옳은 말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고, 너희의 책망은 무엇을 책망함이냐
욥기 6:25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시편 34:18
어떤 일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일어난다. 괜찮다고 여기고 있을 때 벌어진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데 있어 우리는 아무런 기여도 할 수 없다. 발생하고 난 후에야 놀라거나 슬퍼하거나 환호하거나 괴로워한다. 우리의 생각은 통째로 잘못된 것이다. 무엇을 한두 개 개선하여서 쓸모 있게 재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완전히 다른 것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 3:6-7).” 오늘 성경은 욥의 절규를 듣게 한다. “옳은 말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고, 너희의 책망은 무엇을 책망함이냐(욥 6:25).” 더러 우리의 권면이 괴로움이 될 수 있다. ‘너를 위하여’ 해주는 말이 고통을 가중시킬 수 있다. 이에 미친 척하고 살아난 다윗이 고백한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 34:18).”
우리의 도움은 주께 있다. 주께만 있다. 나는 보완하여 고쳐 쓸 수 있는 수준의 사람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의 권능 앞에서 입을 다물자. 묵묵히 주만 바라자. 나는 늘 평소와 다름없이 일어났고 그 자리를 지킨다. 내게 맡기신 일이다. 토요일에 오는 친구에게 했던 말이기도 하다. 자꾸 교회에서 저들과 식사하기를 꺼려하는 것은 누군가 식판을 가져다줘야 하고 누군가의 손길과 배려가 있어야 하는데, 그게 늘 미안해서 도망치듯 자리를 뜨곤 하였다고 해서 말이다. 어떤 경우 우리를 두시는 자리는 불쌍히 여김을 받는 일이다. 자존심도 상하고 민망하기도 하고 오히려 더 불쌍하게 여겨진다 해도, ‘나사로라 이름 하는 한 거지’의 사명은 묵묵히 그 맡은 바 소임을 다한 것이다. 버려지면 버려진 자리에서, 헌데를 앓는 일도, 부자의 무시와 천대를 감수하는 것에서도 저는 한 마디도 되뇌지 않았다. 억울함을 호소하지 않았고 뭐라도 하려고 애를 쓰지 않았다. 누군가로 하여금 도울 수 있는 자리를 맡는 일!
왜 나에게 이런 일이! 하고 절규하는 것이야 사람으로 사는 날 동안 피할 수 없는 숙명과 같은 일이겠으나 그 또한 받아들임으로 주시는 이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나는 이 아침 욥의 절규와 다윗의 절규를 들으며 그리 묵상하였다. 성경은 온통 하나님의 개입을 나열하고 있다. 졸지에 떠돌이가 된 아브라함이나, 기껏 밤새 기도하다 절름발이가 된 야곱이나, 노예로 팔려간 요셉이나, 살인자가 되어 광야로 쫓겨 가서 숨어사는 모세나… 난데없이 임산부가 된 처녀 마리아나! 돌연 우리 인생을 엉뚱한 곳에 던져버리시는 것 같은데, 그럼에도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 충성이다. 그리하여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잠 25:13).”
나는 평소처럼 교회로 나갔고, 할 일이 없어하는 아이를 불러 일기를 쓰고 잠언을 필사하게 하였다. 나의 긴 설 연휴는 일상과 다름이 없었고 그러므로 평안하였다. 누구의 아픔으로 덩달아 아팠고 누가 힘들어하는 일에 대하여 같이 힘들어하였다. 한데 이는 내가 그리 하려고 해서 하는 게 아니어서 내가 애썼다고 하는 소리가 아니다. 맡기신 자리를 지킨다는 일을 나는 이제 그리 이해한다. 서러우면 서러운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고통스러우면 고통스러운 대로… 오늘 시인의 주장은 그런 게 아닐까?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시 34:19).” 어째서 의인이 고난이 많은가? 의인이면 아예 고난이 없게 하셔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그런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알게 된다. 주님도 고난을 통해 복종을 배우셨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눅 24:26).” 나는 아이의 묵상 글을 읽고 같이 기도하고 있음을 알렸다.
