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전봉석 2019. 12. 1. 06:54

 

 

그가 전심으로 여호와의 길을 걸어 산당들과 아세라 목상들도 유다에서 제거하였더라

대하 17:6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시편 126:5

 

 

아침 일찍 토요일에 성경공부를 오는 친구가 왔다. 직장에서 생긴 불쾌하고 모욕적인 사건 때문에 마음이 상해 있었다. 이런저런 사실 때문에 나 역시 마음이 어려웠다. 불쌍하고 안 됐고 속상했다. 그러니 우리가 누구에게 부르짖을까? 사람들을 상대로 이길 수는 없다. 우리의 현재 자랑은 하나이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6:14).” 죽자, 죽어야 산다. 내가 죽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16:24).” 신세한탄과 자기혐오와 자기연민은 모두 교만의 다른 얼굴이다.

 

제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주제라, 사는 게 때론 벅차고 어려울 따름이지만, 그러므로 주를 바라자. “주를 바라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까닭 없이 속이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리이다(25:3).” 나는 저와 함께 설교 원고를 사이에 두고, 우리 안의 화는 자기연민과 칭얼거리는 마음의 변이라고 설명해주었다. 누군들 화 없이 살 수 있을까? 그런데 예수님은 더욱 엄히 경고하셨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5:22).” 나는 저에게 용서를 말해주고 또 참아야 하는 일을 말해주다, 다만 우리는 그럴 수 없어서 속상하였다. 왜 또 일방적으로 참고 견뎌야 하는 것인지! 저는 직장을 옮겨야겠다고 하였고 나는 그 또한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옮겨도 주를 위하여, 견뎌도 주를 위하여.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14:8).” 과연 우리가 그럴 수 있을까? 할 수도 없는 일을 저에게 가르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예수 이름뒤에 숨는다.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25:21).” 일일이 저의 사연을 열거할 수는 없다. 딸애 생일 때문이기도 하고, 저가 아홉 시에 일찍 왔다 돌아갔다. 아내와 딸애가 나와서 조금 먼 길을 걸어서, 생일 식사를 짬뽕으로 먹었다. 나는 조금씩 덜어 먹었을 뿐인데 속이 좋지 않아서 먼저 서둘러 돌아왔다. 약을 먹고 진정을 시키면서도, 괜히 자꾸 속상하고 안 됐고 화가 나고 불쌍했다. 이렇듯 내가 감정에 휘둘려서야 어찌 누구를 만나고 저에게 주님의 뜻을 전할 수 있을까? 그냥 자꾸 저가 불쌍해서 속상했다. 서로 한 몸을 이룬다는 게 이럴까?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2:16).” 이는 결국 우리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다.

 

전에 같으면 서럽고 억울하고 불안하여 같이 대들었을 텐데, , 이제는 안 그래요. 오히려 저가 불쌍하게 여겨져요. 내가 조용히 떠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성경공부를 마치고 저가 하는 말이 옳았으나 속상했다. 보란 듯이 보복하고 응징해서 다시는 사람을 무시하지 못하도록 혼쭐을 내주고 싶은데, “주 만군의 여호와여 주를 바라는 자들이 나를 인하여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를 찾는 자가 나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69:6).” 주께 아뢸 따름이다. 억울함도 분함도 주 앞에 내려놓을 뿐이다. 저는 이에 따른 질문을 하였다. 저는 사실 내려놓는다, 맡긴다, 하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실제 그러는 게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나요? 그와 같은 질문을 종종 듣거나 스스로에게도 반문하는 일이다. 내려놓는다는데 그게 뭘까? 주께 맡긴다는 것인데 그런 게 대체 어떻게 하는 것일까?

