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의 자손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그들의 기업을 받았더라
여호수아 16:4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시편 88:13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엡 5:30).” 서로에게 주고받는 유익이 크다. 아이는 아이로 인해 예배 시작 한 시간 전에 왔다. 아이는 아이가 준 영어단어를 외웠고 아이는 좋은 영향을 받아 열심을 다하였다. 그런 모습에 감동하여 우린 점심으로 닭갈비를 먹었다.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29).” 자신을 위한 것으로부터 놓여나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가장 처음 되는 증거였다. 이는 또한 자신을 바로 돌보는 일이기도 하였다. 자기 육체를 함부로 굴리지 않고 그 영혼을 양육하여 보호하는 일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하심과 같다. 다들 돌아가고 아이와 남아 성경공부를 하며 나누었던 것이다. 내 안에 두시는 마음으로 힘쓰는 일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4).” 힘써야 하는 것으로,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 그런 나라에서 살며 주의 나라를 사모하고 바란다는 일은 여하튼 힘써야 할 일이다. 어느 훗날 그리로 들어가려고 해도 들어가지 못할 자가 많을 것이다.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눅 13:25).” 이를 알고 바르게 준비하는 삶이 값진 거였다.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26-27).” 이와 같은 말씀 앞에 두려움이 앞서는 게 복이다. 나름 한다고 하고 열심을 다했는데 정작 ‘나는 너를 알지 못하니 떠나라’ 하신다면 그 일을 어쩔까?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29-30).” 말씀 앞에 앉아 오늘 우리가 가는 이 길을 다시금 돌아보아 주의 뜻을 바로 바라고 구하게 된다.
우리에게 한 아이는 귀한 거였다. 서로가 그 아이로 인해 달라지고 위하여 주의 뜻을 구하고 도우심만을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21).” 물론 아이의 무논리와 맥락없음과 느닷없음이 우리를 웃게 하지만 이로써 또한 서로 돌본다. 거기서 아이의 숨김없는 솔직함이 서로를 송구하게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목사님 오늘 말씀 너무 좋았어요. 나는 이런 말을 아이에게서 처음 듣는다. 누나 오늘 감사해요. 형이 있어서 큰 도움이 되죠. 하는 식의 아이의 표현이 평소 우리가 담아두고 말로 꺼내지 않던 것을 되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아이의 경탄과 감사와 그에 따는 고백이 우리를 송구하게 하며 더 나은 자리로 인도하는 것이다. 아이는 거의 대부분 예배 시간에 늦거나 딱 맞춰서 간신히 오곤 하였는데, 아이로 인해 한 시간 정도 일찍 와서 둘이 앉아 영어도 봐주고 함께 말을 들어주곤 하는 것이었으니.
우리의 처음 되고 나중 됨이 때론 기이하기까지 하다. 이 자리에 누가 더 있었으면, 그 아이도 왔으면 하고 바라고 위하여 생각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것도 아이 때문이다. 엄마와 가정예배를 드릴 거라고 기대가 크다. 형이 왔으면 한다. 다들 어쩌지 못하는 상황이 아이에게는 늘 안타까움이다. 그럼에도 우린 주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을 바란다. “요셉의 자손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그들의 기업을 받았더라(수 16:4).” 주는 공평하시다. 잊지 않으신다. 변개가 없으시다. 비록 아직 주 앞에 나올 수 없는 누구누구의 사정과 저의 완고함과 어쩔 수 없음에 대해 주께 고한다. 어디 어느 때 주가 이끄시고 붙드심으로 그의 자리에 놓으실 것임을 확신한다. 우린 다만 묵묵히 나아갈 뿐이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 오늘 우리에게 두시는 것이라. 두신 데 마음을 기울일 뿐이다. 자주 말하고 자꾸 생각하고 더 위하고 바라는 데 보물이었다. 이를 볼 줄 아는 눈을 두셨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22-23).” 그저 우연히 오고 가는 관계란 없는 것이다. 군포 당동에서 여기까지 한 시간 반을 걸려 오고 가는 아이의 걸음이 복되다. 또는 아침 일찍 올라와서 주를 바라고 의지하는 아이의 마음이 귀하였다. 늘 우리를 긴장시키고 때론 안타까움을 주께 아뢰곤 하지만 그 일이 비로소 우리들로 하여금 더욱 주를 더욱 바라고 의지하게 하는 것이다. 더 많이 와도 누가 더 오고 규모가 커지고 시스템이 생겨나도 감당하지 못할 것들에 대하여는 상관도 안 한다. 오직 내게 주신 오늘 이 하루, 저 아이, 그 한 가지 일로 족한 것이다.
