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하매
대하 16:9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시편 125:1
전적으로 주를 의지하는 것도 은사다. 우리가 드리는 것은 염려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마치 스스로 어찌할 것처럼 구는 것보다 교만은 없는 것 같다. 그저 하나님이 바라시는 한 가지,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오늘 말씀이 무엇을 주목하게 하는지 알겠다.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숫염소를 가져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이 모든 게 주의 것임을…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시 50:9-12).” 주 앞에 우린 다만 의뢰뿐인 것이다. 무얼 내가 드린다고 여기는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참 놀라운 사실은, 내가 아파야지만 주를 찾는다. 비로소 주가 부르신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 2:17).” 마치 나는 괜찮다고 하는 사람은 별 수 없다. 아이도 어른도 대책이 안 선다. 스스로 아무렇지 않다는 데야 ‘의사가 쓸 데 없다.’ 주님은 엄연히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는’ 의사로 오셨다. 내가 얼마나 죄인인가를 알 때 나를 부르신다.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으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처지에 있을 때, 주를 의지하는 일은 필연이 된다. 믿음으로 은혜를 은혜로 여기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4-5).”
어머니가 심장 조영 시술을 하였다. 아버지는 의연하게 계시다 시술 끝내고 나오는 어머니를 보고 와락, 눈물을 쏟으셨다. 가보지도 못하고 마음 졸이다 통화할 때 아버지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상황을 알리셨다. 마음이 짠하고, 감사하였다. 모든 게 다 감사하지 않은 게 없었다. 그저 감사뿐이라 감사를 은사라 하기에도 민망하다. 내가 하는 게 아니다. 내 안에 이는 어떤, 당연함에 대하여 놀랐다. 오후에 오는 아이가 글을 쓰는 데 재미(?)를 느끼고 나는 잘한다 잘한다하며 칭찬을 해주었다. 다 저녁에 누가 전화를 하였고 직장에서 모욕을 당한 일을 털어놓으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같이 화가 나고 속상했으나 나한테까지 전화하게 하신 데는 주님의 생각을 알려주어야 할 것 같아 위로보다는 저를 견책하였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 이를 위해 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신다. 우리에게는 ‘전심’뿐이다.
이런저런 주변의 상황이나 사정들이 일깨우는 바가 크다. 나의 하루는 간단하지 않았다. 나로 하여금 얼마나 주를 전심으로 의지하는가를 살피시는 주의 눈길이었다. 주를 의지하지 않고는 당최 당해낼 재간이 없는 일들뿐이다. 전 장에서 아사 왕은 주를 의지하고 주께 부르짖었다. “아사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여호와여 힘이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밖에 도와 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하건대 사람이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였더니(대하 14:11).” 그런데 오늘 저의 행태는 가관이라. “아사가 왕이 된 지 삼십구 년에 그의 발이 병들어 매우 위독했으나 병이 있을 때에 그가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더라(16:2).” 전심(全心)으로 주를 의지한다는 게 그래서 은사다. 아무나 지속적으로 일관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우리는 의사가 필요한 환자다. 자신이 아프다는 것을 의뢰할 수 있는 게 믿음이었다. 아이에게 주일을 권하였으나 시큰둥하였다. 첫 술에 배부를 리 없으나 필요치 않아하니 별 수 없었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시 9:10).” 누가 김치를 주러 일부러 들렀다가 갔다. 어디 대학교에 시간 강사가 되었고, 이를 감사하며 주의 뜻을 구하는데 여러 말을 보탰다. 늘 보면 하나님이 어려운 친구다. 그 열심을 다하는 것에 비해 강박적으로 하나님을 불편해한다. 그 사랑을 얻기 위해서는 열심을 다해야 하고 성실해야 하고 죽어라 하고 노력해야 하는 사람처럼, 저의 신앙은 늘 팍팍하다. 