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니
여호수아 14:12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
시편 86:17
아버지는 주일 날 설교 녹음한 테이프를 건네곤 하였다. 차에 꽂고 다니면서라도 들으라는 거였다. 그런데 나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몇날 며칠씩 트렁크 안에 던져두었다가 어디 낚시 갔다 오는 길에나 세차를 하면서 쓰레기통에 버리기를 여러 번이었다. 일흔여섯 나의 아버지는 뒤늦게 배운 문서작성으로 더듬더듬 자판을 치며 오늘은 성경 강해를 집필하여 건네셨다. 어제 나는 아버지의 히브리서 강해 초교지를 받아 교정을 보았다. 문득 드는 예전의 내 모습에서 오늘에 이른 나의 모습이 감회가 새로웠다. 오후나절을 꼬박 앉아 읽었는데도 20여장밖에 진도를 나가지 못했다. 그것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다른 데서 오는 괴리감 때문이기도 하였다. 딸애가 퇴근하고 저녁에 둘러앉아 가정예배를 드리는데 모든 게 감사할 것뿐이다.
어쨌든 대사관 일 마지막 날을 보낸 아들 녀석과 통화를 하는데, 하나님이 또 어떻게 인도하실지! 우리는 알 수 없으나 이 모든 게 감격스러웠다. 나야말로 한 게 아무 것도 없는데 하나님이 이처럼 복에 복을 더하시는가하여 감사하였다. 지나가는 말처럼 나는 욕심을 드러내며 딸도 아들도 모두 목사 가정과 맺어지고, 사모로 목회자로 살기를 바랐다. 누구는 고달프네, 어쩌네, 싫다는 둥 어쩌고 말들이 많지만 어차피 한 생을 사는 날 동안 이보다 더 복되고 감사한 인생이 또 있을까? 나는 내가 싫든 좋든 말씀 곁에서 말씀 가운데 살 수 있었던 게 복이다. 지금도 내가 목사가 아니었다면 이처럼 말씀 붙들고 씨름하며 살았겠나? 비록 ‘야매’ 같아 송구하고 부끄러울 따름이지만 한 영혼을 먹이고 건사하는 일은 무엇보다 복되었다.
곁에서 같이 자란 누구와 통화를 했다. 열심을 다해 신앙생활을 하고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데도 왜 그처럼 끊임없이 어려움만 따르는지, 저의 난감한 상황이 안타까웠다. 월등히 공부들을 많이 해서 어디 내놔도 꿀릴 게 없는 인물들인데 신랑은 목 디스크로 고생하고 있고 이런저런 사연으로 회사를 또 그만두었다. 그리고 이제 초등학교에 들어간 딸애가 이런, 학급에서 ‘왕따’를 당한다고 했다. 물론 대놓고 안 놀아주며 선동하는 아이가 있긴 하지만 자신도 알듯이 애가 나름 잘났다. 뭐든 잘 하고 뭐든 나대며 뭐든 자신이 꿀리지 않으려 한다. 그러니 서로 융화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나는 뭐라 두둔하기 어려웠다. 나야말로 왕따를 숱하게 당해본 사람으로서 그게 참 남들만 욕할 게 없다. 돌아보면 내가 늘 문제였고, 싫은 짓만 골라했고, 그러니 왕따를 당하는 게 이상할 게 없었다. 공연히 괴롭힘을 받는 게 아니었다. 이를 인정하기까지 평생을 걸린 것 같다.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지 그래! 나의 말은 뜬금없었다. 저의 신랑을 두고 한 소리다. 교회에서 리더가 되고 그 모든 열심을 좀 더 전략적으로 사용하게 하시려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에서 한 소리다. 그런데 대뜸 거품을 물고 싫어! 하며 자신은 사모로 살기 싫다는 소릴 뇌까리는 것이다. 뭐가 어쩌고저쩌고 어렵고 힘든 점에 대해 나팔을 부는데, 그게 다 복이었던 것을! 나는 나의 어머니가 돌이켜 사모로 살았던 지난날을 회상하며 모든 게 감사하였다는 것을 되새겼다. 나의 아내도 비록 우리끼리는 서로를 ‘야매’라고 놀리지만 주의 은총으로 은혜 가운데 살고 있음을 감사하곤 한다. 지지고 볶고 세상에서 아등바등 사는 일보다야 교회에서 모난 사람들 등살에 시달리고 사는 게 더 나은 것은, 어쨌든 저게 다 주의 양이라! 사모는 그 최전방에서 저들을 돌보는 사역이었다.
