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상한 심령이라

전봉석 2019. 9. 28. 07:10

 

 

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고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리라 하셨느니라

왕하 7:1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편 51:17

 

 

말씀을 들어라. 말씀은 이루어진다. 예수님은 말씀의 증거이고, 말씀은 예수님의 증거이다. “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할 때 저의 말은 참으로 기괴하였다. 아람군에 포위당해 서로의 자식을 삶아 먹는 끔찍한 지경에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고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리라 하셨느니라.”라고 하니 그게 믿겨지겠나(왕하 7:1). 그러자 한 장관이 어이없어 말하였다. “그 때에 왕이 그의 손에 의지하는 자 곧 한 장관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하더라 엘리사가 이르되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니라(2).” 그리고 백성들이 나가서텅 빈 아람 사람의 진영을 노략한지라 이에 고운 밀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이 되고 보리 두 스아가 한 세겔이 되었으니, 이는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되었(16).

 

말씀은 이루어지고 이를 믿지 못하는 자의 최후는 비참할 따름이다. 턱을 괴고 말씀을 웅얼거리며 읽다보면 참 희한하고 신기한 것들이 많다. 저런 와중에도 사람들의 욕심은 끝이 없고 누군가의 비아냥거림은 되풀이 되는 것이었으니, 우리의 존재의 한없이 가벼움에 대하여 새삼 놀란다. 이어서 시편을 읽으면 모호하고 답답했던 마음이 쓸려 내려가는 것 같다. 오늘은 가장 부끄러운 죄악의 하나인 밧세바를 범한 뒤 나단의 메시지를 받고 절규하는 다윗의 시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51:1).” 나단이 오기 전까지 저는 이를 인식하지 못했다. 그럴 수 있는 일로 여겼는지도 모른다. 나름 밧세바를 왕비로 맞이하고 왕으로서의 책무를 다했다고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의 죄과는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반역이었다.

 

여인을, 그의 충복을, 무고한 군사들을 그리 함부로 대하여서는 안 되었다.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2).” 비로소 저는 죄를 인식하였다. 그리고 대면하고 앉았다.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3).” 죄란 그 하나님의 뜻에서 어긋나는 일이다. 하여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4).” ‘주께만 범죄 하였다는 것은 사람들에 대한 가책이 없다는 소리가 아니라 저들을 그리 대하고 그 일을 그리 처리한 데 대해, 저들의 주인이시고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께 범죄 하였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는 돌발적인 죄악이 아니었음을 인정한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5).” 날 때부터 죄인인고로 오직 하나님의 용서만이 살 길인 것을 고한다.

 

