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전봉석 2019. 7. 3. 07:18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룻기 1:20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시편 118:5

 

 

사는 게 참 고달플 때도 있다. 인생에 기근이 들어 좀 잘해보려고 그랬을 테지만, 모압 땅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나오미가 돌아왔다. 다들 그를 알아보자,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1:20).” 인생을 돌아보니 쓴물 같다. 그럼에도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118:5).” 결국 모든 걸 잃고 돌아온 것 같으나 저에게는 룻이 있었다.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1:17).”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그 안에 숨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있다.

 

엊그제 아이가 왔다 가서 쓴 묵상글이 기특하였다. 나는 그 글을 오려다 누구에게 보여주었다. 그러자 왜 자신에게는 그럼 감사가 없는 것인지 물었다. 가족이어서 그렇다. 너무 밀착된 까닭이다. 감정적으로 앞서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도 예수님 살아생전에는 알아보지 못했다. 우리에겐 차가운 가슴과 뜨거운 머리가 필요하다. 머리로 알 일이 아니고 가슴으로 채울 일도 아니다. ‘영적인 거리두기가 필요하다. 늘 가슴이 앞서 먼저 욱, 하고 치미는 것에 대하여 식히고 또 식혀야 한다. 혹은 냉랭하기만 한 머리로는 실천이 따르지 않는다. 자칫 스스로 만족하는 사람들이다. “그 때에 그들이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7:41).”

 

그렇게 잠깐 카톡을 주고받고 말씀을 정하고 초안을 작성하였다. 복종하지 않으면 자기만족을 추구하게 돼 있다. 거절하는 마음으로는 세상으로 돌아가려할 뿐이다.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하지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39).” 그리고는 자신들의 신을 자신들이 만들어 갖고 싶어한다.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40).”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성과를 숭배하는 것이다. 그러자니 지금 저, 아픈 아이는 성가시고 귀찮을 따름이다. 서로를 고생시키는 애물단지 같이 여겨지는 것이다. 그게 어떤 지겨움인지 알겠다. 내가 뭐라 할 수 없는 것이 어쨌든 나는 한 발 떨어져 있을 수 있는 거리에 있기 때문이다.

 

저의 마음을 강퍅하다고 뭐라 할 수 없다. 생이 모진 것이다. 그럴 때면 우리의 본성은 애굽으로 돌아가자.’ 꿈틀거리며 튀어나오는 절규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4:11-12).” 그런 자들을 이끌어오게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다. 그럴 때 전우주적인 사건과 상황과 사람과 그 속의 결정들을 동원하신다.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없다. 이를 알지 못할 때,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14:3-4).” 하는 것이다.

 

그럴 때 아니라고 말해줄 수 있는 사명이 우리에게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 돌아가리라(23:36).” 무서운 말씀이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37).” 그럼에도 그 소리에 귀 기울이지 못할 때,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38).” 그게 언제일지, 여전히 하는 일은 잘 되고 몸은 건강하며 모아놓은 것들이 많이 있으니, 이런 말이 들릴 리 없다. , “여호와의 말씀이라 그러므로 보라 서로 내 말을 도둑질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23:30).” 말씀을 따라가다 헉, 하고 숨이 막혔다. 누구와 나누는 이야기가 종종 두려울 때가 있다. 정작 해주어야 할 말은 하지 못하고 엉뚱한 소리에 동조하다 말면 돌아서서 내내 찜찜하다. 하나님이 치시겠다니!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그들이 혀를 놀려 여호와가 말씀하셨다 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31).” 말씀 앞에 바로 서야 하는 것이 두려움으로 느껴진다. 허튼소리를 하느니 때론 입을 다무는 편이 낫다. 그래서 말을 않으면 내 속이 또 타는 것 같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거짓 꿈을 예언하여 이르며 거짓과 헛된 자만으로 내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자를 내가 치리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며 명령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들은 이 백성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32).” 오늘 나에게 펼쳐두시는 날들이 사뭇 단조로운 것 같으면서도 어쩜 이리도 복잡하고 난해한지. 누구와 대화하고, 무슨 말을 해줬어야 하는데 하는 마음이 들면서 나의 말이 나를 때리는 것 같다.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고 바로 알지 못하는 말을 전할 때, 도리어 하나님의 말씀을 저에게 지워 짐이 되게 할 수 있다.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11:46).” 또는 그 말씀의 본뜻을 성령의 이해로 해석하지 못하고 멋대로 정의하고 태연하게 증거하면 안 된다.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9:54).” 내가 아는 말씀을 권력으로 휘두르려 해서는 안 된다. 종종 나는 목회자들에게서 이를 느낀다. 말씀을 빙자하여 휘두르는 저의 혀가 무섭다. 내 말이 그러하지 않다고 장담할 수 없다. 그걸 느끼면서 나는 SNS를 끊었다. 그런 식의 가벼움을 경계한다. 어디 아무렇지 않게 널어두었던 마음을 조심스럽게 거두어들인다. 누구를 함부로 지지하지 않고 무엇을 함부로 평하지도 않는다. 그러려고 자꾸 말조심을 한다.

