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온 땅을 점령하여 이스라엘 지파의 구분에 따라 기업으로 주매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
여호수아 11:23
여호와여 그들의 얼굴에 수치가 가득하게 하사 그들이 주의 이름을 찾게 하소서
시편 83:16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 16:8).” 나는 그의 앞에 있고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다.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롬 14:12).” 자고로 전쟁의 시대에서 살고 있다. 다들 괜찮다고 하면서 하나도 온전한 자가 없다. 아이는 천식과 합병증으로 이틀이 멀다하고 아픈 엄마를 싫어한다. 엄마대신 동생을 돌봐야 하는 일이 귀찮고 이런저런 잔심부름을 도맡아해야 하는 게 싫다. 만사가 귀찮아서 뭐라 해도 귀에 들리지 않는다.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데 무슨 일 있니? 하고 물으면 그저 괜찮다고만 하고 자신을 자신조차 귀찮아하는 표정이다. 아내에게 들은 여러 이야기를 종합하여 추측한 것이다.
오후께 전화가 왔다. 웬일로 알바 가기 전 시간이 남아 카페에 들렀다가 내 생각이 나서 전화를 했다고 했다. 정신과 약은 물론 내과 약이 추가되었는데 신장이 기형적으로 붙어 있고 간이 부었고 콩팥이 어떻고 하면서 마치 아이는 들뜬 기분으로 말을 옮겼다. 신장이 좋지 않으면 누구보다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게 중요하다. 밤에 자고 낮에 깨어 일해야 하는 것이다. 어디서 들은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아이는 상관없다며 짧고 굵게 살겠다며 나의 말을 끊었다. 또 잔소리라며 싫어하였다. 고도비만으로 과체중으로 인한 합병증이 우려된다는 소릴 들었을 텐데. 오후 세 시에서 새벽 세 시까지, 아이는 고깃집에서 삼백 넘게 번다며 그저 괜찮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행 2:25).” 어쩌면 나는 내 주변의 이야기로 나의 경각심을 갖는 셈이다. 내가 항상 내 옆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돌아보면 정말이지 이상할 정도로 다들 병들었다. 그런데 또 다들 괜찮다고 한다. 중2 아이는 학교에서 특별대상이 되어 정신과 상담을 요한다는 조사지를 들고 왔다. 우울감이 깊었고 그 속에 불안과 분노가 가득하였다. 다른 한 애가 겉으로 발산하여 곁의 사람들을 못 살게 구는 편이면 이 아이는 안으로 감겨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다. 옆의 아이는 스스로 만족하며 항시 거울을 옆에 놓고 자아도취에 빠졌고 이 아이는 자신을 수치스러워하며 항상 모멸감으로 고개를 숙인다. ‘정상적이지 못한’ 검사 결과를 들고 둘 다 싫지 않는 기색이다. 왜냐하면 스스로 ‘그래도 괜찮은’ 자기방어의 무기가 생긴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아이가 돌아가고 나는 올라오는 환멸과 짜증으로 몸을 뒤틀었다. 뭘 한들 아무 소용도 없을 것 같은데, 도대체 저런 애를 언제까지 참고 또 기다려야 할까?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아이엄마와 모처럼 카톡을 하였다. 바람이 세게 불어 공기가 쾌청하였다. 저이는 첫 마디부터 자신이 한심해죽겠다며 한탄하였다. 오죽하니 딸애가 자기 책장을 정리해달라며 미션을 주었다고 한다. 작가별로 책을 정리하고 출판 연대별로 꽂아 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하기 힘들어서 미루고 있는 자신이 한심한 것이고 한심해하고만 있는 자신이 또 한심해서 못 견디겠다는 것이었다. 집 밖에 바람이라도 쐬고 오시지, 하는 말은 사치였다. 종일 소파에 붙어서 꼼짝도 못하는 무기력에 사로잡힌 것이다. 나는 수잔 훼슨 이야기를 들려주며, ‘지금, 할 수 있는 걸 해!’ 하고 말해주었다.