그러니 저에게 이번 결과도 하나님이 채찍만 더하시다 당근을 주신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왜 저의 하나님은 인색하기만 하실까? 늘 갈급해하면서 주를 의지하는 일이 어려운 이유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4-5).” 나의 하루는 간단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주를 의지하는 것이 가장 쉬웠다. 어머니의 큰 수술 날, 아이들은 여전히 그 시간에 왔고 누구의 사연으로 시간을 넘겨 통화를 해야 했고 이런저런 일은 연속이었으나, 내가 주를 의지하는 것이 가장 쉬웠다. 믿는 자에게는 믿음보다 쉬운 게 또 어디 있겠나? 일한 게 없는 데도 넘치는 감사뿐이어서 나는 오히려 늘 송구할 따름이다. 누구에게 말해주기를 하나님께 말해라, 하나님께 툴툴거려라, 그런 사람들을 상대하지 말고 주만 의지해라, 긴 통화 내용의 요지는 이처럼 간단하였다. 간단하지 않은 하루하루 중에 나의 가장 간단한 일은 주께 의지하는 것이다.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시 56:3).” 아니면 누구를 찾을까? 아이의 눈물 코드가 ‘엄마’라는 말에 나의 눈물 코드는 ‘친구’라고 말해주었다. 그만큼 사람을 따랐다. 선생이 좋았고 친구와의 어울림이 최고였다. 두려운 날에 친구를 찾았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전 5:4-5).” 이런 자는 예전의 나다. 육신의 나다. 말이 친구지 나는 저들과 음행을 행한 것 외에 기억에 남는 게 없다. 그게 위로였고, 그게 뭐 어때? 하는 즐거움이었다. 이와 같은 육신의 소욕에 대하여는 나는 죽었다. 더는 친구를 바라지 않고 찾지 않는다.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믿지 않는다. 나도 나를 믿을 수 없다.
나는 한 아이에게 그리 말하였다. 너를 믿지 않고 너를 대하는 나의 이 마음을 믿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 그럼 내가 어찌 해야 할까? 주를 의지하는 일, 주께만 의지하는 일, “나는 경건하오니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 내 주 하나님이여 주를 의지하는 종을 구원하소서(시 86:2).” 내가 이제 경건한 까닭은 어떤 행위나 수고에 따른 것이 아니라 주를 의지함이다. 그렇지 않고는 아무 것도 바랄 수가 없다. 내가 뭐라고 누구의 말을 듣고 저 아이를 위하며, 이처럼 마음을 쓰겠나? 고로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125:1).” 오늘 아침 말씀이 내게 주시는 확신이 귀하다. 주를 의지함이 시온산과 같이 흔들리지 않고 영원할 것이다. 내 의지가 아니다. 나는 되레 주께 바치는 것이 염려뿐이다. 병적으로 불안에 떤다. 오죽하니 다른 날보다 가슴 벌렁거리는 데 따른 약을 연거푸 먹어야 했을까? 그러한 날, 나의 하루는 간단하지 않았으나 간단하였다.
우리가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할 것들,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전 5:10).” 딸아이의 서른 살이 되는 것을 축하하면서 우리가 둘러앉아 읽은 말씀이 심오하였다.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우리는 결코 세상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이 아닌 것이다. 무엇으로부터의 벗어남인가? 첫째는 음행이요, 둘째는 탐욕이며, 셋째는 속임이고, 넷째는 우상숭배다. 이런 자들과 ‘도무지 사귀지 말라.’ 성경의 일관된 경고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육을 입고 이 땅에 살면서 어찌 저들과 사귀지 않을 수 있겠나? 그 길은 오직 하나, 주를 의지하는 것이다. 아니면 그 결과는 늘 똑같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롬 1:29-31).”
그러므로 나는 나의 병적인 불안과 염려를 제물처럼 주께 바치며,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주의 돌보심만을 의지할 따름이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
악인의 규가 의인들의 땅에서는
그 권세를 누리지 못하리니
이는 의인들로 하여금
죄악에 손을 대지 아니하게 함이로다
여호와여 선한 자들과
마음이 정직한 자들에게 선대하소서
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들은
여호와께서 죄를 범하는 자들과 함께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스라엘에게는 평강이 있을지어다
-시 125편 전문,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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