 

주어진 상황이 어떠하든 우리는 주님만 바라며 묵묵히 의연하여지는 것. 맡긴다고 하고 그래서 아무 것도 안 하는 게 아니라, 그 문제에 함몰되지 않고 무던히 해야 할 일을 다 하는 것. 슬픔이면 슬퍼하면서도 기도하며 주의 길을 걷는 길. 기쁜 일이면 주께 찬송하면서 역시 꾸준하게 주의 길을 가는 일. 그 길이란 주가 내게 맡기신 인생이고 직분이고 사역이고 역사이고 소소하기 이를 데 없는 일상이다. 성령 받았다고 해서 주부가 가정을 등한히 하고 뭔가를 추구하느라 정신이 팔리고, 직장인이 직장을 뿌리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저마다 마음에 생겨나는 열심만으로 선교사가 되고 목사가 되려 하는 아주 특별한 일에 대하여는 경계하였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스스로의 생각으로, 감정으로 또는 느낌으로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 모두는 화평의 짐을 지는 일이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1:20).” 그와 더불어 화해해라. 미워하지도 말고 미워하게 하지도 마라. 할 수 있거든 네가 먼저 사과해라. 그럼에도 덤비면 가만히 피하자. 억울하고 분한 일에 대하여는 도리어 저를 위해 기도하다.

 

나는 그리 전하면서도 그게 가능하겠나? 하는 의문이 들어 속을 끓였다. 영락없이 점심으로 먹은 게 얹혀서 저녁을 굶고 속이 볶였다. 우리가 이길 수 있는 길은 실력을 쌓아 보란 듯이 성공하는 것도 아니고, 저를 짓밟아 주는 일도 아니고, 옳고 그름을 따져 억울함을 푸는 일도 아니다. 어쩌면 나는 저에게 전하여준 이와 같은 말씀으로 내가 속이 얹힌 것인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심장 시술이 잘 되어 퇴원하셨고 딸아이는 오늘부터 친구가 사역하는 서울 어디 교회로 나가기로 하였다. 이와 같은 에 몸을 맡기는 것. 주의 일은 마치 물이 흐르는 것과 같고 바람이 임으로 부는 일과 같다. 어떤 날은 잔잔하다가도 어떤 날은 거칠고 드센 물살에 시달려야 하고, 어떤 날은 고요하였다가 어떤 날은 거친 비바람과 함께 폭우가 쏟아지는 일이었으니맡긴다는 것은 아무 것도 안 하는 게 아니다. 또는 그것을 빙자하여 뭐라도 해야 한다는 게 아니다. 다만 우리에게 두시는 일상이다. 이 모두는 주의 가장 선하심이다.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보기 시작하는 것. 우린 다만 성령을 구하는 일. 이에 정직한 사람이 되려고 하면 절망만 하게 될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 지혜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감사할까? 싶을 때의 감사가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를 맛볼 수 있는 기회다. 이 모든 게 우연이 아니고, 어쩌다 그리 된 것도 아니고, 살다 보니 그런 것도 아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8:30).” 모든 문제는 하나님의 주도하심 아래 있다. 그러므로 거룩은 우리의 발로 오염되지 않은 길을 걷는 것이고, 혀로 더러운 말을 하지 않는 것이며, 이성으로 더러운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고, 남의 동조를 구하는 일이 아니다. 거룩의 실질적인 체험은 알게 모르게 영향력을 나타내는 것으로 주님의 영광이 된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11:45).” 당최 우리의 수고와 노력으로는 할 수 없는 게 거룩이다. 그리하게 하시는 이의 은사로만이 하는 일이다.

 

그렇듯 감사하게도, 우리는 주님의 즐거움을 지금 현실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역설적으로,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126:6).” 이는 우리가 분냄과 화냄과 억울함과 분함과 원통함의 포로에서 풀려날 때이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1).” 정작 현실은 그렇지 못한데 주를 바라고 의지하는 일이란,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2).” 나는 저의 억울한 심정과 딱하고 한심하기까지 한 처지를 두고 속상해하다 그것으로 주를 바라고 의지할 수 있기를 기도하였다. 내 속에 볶여 낮에 몇 젓가락 먹은 음식을 소화시키지 못하고 내내 볶였던 것처럼 나는 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나. 우리는 다만 주의 신실하심을 의지할 따름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우리 안에 거하시는 주님으로 산다. 그래서 우리는 저가 거듭나는 자리에 이를 때까지 기도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항상 한 가지 간단한 요점으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11:28).” 주님께 전폭적으로 의지하는 일밖에 다른 일을 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하는 오늘 말씀으로 새삼 또한 기운을 차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12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