모두가 전쟁 중이다. 내가 보기에는 ‘아픈 아이’가 가장 건강하였다. 모두가 정상이라고 외치지만 온전한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오히려 온전하지 못한 아이는 자신이 타고 가는 열차가 순간 어느 방향인지 몰라 두려움에 떨며 전화를 하였다. 어딘데? 부평삼거리역이요! 그럼 다음 정류장은 어디니? 모르겠어요! 침착하게, 좀 더 있다가 방송 나오면 그때 말해줘. 그리고 정적. 덜컹거리는 열차소리에, 와글거리는 사람들 소리에, 어디서 아이 우는 소리에 온갖 소음이 밀려들었다. 맞아요! 맞게 탔어요! 감사합니다, 목사님! 아이는 혼자 감탄하면서 감사를 내게 돌렸다. 모두는 저를 온전치 못하다고 염려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저만 온전한 것 같고 모두가 이상하기 그지없다. 최소한 저 아이는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수시로 묻고 또 확인하며 나아간다.
성경은 우리의 시선과 생각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를 분명히 하신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2).” 그리고 무엇으로 기쁨을 누리고 살 수 있는지를 알려주신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믿음이란 얼마나 기이하고 오묘한가? 자신의 이해와 판단의 결과물이 아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뭐라 하며 자신의 말에 동조하지 않으면 바로 적으로 돌리는 정상인들에게서 나는 좌절한다.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사람들이 스룹바벨의 손에 다림줄이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이라 하니라(슥 4:10).”
아이는 정신과 상담을 요한다는 조사용지를 들고 그것으로 사고 싶은 옷을 사달라고 조를까? 하며 농담을 받아넘겼다. 우리만 괜히 심각하였다! 다들 괜찮다며 하하, 웃는다. 이혼모와 일찍이 과부된 외조모의 극심한 참견과 지나친 꾸지람에 아이의 영혼은 황폐하여졌다. ‘지긋지긋한 집구석’을 도망치고 싶어 하면서도 헤어 나올 길이 없다. 달리 위선 말고는 방법이 없어 거짓 자신으로 살아간다. 안 그래도 그런 척, 그런데도 안 그런 척, 숨기고 감추느라 늘 긴장 상태다. 극도의 긴장이 아이의 자존감을 떨어뜨리고 이를 감추느라 다시 또 거짓을 꾸민다. 누가 뭐라 하면 그저 하하, 웃는다. 농담으로 치고 들며 대수롭지 않은 듯 자기감정을 밀어내지 못하고 카펫 밑에 쓸어둔다. 아무도 모를 줄 알았는데 이처럼 다 드러났다면 이제 그것으로 또 다른 핑계를 삼는 것이다. ‘난 그래도 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해? 아내가 걱정이 돼서 아이의 조사용지와 결과내용을 사진으로 찍어 보냈다. 대충 그렇다는 정도로 알 뿐이지, 난들 아나? 정작 어떻게 해야 할지 당사자들이 더 잘 안다. 답을 다 알고 있다. 규칙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는 말에 아이는 대뜸 나를 꼰대처럼 취급하였다. 그저 선생의 빤한 말로 치부해버리는 것이다. 아이엄마는 해야지요, 해야 하는데! 하면서도 여전히 소파에 붙어서 (스스로의 표현대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못하겠어요! 그저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하네요. 하는 소리만 한다. 영혼이 병들었다고 말한들 알아듣지를 못한다. 다들 전쟁에서 퍽퍽 나가떨어진다. 조금만 무슨 일이 있으면 죽고 싶단 소릴 하고 그래놓고는 여전히 시궁창에서 첨벙거리며 노는 게 더 좋다. 게임을 놓을 수 없고 성적인 탐닉을 그만둘 수 없고 무기력한 자신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이 더 편하다.