노아가 아브라함처럼 굴었다면 어땠을까? 한 곳에 머물며 방주를 지으라하셨는데 나름의 사명감으로 약속의 땅을 찾아 떠났더라면! 아브라함이 노아처럼 굴면 또 어떨까?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하시는데 그곳에 머물러 구원의 방주를 짓느라 평생을 무던하였더라면! 노아는 노아이다. 아브라함은 아브라함이다. 모세는 모세이고 다윗은 다윗이다. 우리는 우리의 개별성을 지닌 한 몸의 지체라. 팔은 팔이고 다리는 다리다. 머리는 머리일 따름이다. 그저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오직 주만 신뢰하는 기도가 필요하였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항상 그 예수의 죽음을 우리가 짊어지고 사는 까닭은,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0).” 나는 이와 같이 말씀 앞에 앉는 일 말고 다른 일은 할 수 없는 게 때론 참 귀하다. 온전하였다면, 설치고 다녔을 나를 생각하면 종종 끔찍하기도 하다. 다 주신 대로 산다.
그런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심이다. 오늘 본문을 그리 읽었다. 요셉의 후손도 그 몫을 받았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이는 자기 사람들에 대한 신의다. 하나님의 철통같은 언약이시다. 하여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6).” 그 사랑은 사랑하는 자만이 알고 누리고 그 안에 거하는 사랑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4:7-8).”
그래서 나는 종종 나의 열심을 가장 경계한다. 누구의 수고에 주의한다. 그 헌신에서 위태함을 느낀다. 성경공부를 위해 어원을 찾고 그 의미를 해석하고 부여하는 의미에서 허덕이는 수고가 우리의 감사와 경탄을 주춤거리게 하는 것이다. 나름의 신중함이 위선을 조장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아이의 솔직함 앞에 난처하기도 하지만 필터링 없는 저의 고백과 직설이 우리로 우리 자신에 숨기고 있던 언어를 삶의 최전방으로 끄집어내게 하는 것이다. 성경공부가 중요하지만 백날 성경공부를 했다고 해서 사람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지식은 높아져도 현실은 그대로이다. 많이 봤다. 당장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줄 것처럼 헌신과 봉사로 열을 올리던 사람이 순식간에 밀려가는 안개와 같이 형체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말이다. 어디서 또 새로운 열심으로 누구와 무엇을 도모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열매 없는 과목이라. 번번이 그의 수고가 고달플 따름이다.
나는 나의 연약함으로 또는 아이의 연약함으로 주를 만난다. 주의 음성을 듣고 이끄심과 함께 하심을 누린다. 아이가 아이로 인해 예배 전에 일찍 오고, 끝나고 한 주간을 살며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고, 그게 누구를 위한 것인 줄 알았는데 실은 자신을 주 앞에 더하는 일이었으니. 나는 다만 전하고 같이 빌빌거리면서도 함께 가는 길이다. 여기서 오늘 기도를 되뇐다.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시 88:13).” 때론 여러 형편과 사정이 나를 힘들게 하고, 번번이 또 나를 위협하여 속이고는 하는 인생이지만 아랑곳할 것 없다. 그건 그거대로 그런가보다 하고, 우린 그저 묵묵히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 앞에서 부르짖었사오니 나의 기도가 주 앞에 이르게 하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기울여 주소서(1-2).”
그리하여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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