온 세월이 결코 허사가 아닐 거였다. 또한 지금은 교회를 떠나 있으나 주께서 저들을 돌보고 돌이켜 다시금 주 앞에 세우실 것을 믿는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틈나는 대로 저들을 생각하고 위하고 같이 기도하자고 당부하였다.
개인적으로 나는 내 앞의 한 영혼에게 집중하기 위해 쓸데없는 SNS 계정을 하나하나 지우고 탈퇴하였다. 기웃거리는 시간이 너무 잦아서 말이다. 어디 영화 사이트는 1인 방송이 개설되면서 너무 음란하고 문란한 것으로 도배가 되는 것 같아서 지웠다. ‘페이스북’ 같은 경우도 원래 거기 누구와 잘 교류하지도 않지만 공연히 기웃거리는 시간이 많아 계정을 없애버렸다. 주를 바란다는 것은 다른 데 소비되는 정신을 줄이는 것이겠다. 생각보다 우린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하며 산다. 말품을 팔고 발품을 팔며 엉뚱한 설명을 늘어놓는데 정신이 팔리고는 한다. 가령 아이가 목표를 세우고 공인회계사 시험을 따로 준비하고 있는데 핸드폰이 고장 나서 텝으로 대체해서 쓰고 있었다. 안 불편하냐? 물었더니, 쓸데없이 허비되는 시간이 줄어 오히려 유익하다고 대답하였다.
모호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게 되기 십상이다. 목사면 목사답고 교사면 교사답고 여자면 여자답고 남자면 남자다운 게 은사다. 은사는 헬라어로 카리스마다. 오늘 말씀을 그런 의미에서 다시 읽어보면,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이같이 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자이니라(신 22:5).” 명백히 구분하신 것을 흩어 뒤섞는 모든 것은 가증하다. 최소의 것으로 최대를 사는 게 은사다. 목사는 말씀 전하는 것으로 족하다. 정치를 하면 끝난다. 교사는 지도하고 가르치면 될 일이다. 때론 엄연하다는 것보다 냉정한 일은 없는 것 같다. 아이와 에베소서 4장 17절부터 32절까지 읽으며 우리가 예전의 우리가 아니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다. 그러는 중에 그 엄연함에 대하여 묵상하였다.
우리는 더 이상 허망하지 않다. 총명이 어두워져서는 안 된다. 무지하지 않다. 생명을 떠나 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감각 없는 자 같이 살지 않는다. 방탕하지 않는다. 욕심을 따르지 않는다(17-19).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20).” 내가 아이에게 늘 말하는 것은 나처럼 어리석게 먼 길을 돌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는 동안 그것이 내게 유익한 줄 알았는데, 사람을 의지할 게 아니었으며 세상으로부터의 인정이 나를 붙들어주는 것도 아니었다. 어느새 십년을 훌쩍 넘긴 우리의 만남이 귀하고 소중한 것은 예전의 나의 그릇되었던 것까지도 교훈으로 증거할 수 있어서이다. “내가 주의 율례들을 지키오리니 나를 아주 버리지 마옵소서(시 119:8).” 붙들 것은 오직 말씀뿐임을 강조하였다.
감사하게도 아이는 날마다 묵상을 하고 짧게나마 묵상 글을 남긴다. 이 또한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게 아니라 자신을 그 앞에 세우려는 것임을, 나는 강조하였고 아이는 알고 있었다. 그래, 그렇듯 내 곁에 두시는 한 영혼에게 집중하자. 나는 목사고시 면접 때 누구의 질문에 답한 것이 내내 표준이 되고 있었다. 어떤 목회자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나란히 앉았던 네 명의 후보생들은 나름의 비전을 설명하였으나 나는 솔직히 내가 답할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더 강했었다. 어떤 목회자가 되길 원하다니! 그래서 어떤 목회자가 되겠다고 말할 수 있다니! 그리하여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나는 부끄러운 목소리로 곁에 있는 한 영혼을 위한 목회자가 되겠다고 하였다. 그때 심사위원 가운데 누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었다. 나는 솔직히 그 말도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 하나 건사하는 목회로도 족할 뿐이어서!
아이에게 그리 설명하였다. 내가 목사가 되고 가장 좋은 것은 그 구분이 점점 명확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누구라도 목사가 되는 것에 적극 찬성한다. 뭐가 힘들고 어렵고, 사람들을 어찌 건사하고 어쩌고, 다 차치하고 오롯이 말씀 앞에 자꾸 붙들려 나와야 하는 것으로도 이미 충분하였다. 하나님과 마주하는 시간이 가장 유익하였다. ‘어떤’ 목회자, ‘무엇’을 하는 목회, ‘어떻게’에 해당되는 모든 의구심은 부질없는 것이다. 내가 답할 문제가 아니다. 그리 세워주신 이가 그리 여김으로 두시는 곳이 목회다. 삶이란 모든 게 그런 것일 테지만, 그래서 목사만 목회가 아니라 학생으로 직장인으로 교사로 운전수로 어떤 일에 종사하든 그 삶이 온통 목회여야 하겠으나! 나는 그때마다 내 앞에 두는 한 가지 일에서 주를 집중하는 것이 귀하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지금은 희미하나 분명히 알 것이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너와 내가 마주하고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으로 구원이었다. 어디가 아프고 무슨 일이 꼬이고 무엇이 서럽고 어떤 게 어려워도, 이 모두는 궁극적으로 주를 바라게 하시는 것이었으니.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 언제 누가 위암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앞서 에베소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나눈 다음으로 아이와 두 번째여서 새로웠다. 새록새록 그때의 체험이 나를 더욱 선명하게 하였다. 그때야말로 목사고시를 두 번 낙방하고 그만둘 생각을 하고 있던 때였는데.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의 오묘하심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다만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32).” 서로를 위하고 바라는 마음이 하나님의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이심이로다(시 60:12).” 늘 우리 앞을 가로막는 회의와 갈등으로부터 주께서 용감하게 하시니,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 4:3).” 고로 우리가 거룩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거룩하신 하나님만 바라고 의지하는 것이었으니.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시 5: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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