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미가가 이르되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하니라
사사기 17:13
여호와는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 그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으시도다
시편 113:4
‘좋을 대로의 신앙’은 오늘에 이르러 두드러진 게 아니었다. 오늘 본문은 개인의 신앙이 우상숭배가 되어 종교적 도덕적 타락을 가져오는 것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미가라는 사람의 패역한 신앙이 우리 사회의 단적인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자기주장에 함몰하고 생각은 신념이 되어 목숨까지 건다. “이에 미가가 이르되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하니라(삿 17:13).” 참 아이러니하게도 그에게는 부한 재력이 있었다. “그 사람 미가에게 신당이 있으므로 그가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한 아들을 세워 그의 제사장으로 삼았더라(5).” 자신들이 지닌 힘으로 권력을 삼고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6).” 그것에 부화뇌동하는 사람들이 모여들고 이것은 세력이 된다.
개돼지 같은 인생이다.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벧후 2:22).” 부도덕한 시대이면서 자기 허영이 가득한 세대이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벧후 4:3-4).” 그런 거 보면 무식이 가장 큰 죄악인 것 같다. 모르니까 저런다. 알지만 안다고 여기는 자기 지식이 실은 자기 영혼을 죽이는 일이었으니.
이를 바울 사도의 표현으로 하면,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 2:28-29).” 얼마나 우린 우리 자신에게 속고 사는지. 정작 자신을 망가뜨리는 것은 남이 아니라 자기고집이었다. 겉으로는 선하고 의젓하고 남다른 교양을 갖춘 것처럼 굴고 심지어는 신앙의 모범이 되는 것 같으나,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4).” 이는 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마 6:1).”
나는 아니라고 장담할 수 없어 두렵다. 누구보다 내가 더 그렇다는 걸 잘 안다. 싫든 좋든 남을 의식한다. 보이는 나를 위해 얼마나 공들이고 사는지 모른다. 이면적 자신의 모습은 어떠한지, 자신은 안다. 그러므로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하나님을 따라! 말씀을 보내시어! 그러할 수 있게 하시는 오늘의 나의 여건과 상황이 복이었다. 초등부 아이들과 수업을 하며 모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글을 쓴다는 건, 자신의 역사를 더듬는 일이다. 어떻게 글을 쓰는 게 좋아졌고, 그것이 내게 어떤 유익을 주는지 말해주고 싶었다. 한 아이는 아빠의 종교적 신념으로 오지 못했고 한 아이는 덩달아서 오지 않았다.
나는 종종 두렵다. 어른들의 결정이 한 어린영혼을 좌우할 수 있다는 게 무섭다. 아빠가 가지 말래요. 교회에서 하는 거고, 성경을 가지고 한다고 안 된대요. 아이의 단순 명백한 변명이 두려울 정도로 명료하였다. 하긴 그 또한 하나님이 뒤집어엎으실 일이다. 전에 한 친구가 자기 아이들 유아세례를 받는 문제에 대해 나름은 논리적으로 거절하였던 게 기억난다. 안 믿는 사람들이면 모를까 믿는다는 부부가 그처럼 단호하게 ‘종교적인 선택’이니 ‘아이의 선택’을 존중한다느니 하는 설명으로, 결국은 하나님이 싫었던 것이다. 그러다 먼 길을 돌고 각자 죽을 고비를 넘긴 후에 주 앞에 굴복하였다. 지금은 강원도 어디서 기독교 대안학교를 이뤄 믿음으로 헌신하고 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로 사는 게 복되다.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롬 3:1-2).” 늘 우리를 발목 잡은 게 자기신념과 자기주장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말씀을 바로 알지 못할 때 오늘 본문은 단적으로 가장 추하고 어리석은 우리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는 것 같다. 이에 시편의 말씀은 깔끔하게 정리해준다. “여호와는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 그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으시도다(시 113:4).” 어떤 강대국의 권력자보다 그 어떤 명분과 권위보다 위대하시다. 정작 내가 두려워할 것은 따로 있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롬 2:21).” 우린 얼마나 자주 빈말을 날리고 사는지! 밥 한 번 먹자라든가 언제 한 번 보자라든가 심지어 ‘기도할게’라는 인사치레에까지! 피차가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을 마치 대단한 사이인 것처럼 굴며 의존하고 오해하고 더 나은 관계라고 자랑하면서.
나는 아이들을 앞에 두고 있을 때면 동시에 여러 개의 훈계를 듣는 것 같다. 정말 이 한 영혼을 붙들고 씨름하는가? 저 아이를 주의 마음으로 사랑하기는 하는 것일까? 다른 사람을 가르치면서 정작 나는 그 말씀을 도둑질하며 사는 건 아닐까? 그런 내게 성경은 목소리를 높이신다.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 4:28).” 목사가 되고 종종 듣는 기도 부탁이나 인사처럼 건네는 ‘기도할게’ 하는 말을 얼마나 실천하며 살고 있는지. 그래서 저의 이름을 자꾸 어디에 적는다. 오며가며 저를 기억하고 주의 이름을 부른다. 아이를 위하고 다독이는 정도로는 어림없다. 그 영혼의 싸움이다. 나는 어찌 대처해야 하는지 모른다. 글방이 교회여서, 선생이 목사여서 싫다는데 그래도 오라 해야 할지, 그럼 오지 말라고 해야 할지,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둬야 할지.
나는 나의 많은 생각으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 도무지 모르겠다. 늘 같은 소릴 반복하고 또 똑같은 모양이라, 그럴 바엔 연락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어서! 그래놓고는 내내 마음에 걸려 다시 연락을 해야 하는 것인지, 그냥 내버려둬야 하는 것인지, 다른 말로 말해야 하는지, 직접적으로 주를 전해야 하는 것인지. 나는 나의 사소한 생각들로 시달린다. 그러니 영적으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우리는 얼마나 아무렇지 않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며 살고 있는지!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말 3:8).”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10).”
이에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호 12:6).” 주께 바라고 주께 구하는 수밖에. 실은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어, 아이와 기도하면서 나는 눈을 뜨고 아이를 살피며 주의 이름을 부른다. 우리에게 두시는 이와 같은 간절함이 얼마나 귀한지. 이를 결코 헛되이 삼지 않으실 것을 믿으며. 아이의 한 날이 참 길고 고단한데, 그때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으로 ‘주의 관심’을 표현하는 게 나의 일인 것이다. 허황된 꿈을 좇지 않는다. 거창한 구호나 자기신념에 매몰되지 않는다. 사람들처럼,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하는 데 애쓰지 않는다. 오직 주의 함께 하심으로, 성령 충만함으로!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골 2:11).”
그러므로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12).” 다시 말해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그 안에서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붙든다. 나 같은 것을 귀히 사용하시는 데서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15).” 더는 저들의 부와 명예와 성공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위태로울 따름이다. 다만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시 113:1).” 이 일은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2).” 미루거나 다음에 할 일이 아니다.
곧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3).”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은, “여호와는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 그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으시도다(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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