그저 다만 곁을 같이 하는 것. 그 집 문에 있는 것. 떨어진 부스러기를 주워 먹는 일. 개가 와서 헌데를 핥게 두는 일 … 이 모든 일 배후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18-20).” 예수로 말미암아 화평한다는 것, 그 피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일. 그렇듯 사람은 개선될 수 있는 게 아니라 전혀 새로운, 거듭나야만 하는 존재이었다. 사람은 다 틀렸다. 우리가 어찌 해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성경은 일갈하였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3).”
내가 저 친구에게, 교회에서 너를 통해 누군가가 돕고자 하는 마음이 들고 식판이라도 가져다주고, 네 자리를 치워주게 하는 그 일까지도 너의 맡은 자리이다! 곧 내가 아프고 힘든 게 자식에게 또는 가족들에게 짐이 될 것 같은데 그 짐이 곧 내가 마다하지 말아야 하는 일이기도하다. 기를 쓰고 나는 억지웃음으로 살았다. 누구와 어울리든 어디에 있든 혼자 긴 한숨을 쉴지언정 저들과 다를 게 없이 당당하려 하였다. 같이 어울리려 기를 쓰고 애썼다. 누가 나를 조금만 무시하듯 하거나 도우려고 하면 자존심이 먼저 상해서 으르렁거렸다. 예민하게 구는 만큼 강해지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 모든 게 위선이었다. ‘어찌해서 저 불붙은 가시나무는 타지 않는 것일까?’ 모세 안에 드는 의구심이 그 앞에 엎드러지게 한 것이다.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 때에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출 3:3-4).” 부르심은 주께 있고 응답은 우리에게 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오늘의 답답함이 서러움이 낯설고 고통스러움이 우리를 부른다. 내가 할 수 있다고 여기던 아집의 구덩이에서, 스스로 주도적인 삶을 살려고 했던 교만의 능선에서, 또는 그저 다른 사람처럼 살려고 드는 안이라고 무력한 게으름의 이불자락을 걷어치우면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으냐?, 가인아 네가 무얼 하려 하느냐? 아브라함아, 하갈아, 야곱아, 이스라엘아, 여수룬아… 언제나 주님이 먼저 찾아오시는 것이다. 그의 부름은 우리를 통째로 뒤집어엎으신다. 그렇듯 주의 권능은 우리의 동의를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하나님이 임의로 하신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딤전 3:16).”
그야말로 내 코가 석 자면서 내가 뭐라고 누굴 두고 기도한단 말인가? 마음이 어려워 같이 어려워한다. 이 마음이 어찌 내 것이겠나? 그러다 모두 외면하고 내동댕이쳐지는 상황이 온다해도, “너희가 남의 말을 꾸짖을 생각을 하나 실망한 자의 말은 바람에 날아가느니라(욥 6:26).” 그럴 거 없다. “나의 간구를 누가 들어 줄 것이며 나의 소원을 하나님이 허락하시랴(8).” 돌아보면 가까운 자가 더 멀리 날아갔고 더 세게 나를 때렸다. “낙심한 자가 비록 전능자를 경외하기를 저버릴지라도 그의 친구로부터 동정을 받느니라(14).” 그런데 “형제들은 개울과 같이 변덕스럽고 그들은 개울의 물살 같이 지나가누나(15).” 그런 것이다. 결국은 자신을 믿을 수 없듯이 사람을 의지할 수 없다. 아, “이제 너희는 아무것도 아니로구나 너희가 두려운 일을 본즉 겁내는구나(21).” 그러니 “옳은 말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고, 너희의 책망은 무엇을 책망함이냐(25).”
잠자코 곁을 지키는 이가 더 힘들 때도 있다. 이를 못 견뎌서 열에 아홉은 ‘너를 위하여’ 참견을 하고 뭐라 거들며 저주를 한다. “너희가 남의 말을 꾸짖을 생각을 하나 실망한 자의 말은 바람에 날아가느니라(26).” 고통은 어떤 무엇으로도 위로가 될 수 없다. 살기 위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척 하다 쫓겨난 다윗의 고백이 그리하여 참으로 눈물겹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시 34:1).” 그야말로 미친 게 아니라면 하나님이 어찌 나를 이 지경까지 몰아세우셨을까? 하고 원망이 앞서야 하는데,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2).” 그리고는 덧붙여 내게 손을 내민다.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3).” 아,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8).” 그리하여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9).”
이로써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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