여느 날과 같이 아이가 일찍 왔고 같이 글을 쓰고 성경을 묵상하였다. 마침 아이 이모가 와서 점심을 샀다. 여러 말이 오갔으며 나는 저의 말에서 주의 선하심을 되새길 수 있었다. 저를 처음 교회로 전도하고 또한 여러 명의 또래들을 교회로 오게 하였던 이는 이제 믿지 않는 길로 가고 있다. 그 또래들 중에서도 오직 자신만 남았다. 저는 이를 희한하게 여겼고, 돌아보니 다들 고만고만할 때 자신은 극심한 가정의 반대에도 기를 쓰고 교회를 다녔던 일을 회상하였다. 그러게,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예수님은 이처럼 우리 인생에서 갈림길에 놓일 것을 말씀하셨다. 누구나 그 인생의 교차로에 다다른다. 교차로는 멈추어 있을 수 없는 곳이다. 이쪽으로 가든지 저쪽으로 가든지 하여야 한다. 이쪽은 좁은 길이요, 저쪽은 넓은 길이다. 이쪽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하고 저쪽은 넓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7:13-14).” 하나는 영생의 길이고 하나는 멸망의 길이다. 넓은 길은 실제 복음을 거역한다. 대표적인 예로 환락과 음란과 도박과 쾌락의 도시들이 즐비하다. 소비가 넘쳐나고 모든 게 풍요롭고 화려하다. 그런데 맞은 편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참으로 협소하고 고달파서 찾는 이가 적다. 그런데 이를 누가는 새로운 진술로 받아적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13:24).” 예수님의 말씀은 무슨 의도일까? 누가 이 좁은 길로 들어가려 하고 그럴 때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내가 선택한 길 같으나 값없이 주어진 믿음으로다. 믿고 싶다고 내가 믿는 게 아니다. 저가 엄마와 언니들의 극성스런 반대에도 기어이 교회에 다니고 믿음을 지키려 했던 시절이 있어서 오늘에 자신이 있는 것 같다는 고백에서 나는 놀라웠다. 다른 아이들은 교회를 가든 말든, 실제 모두를 교회로 전도한 아이는 엄마도 언니도 다들 어디 교회에 다닌다고 하던 아이였다. 그런데 저는 대놓고 이제 교회를 떠났고 나머지는 안 믿는 신랑들을 만나 유야무야 안 다녀도 그만인 삶으로 돌아갔다. 희한한 것은 그 믿음이 내가 원하고 바라서 주어진 게 아니라 저절로 그리 주신 것이다. 어느 훗날 이를 그처럼 원하여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므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이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2:8).” 은혜로 말미암은 믿음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선물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아이가 오후 근무를 가고, 아이 이모도 직장으로 돌아간 뒤 나는 설교원고를 퇴고하고 주보를 만들고 청소기를 돌리며 한 주간을 마무리하였다. 늘 같은 시간의 반복이라 묵묵하기만 하면 된다. 누구나 좁은 문으로 들어갔다고 해서 좁은 길로 가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큰 길을 기웃거리고 저도 모르게 슬그머니 그 길로 돌아가는 경우도 허다하다. 신앙생활이 어렵다고 여겨질 때 그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누군, 어느 교회는 어쩌고 해도 어쩌고 잘만 되는 것 같아서. 뭘 꼭 굳이 이런 걸 다 포기하며 나 혼자 잘난 척 하듯 믿을 게 뭐 있나 싶어져서. 그런 우리 마음을 아시고 예수님은 일갈하셨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16:24).” 자기를 부인한다는 게 고등종교와 하등종교를 나누는 키워드다. 이슬람이나 불교는 맹목적으로 자신을 부인하고 신의 뜻을 따라 산다. 실제 기독교도 자기부인의 종교다. 그런데 누가 말한 것처럼 종교의 타락은 성직자의 수가 증가함으로 비례한다. 실제 티벳 불교의 타락은 전체 남성의 70%가 승려가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로마 교회가 망하기 직전에 대부분은 남성들이 수도원 생활로 기어들어갔다.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의 신학생 수가 전 세계의 목회자 수보다 많다고 들었다. 이는 모두 양면적인 것이다. 무작정 부흥이라고 좋아할 것은 아니다. 저녁께 옥한흠 목사의 설교를 유튜브로 들으며 이와 같은 말씀에 고개를 저었다.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이 우리 안에 기쁨으로 꿈꾸게 하는가? 저는 물었다.

 

하나님이 주실 영광의 날을 바라며 이 길을 가는 데는 히브리서의 증거도 묵상할 때마다 오히려 위로가 된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11:39-40).” 기껏 말씀 붙들고 좁은 문으로 들어와 평생을 좁은 길로 걷기를 힘썼다. 그런데 그 말씀의 증거는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얻지는 못하고 죽었다. 억울하고 한심하고 답답해야 맞는 소린데,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어디서 이와 같은 믿음이 나온 것일까? 나의 결행으로 갈 수 있는 길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는 성경의 가르침은 확실한 증거를 가지는 것이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16:25).” 고로 오늘의 이 여정은 내가 내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쓰임 받기를 다하는 것이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27).” 말씀을 따라가고 설교원고로 작성하고, 누구의 사연을 듣고, 무엇을 위해 함께 기도하고, 다시 말씀을 따르는 이 일이 참으로 귀하고 막중하였다.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51:6).” 저는 회개한 뒤 주의 가르치심을 바란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10).” 그게 아니면 이 길을 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