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전봉석 2019. 6. 30. 07:23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거류하는 어떤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맞이하였더니

사사기 19:1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시편 115:11

 

 

죄는 죄를 낳고, 죄는 죄로 덮이는 꼴이어서, 평화를 위해 전쟁을 하는 식이다. 삶은 자체로 아이러니하고 사람은 자체로 선할 수 없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17:9).” 다들 괜찮다 적당하다 나아질 것이라 한다.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10).” 보응하심이 은혜였다.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11).” 뒤늦은 후회는 돌이킬 수 없는 세월 위에서 서러운 법이다. 오늘 말씀은 그저 참혹할 따름이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거류하는 어떤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맞이하였더니(19:1).” 안이하고, 나태하고, 건방지다. <천로역정>의 한 대목처럼 저들은 족쇄에 묶여 무력하게 잠들어 있다.

 

평소처럼 글방에 올라가 묵상글을 읽고 설교 원고를 검토하다보니 아침나절이 다 갔다. 어디로 할까? 준비할 때, 초안을 잡고 관련 성경구절을 찾을 때, 이를 연결하여 정리할 때, 작성할 때, 쓴 것을 다시 고칠 때, 그리고 들고 다니며 다시 볼 때마다 새롭다. 이를 어찌 말로다 설명해줄 수 없는 맛이다. ‘성령 충만함에 대해 그때마다 열어 보이시는 계시라 표현해도 될까? 생각지도 못한 것이 보이고 들린다. 그러려고 의도한 게 아닌데 인도하심이 느껴진다. 가령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7:55-56).” 두 구절을 놓고 오래 머물렀다.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은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는 일이다. ‘우러르다는 받들어 공경한다는 뜻이다. ‘주목하다는 관심을 가지고 주의를 살핀다는 의미다. 그러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보인다. ‘예수께서 그 우편에 서신 것을 본다. 이를 과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되보라의 간격이 멀지 않다. 말은 내가 하고 보는 것은 네가 한다. 네게 권하는 그 말을 내가 한다. 밑줄을 긋고 그 의미를 묵상하는데 새삼 놀라운 마음이었다. 우리가 사는 이 삶이 곧 직분이다. 누군 여자로, 아이로, 노인으로, 식당 부엌에서, 차를 운전하며, 회사에서, 저마다 맡기신 생을 다하는 일! 누가 목을 매고 자살했다. 늘 단아하고 연기 잘 하던 이였는데, 무슨 사연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갔다. 세계적으로 자살률이 가장 높은 우리 사회는 날로 정신분열증을 생산한다. 그런데도 다들 괜찮다, 곧 나아질 것이라 한다. 안이하고 나태하고 건방진 사회다. 누구의 자살로 소름이 돋고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성경은 일갈하는 것이다.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6:4).” 여기서 부사 오로지는 다른 여지가 없는 ‘~을 위하고 ‘~인 명사에 붙는다. ‘오직 한 곬으로의 재촉이다. ‘은 한쪽 방향으로만 난 길이다. 발음은 로 읽는다. 명사다. 메모를 하고 오래 들여다보았다. 결국 예수님이 왜 그와 같이 말씀하셨는지 알겠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16:24).” 저의 사연이 무엇인지, 또 어떠하였는지는 엄밀히 중요하지 않다. 분명한 건, 우린 그처럼 강인하지 못하다. 주의 도우심이 아니면 스스로도 감당을 할 수 없는 변덕쟁이에 게으름뱅이다. 영혼이 미약한 것이다. 이를 인정하는 자는 두려워할 줄 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115:11).” 이와 같은 정의 앞에 안도한다.

 

2 아이 둘을 보충해주다 아내는 '실컷 내키는 대로 살다 죽기 전에 믿으면 된다'는 아이들에게 그럴 수 없는 게 우리의 미약함임을 설명해주었다고 말했다. 다들 자신하는 것이다. 선생은 자신이 죽음을 앞두면 사라질 것이라 호언했다. 아이는 스스로 그러다 믿으면 된다고 장담했다. 우리의 호언장담으로 호기로움과 단언함이 죄의 본 모습이다. 하나님 없이도 자신이 할 수 있다는 게 죄다. 애나 어른이나, 선생이나 중2. 나는 아내의 수다스러운 말을 들으며 혼자 생각하였다. 우리가 자신하는 모든 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다. 이에 그 보잘것없음을 아뢰는 게 자기 십자가다. 어떠하든 이를 지고 주를 따르라는 말씀은 팔자소관으로 치부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1:24).”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으로 채우는 일이다.