나는 오늘 말씀이 새롭다. 45년 전 갈렙은 자신이 붙든 약속을 들고 섰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85세가 된 갈렙이 ‘말씀하신 산지’를 요구한다. 이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바로 그 땅이다. 다윗도 구할 것을 일깨웠다.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시 2:8).” 갈렙은 덧붙여 말하였다.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니(수 14:12).” 헤브론 땅 여기가 예루살렘이다. 저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모세의 신앙이기도 하였다.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 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출 33:15).” 곧 하나님이 함께 가실 것을 알고 있었다. 이는 성경이 우리에게 두시는 약속이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나는 이제 나의 부모가 붙들고 살았을 그 약속의 신실하심을 의뢰한다. 아버지의 원고는 거칠고 문장은 구어체로 길다. 때로 문장부호는 느닷없이 섞여 난감하기도 하다. 나는 아버지의 원고를 들여다보며, 예전에 낚시터 어디 세차장에다 버리곤 하였던 아버지의 설교 테이프를 떠올렸다. 어느새 자식이 장성하여 어른이 되고 보니, 부디 주의 가장 최측근으로 곁을 같이 하며 살 수 있는 게 무언가 생각하게 된다. 어디 목사만 그 길이겠나만! 85세의 노인 갈렙이 40세에 붙들었던 약속의 말씀을 가지고 주 앞에 서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 정말이지 ‘개차반’이 따로 없이 살았으나, 오늘에 이르러도 말이 좋아 목사지 순 ‘야매’로 엉터리 같은 목회일 뿐이지만, 그럼에도 내게 더하시는 은혜가 차고 넘치었다. 우리가 넉넉히 이기었다. 돌아보면 죽어 마땅했을 사람인데 이처럼 주 앞에 서게 하시니, 세상에 나보다 은혜를 입은 자가 어디 또 있을까! 나는 전심으로 저에게 말했다. 그 좋은 학식과 열심을 보다 본격적으로 주께 사용하지 그래? 나의 말에 펄쩍 뛰며 거품을 물지만 이보다 더 큰 은혜의 길이 어디 또 있겠나? 나는 사역자는 싫은데, 하고 딸애가 누구 어디 부목사로 있는 이를 소개하니 그리 꽁무니를 뺐다. 그러자 아내가 나서서 이보다 좋은 은혜가 없음을 고백하였고, 우리가 비록 하고 있는 목회가 여느 목회자에 비하면 그야말로 순 엉터리라 해도 좋았다.
우리 부부는 무슨 공갈 사기단처럼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리고는 서로를 향해 감사한 줄 알아! 하면서 오늘에 두시는 이 산지의 복됨을 인정하였다. 주가 이끄시는 삶이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30).” 우리가 한다고 해서 여기까지 오게 된 길이 아니었다. 미리 정하시고 부르신 의로움의 길이었다. 우리는 그저 송구하고 부끄러울 따름이지만 염치없게도 감사만 할 뿐이었다. 아들 딸 두 아이가 이만큼 장성하여 바르게 믿음 안에서 자라준 것도, 돌아보면 내가 지금 누구 가정을 운운하며 저들 부모의 그릇됨을 탓할 것인가! 입이 열 개라도 나는 할 말이 없는 사람이다. 말할 수 없는 나의 부끄러움으로 감사할 따름이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7-28).” 나야말로 탕자였고 탕자의 형 같은 이였는데, 나의 아버지 하나님은 그 신실하심으로 나를 버려두지 않으셨다. 나는 나의 아이들의 남은 생이 모두 주의 섭리 가운데 있음을 고백한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이가 그의 신실하심으로 약속의 산지를 요구하게 하신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결코 내가 하는 게 아니었다. 내가 걸어온 삶이었으나 모든 것이 주의 발자취였다. 나는 아버지의 원고를 교정하며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묵상하였다.
곧 나의 오늘이 주의 은총의 표적이었다.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시 86:17).” 누구와 통화를 할 때, 누가 어찌 살고 있는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보다 복에 복을 더 받은 이를 나는 여태 본 적이 없다.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었다.’ 나는 살아서 사는 날 동안에 이를 증거로 품고 살 수 있어서 기적 같다. 다들 먹고 사느라 아등바등 말도 아닌데, 나는 평안하여서 주를 찬송할 수 있었다. “주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오니 주여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4).” 나는 이제 저들을 위해 기도한다. 이 은혜의 땅을 저들에게 알리고자 한다.
“주여 주께서 지으신 모든 민족이 와서 주의 앞에 경배하며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리이다(9).” 곧 “무릇 주는 위대하사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오니 주만이 하나님이시니이다(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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