저들의 땅에서인지 나의 땅에서인지, 전쟁으로 인한 아우성이 날마다 되풀이 되는 것이다. 가나안을 정복하기란,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온 땅을 점령하여 이스라엘 지파의 구분에 따라 기업으로 주매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수 11:23).” 달리 더 좋은 방법을 나는 제시할 게 없다. 주일에 와, 교회에 다니세요, 같이 예배드리자, 하는 말이 그저 풋, 웃음거리로나 들릴 따름이다. 아이의 표현대로 ‘별로 와 닿지도 않은 말’밖에 나는 다른 대안을 제시할 게 없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답을 다 알면서도 꼼짝도 못하고 있는 주제에! 그래서 그 방법을 알려주면 그저 하하, 하고 웃음으로나 받아넘길 뿐이니 도대체 내가 뭐라 한들!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6).” 이에 저들의 방어는 스스로 부끄러움을 가리고 그늘 속으로 숨는 일 뿐이다.
어찌 이런 일이 오늘에서 더 심각하다 하겠나? 처음 사람 아담부터 그 모양이었다. 처음부터 모든 인류는 그러했다. 하루도 안 돼 바싹 말라버릴 나뭇잎으로 가리고 또 가린들 수치심이 가려지겠나? 새삼 그 부끄러움을 덮을 수 있겠나? “여호와여 그들의 얼굴에 수치가 가득하게 하사 그들이 주의 이름을 찾게 하소서(시 83:16).” 이와 같은 잔인한 방법이 실은 그 수밖에 없는 것이겠다. 결국은 갈 데까지 가야 하는 것인가? “그들로 수치를 당하여 영원히 놀라게 하시며 낭패와 멸망을 당하게 하사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17-18).” 그러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저지른 일이 아니다. 스스로 다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면서도 모두가 그 답만 피해 다른 방도를 모색하는 꼴이다. 약을 먹는 정도나 그 개수로 그래도 된다고 여기는, 자신의 명분을 삼는 꼴이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히 6:18).” 다들 엉뚱한 소리에 귀 기울이고 타로 점이니 역술인의 주술적인 예언에 더 귀 기울일 뿐이다. ‘승리’의 승리를 환호하고, ‘YG’의 화려한 성장에 부러움을 토한다. 그러므로 ‘김학의’는 여전히 김학의를 낳고 ‘최순실’은 여전히 ‘최순실’을 잉태한다. 헛소리는 헛소리에 정색을 하고 농담은 진담보다 진실 되었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요 16:32).” 그리하여 답은 하나다. 내가 그의 안에 그가 나의 안에 거하심으로밖에 다른 묘책이 없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15:4).”
우리는 저 아이들을 어찌할 수 없어 바로 그 어찌할 수 없음으로 주께 더욱 의뢰할 뿐이다. 아이엄마와의 카톡이나 통화는 사람을 진이 빠지게 하고, 아이를 앞에 두고 그 오만상을 찌푸린 불평과 불만을 나는 감당할 수 없다. 오히려 자신의 몰락을 무슨 훈장으로 여기며 그 안에서 영웅이 되어가는 아이에게 나는 대체 무슨 말로 저를 돌이킬 수 있을까?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6).” 이것을 알려줄 길이 없다. “하나님이여 침묵하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시고 조용하지 마소서(시 83:1).” 나는 오늘 말씀을 읊조리며 주께 아뢴다. “그들이 한마음으로 의논하고 주를 대적하여 서로 동맹하니(5).” 나는 당할 수 없음으로, “나의 하나님이여 그들이 굴러가는 검불 같게 하시며 바람에 날리는 지푸라기 같게 하소서(13).” 저들로 그 허망함을 맛보게 하심이 긍휼하심이었다. “삼림을 사르는 불과 산에 붙는 불길 같이 주의 광풍으로 그들을 쫓으시며 주의 폭풍으로 그들을 두렵게 하소서(14-15).”
그리하여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18).”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 (0) | 2019.05.31 |
---|---|
복이 있나이다 (0) | 2019.05.30 |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니이다 (0) | 2019.05.28 |
내 백성아 내 말을 들으라 (0) | 2019.05.27 |
주의 손을 얹으소서 (0) | 2019.05.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