 

예수님의 남은 고난은 무얼까? 스데반이 죽음 앞에서도 당당히 말하고, 보라 외치는 때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우편에 서 계셨다. 곧 그 남은 고난이 . 아직 이 땅에 살아가는 우리. 남겨진 우리에게 주님은 말씀하신 것이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14:1).” 믿고 가야 하는 곬인데 자꾸 한눈을 팔다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훅, 끌려가는 것이다. 앞서 얘기한 저 여배우는 왜 스스로 죽은 것일까? 철학자 쇼펜하워의 말처럼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고결한 자기 존엄한 결정이 자살이라 여길 때 더는 손쓸 겨를이 없다. 나도 실은 그와 같은 유혹에 종종 매료되고는 하였다. 누구의 선택을 들으며 안타깝고 두려운 마음과 같이 이제 평안히 놓여났다는 안도감도 들곤 하였던 게 사실이다.

 

내가 처음 접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이다. 같이 가난한 목회 현장에서 곬을 같이 하던 가정의 수재로서 서울대를 다니던 형이 관악산에서 스스로 몸을 던졌다. 친구네 가정은 아연실색하였고 어린 우리에게는 쉬쉬하였다. 다들 실족사로 알고 있었으나 상의 안주머니에서 유서가 발견되면서 모두는 어둠 속에서 말을 잃었다. 어린 나는 무척 무섭고 슬펐지만 이상하게도 홀가분할 것 같은 유혹에 빠져들었다. 한동안 그런 생각에 혼자 궁리했던 기억도 난다. 뜻밖의 누구 자살 소식에 마음이 어려운 오후였다. 여호와를 의지한다는 건 결국 우리의 자의적인 노력에 의한 게 아니다. 성령이 이끄심이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115:11).” 이를 안다는 게 기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이요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이라(4).” 자기들 손에 들린 것을 먼저 신뢰하기 때문이다. 나는 선생의 호언과 중2 아이의 장담이 서로 일맥상통한다는 것을 한참 더 생각하고서야 알았다. 세상은 아랑곳하지 않고 죄로 물든다. “그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유다 베들레헴 그의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서 거기서 넉 달 동안을 지내매(19:2).”

 

더욱 극렬하게 악을 취한다. “그들이 마음을 즐겁게 할 때에 그 성읍의 불량배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기며 집 주인 노인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와 관계하리라 하니(22).” 어찌 당해낼 재간이 없다. “보라 여기 내 처녀 딸과 이 사람의 첩이 있은즉 내가 그들을 끌어내리니 너희가 그들을 욕보이든지 너희 눈에 좋은 대로 행하되 오직 이 사람에게는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 하나(24).” 결국은 평화를 위해 전쟁을 벌이는 것이다. “그 집에 이르러서는 칼을 가지고 자기 첩의 시체를 거두어 그 마디를 찍어 열두 덩이에 나누고 그것을 이스라엘 사방에 두루 보내매(29).” 어제 하루 서울 한복판에도 이쪽과 저쪽이 나뉘어 서로 반대 집회를 일삼았다. 오늘 시인이 절규가 절절하게 들리는 것 같다.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는 인자하시고 진실하시므로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115:1).”

 

다른 수 없다.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20:22).” 그렇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는 세상이다. 다들 저마다 자신들의 손에 들린 은금을 우상으로 삼는 사회에서 그 결과가 자고새의 후회뿐이니 종당에 내릴 결론은 자유의지를 운운하며, 죽음을 앞두면 사라질 거다! 하는 늙은 선생의 말과 내키는 대로 살다 믿으면 된다는 철딱서니 없는 중2 아이의 말이 오버랩 되었다. “어찌하여 뭇 나라가 그들의 하나님이 이제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리이까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 115:2-3).” 우리는 눈을 들어 말하되, 보라! 하고 외치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지 못하는 것은 사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29:25).” 사는 게 두려운 것이다.

 

오늘 말씀은 이를 명료하게 일깨우신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115:11).” 내가 의지할 이.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 나의 방패.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9).” 다른 길 없다.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10).”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을 막론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시리로다(13).” 나의 아집과 교만함을 내려놓는 것. “너희는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복을 받는 자로다(1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