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전봉석 2019. 7. 6. 07:13

 

 

그 기업 무를 자가 이르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룻기 4:6

 

주는 나의 은신처요 방패시라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시편 119:114

 

 

누가 알았겠나. 그저 아무개로 살다 자기 유익을 좇아 선택하는 길에 대하여. 유다가 다말에게서 베레스를 낳고, 보아스로 이어져 보아스는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다는. “주의 말씀대로 나를 붙들어 살게 하시고 내 소망이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119:116).” 그러니 우린 무엇을 바라리요? “주는 나의 은신처요 방패시라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114).” 그야말로 한 치 앞도 알지 못하는 우리들로서 우리가 붙들고 의지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 말씀뿐인 것을. 그러므로 내가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147-148).”

 

가만히 앉아 전날의 일을 돌아보면 벌써 까마득한 옛 이야기만 같다. 그런 가운데 주의 인도하심은 선명하여서 나는 다만 주께 의지한다. “나는 주의 종이오니 나를 깨닫게 하사 주의 증거들을 알게 하소서(125).” 누가 오고 가고, 무슨 일이 어찌 어그러지고 연결되고, 우린 그럴 때마다 파르르 떠는 나뭇가지 같아서 쉴 새가 없는데. “그 때에 그들이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7:41).” 설교 원고를 뒤적거리며 읽다 덜컥, 두려운 마음이 엄습하였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17:9).” 내가 선을 추구하는 게 아니었다. 의로워지려고 행하는 삶도 아니었다. 오직 주를 바랄 뿐이다. 아니면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느니라(4:11).”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일이다. 수시로 드는 마음을 주체할 길이 없다.

 

아이가 메롱이었다. 병원을 옮겨 새로 좀 진찰을 받아보자는 엄마의 말에 발끈했던 모양이다. 나름 전날에 통화하며 들었던 설명이라, 내색은 않고 아이를 설득하려는데 당사자인 그 마음도 이해는 갔다. , 낯설고 어려운, 그 짓을 되풀이해야 한다는 데 화가 날 법도 하다. 뭐라 한다고 될 일도 아닌 것이고. 기분이 축 쳐진 아이를 기분도 풀어줄 겸 <스파이더맨> 을 보러 갔다. 나는 가족들과 갈 때도 종종 힘들어하는 영화관인데, 아이와 가는 것으로도 긴장했던 모양이다. 저녁에는 녹초가 되어 일찍 곯아떨어졌다. 그저 내게 두신 삶이라. 그럴 때면 당장의 무엇을 바라는 건 인지상정이다. 나는 저들이 그때에 송아지를 두고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였다는 말씀이 이해가 되었다. 오죽하니 그러했을까? 그럴 수밖에 없는 우리의 마음이라. 되레 그 마음을 믿는 것이 미련함이다.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자니라(28:26).” 아이엄마의 심정도 아이의 상황에서 그 기분도, 그래서 처한 가운데 더 나은 것을 추구하려는 마음도.

 

어쩌면 누구나 그럴 수 있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게 베드로이다. 저는 자신이 예수를 모른다고 배교할 때까지도 자신이 배교할 것이라고 짐작도 못했다. 오히려 장담하기를,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14:29).” 모두는 자신의 마음을 붙들고 산다. 그러다 죄가 더하면 드러나는 것이 그래서 더욱 자신을 신뢰하는 것이다. 오히려 사람들을 비난하며 자신을 두둔한다. 내 마음이 주의 마음으로 거하지 않으면 불을 보듯 빤한 일이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15:6).” 남을 뭐라 하는 것은 자기 안의 수치를 가리기 위한 변호다. 비난에 대해 지레 선수를 치는 게 남 탓이다.

 

죄가 죄를 낳는 경로는 다윗이 음욕이 들어 밧세바를 범한 뒤 이를 은폐하려 거듭 드는 과정에서 여과 없이 드러난다. 그의 남편 우리아를 끌어들여, “그가 또 우리아에게 이르되 네 집으로 내려가서 발을 씻으라 하니 우리아가 왕궁에서 나가매 왕의 음식물이 뒤따라 가니라(삼하 11:8).” 얼마나 혐오스럽고 구차하며 가증스러운지. 결국은 전장에 내몰아, “그 편지에 써서 이르기를 너희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가서 그로 맞아 죽게 하라 하였더라(15).”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의 아내 밧세바를 아내로 맞으니. “그 장례를 마치매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를 왕궁으로 데려오니 그가 그의 아내가 되어 그에게 아들을 낳으니라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27).” 이는 다윗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다. 나의 마음도 그러한 것이다.

 

결국은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 한다. 우리를 보호하셔야 한다. 나는 아이를 돌보며 아이가 안 됐고 불쌍하다가도 내가 힘에 부쳐 성가시다. 영화 중간에 아이가 화장실에 간다고 갔는데 돌아오지 않았다. 아이 가방이 자리에 있어 핸드폰도 가져가지 않았다. 불안이 엄습하여 다 챙겨 들고 밖으로 나오자 저만치서 몸을 풀고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왜 나왔냐며 타박이다. 실내가 춥고 너무 시끄러워 잠깐 쉬었던가보다. 그래도 맨 뒷자리라 도로 들어가 앉았으나 나는 어려웠다. 마음은 천 길 만 길이다. 주가 보호하셔야 한다. 이를 붙들지 않고는 나 하나도 건사할 길이 없다. 이에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나는 나의 약함으로 주를 의뢰한다. 나의 의지나 지식이 아니었다. 우리의 약함이 힘이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1:2).” 왜냐하면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12).” 이에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벧전 1:6).” 내게 두신 한 날의 이런저런 일들이 말씀을 크게 받아들인다. 이처럼 말씀을 더듬거리며 찾아 읊조리다보면 모든 게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다. 그러므로 주께 아뢸 뿐,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서 거두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40:11).” 오늘 우리에게 두시는 이 모든 일과를 주께 올려드리는 삶이되기를. 종종 딸애가 표현하는 그와 같은 기도가 새삼 마음에 와 닿는다.

 

나의 발걸음을 주의 말씀에 굳게 세우시고 어떤 죄악도 나를 주관하지 못하게 하소서(119:13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