 

거룩함은 단순하고 단순하다. “내가 예루살렘 선지자들 가운데도 가증한 일을 보았나니 그들은 간음을 행하며 거짓을 말하며 악을 행하는 자의 손을 강하게 하여 사람으로 그 악에서 돌이킴이 없게 하였은즉 그들은 다 내 앞에서 소돔과 다름이 없고 그 주민은 고모라와 다름이 없느니라(23:14).” 외모로 보이지 않는다. 겉치레를 혐오한다. 하나님만 의뢰한다. 가증함과 간음과 간사함을 멀리한다. 언제든 그럴 수 있는 게 나다. 나는 나를 그리 알고 있다. 그저 거룩함은 자연스러울 따름이다. 억지스럽지 않다. 목소리를 높이고 자기주장에 함몰되지 않는다.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하여 그 말을 알아들었으며 누가 귀를 기울여 그 말을 들었느냐(18).” 의견이 다를 때 침묵함으로 더는 논쟁하지 않는다. 논쟁의 시대는 지났다. 저들에게 뭐라 한들 저들의 완악함은 더욱 견고해질 뿐이다. 예수님은 헤롯 앞에서 대제사장 안나스 앞에서 빌라도 앞에서 변론하지 않으셨다.

 

문득 드는 생각이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내게는 힘이 있다. 주의 권능이다. 그래서 두려운 것이다. 말씀을 빙자하여 함부로 휘두르려들고 이를 정치적인 도구로 삼는 자는 화있을진저. 그래서 바울의 결연한 목소리가 크게 들린다.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6-27).” 달려가는 길이 향방 없이 하지 않고, 싸우는 일이 허공을 치듯 헛된 일에 열을 올리며 다투지 않고, 그러느니 자신의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이 옳다. 나 하나 바로 서고 온전히 걷는 게 중요한 시절이다. 다들 다 안다. 잘 안다. 다들 똑똑하고 자기주장에 겨워 목소리를 높이는 세대이다. 묵묵히 나는 나에게 주시는 감동으로 주의 길을 따라가는 것뿐이다.

 

누구와의 대화에서 또는 오늘 나오미의 기구한 인생 역경에서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경륜을 상상하였다. 그럴 때 드는 마음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5:24).” 왜 그래야 하는지 알겠다. 누구더러 뭐라 하기보다, 내가 나의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나의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혼자 들어앉아 내게 두시는 마음과 생각과 누구에 대한 이야기와 누가 오는 것들에 대하여! 결국 그 해결점은 나의 현란하고 논리 정연한 학식으로 하는 게 아니었다. 감성을 울려 동정을 유발하고 측은지심으로 하는 일도 아니었다. 결국은 내가 하는 게 아니라, 성령이 하셔야 하는 일인 것이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4:22-24).”

 

이 말씀 하나에 모든 길이 담겨 있었다. 옛사람을 벗어버려야 한다. 저는 쩍하면 애굽으로 돌아가자, 한다. 그때가 좋았지 하며 추억에 젖고 그리움을 동원한다. 가슴을 식히고 보면 죽고 못 살 것 같은 이들이 다들 별 거 아니었는데! ‘오직 심령을 새롭게 하자.’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어져가자. 새 사람을 입으라!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이를 어찌 증명하여 알 수 있는 길은 없으나, 그 열매로 그를 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7:16).” 선생이 자신들 사이트를 링크하여 보내왔다. 어떤 신호 같았다. 누구처럼 어떤 글을 써서 그리 같이 하자는 소리 같았다. 뭐라 답을 할까, 한참 궁리하다 말을 하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이곳에서 뚜렷하게 보고 서 있는 저에게 나는 뭐라 설득할 재간이 없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20:29).” 룻이 뭘 보고 그리 시어미를 따라왔겠나? 저도 알 수 없는, 어찌 설명할 길 없는 불가항력적인 것이라! 나는 이를 선생에게 설명해줄 언어가 없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복되다.’ 지금 선생으로서는 하늘이 두 쪽이 나도 뭔 소린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또는 누가 단지 조카아이의 병적인 병약함으로 온 식구가 걱정 근심하는 일 외에 그 아이로 하나님이 이뤄 가시는 구원 사역을 어찌 이해할 수 있겠나? 영적으로 거리를 두고 좀 떨어져서 봐라. 그리 말해준 것도 그 때문인데 나의 말에 대꾸가 없었다. 그저 나는 저들에게 광신도일 뿐이다. 어린 룻이 어리석을 따름이다. 미래도 보장도 없는 시어머니 나오미의 땅으로 돌아온 것이 말이다. 훗날 저가 다윗 왕의 증조모가 될 줄이야!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118:28).” 그 답은 명료하여서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2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