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경외함이 네 자랑이 아니냐 네 소망이 네 온전한 길이 아니냐
욥기 4:6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32:1
말로 말을 다스릴 수 없다. 생각으로 생각을 이룰 수 없는 것과 같다. 괜찮다고 했던 게 돌아서기 무섭게 고역이라. 데만 사람 엘리바스의 말은 예리하여 찌른다. 저의 말은 틀리 않아서 아프다. “네 경외함이 네 자랑이 아니냐 네 소망이 네 온전한 길이 아니냐(욥 4:6).” 말할 때 우리는 금세 할 말을 잃는다. 토요일에 성경공부를 오는 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보니 나의 말이 그러하지는 않았을까? 우리는 얼마나 자주 스스로도 할 수 없는 것을 두고 장담을 하곤 하는지. 그것으로 면박을 주고 훈계를 할 때가 얼마나 또 많았는지…. “보라 전에 네가 여러 사람을 훈계하였고 손이 늘어진 자를 강하게 하였고 넘어지는 자를 말로 붙들어 주었고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하였거늘, 이제 이 일이 네게 이르매 네가 힘들어 하고 이 일이 네게 닥치매 네가 놀라는구나(3-5).” 저의 말이 아프나 왜 저의 말까지 성경의 지혜서로 묶는지 알 것도 같다.
이런저런 말이나 감정으로는 누구보다 나 자신을 당해낼 수 없다. 길이 막힐 줄 알고 아침 일찍 서둘러 와서 저와는 꼬박 다섯 시간을 같이 성경공부를 한 것 같다. 같이 왔으면 했던 누구와 누구에 대해서는 간단하게 듣고 묻지는 않았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에 대하여 나서서 말하거나 연락하기는 어려워서 말이다. 그런 거 보니 언제부턴가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 나의 경계선이 된다. 그냥 두어도 되는 사이면 그냥 두는 것으로 말이다. 때로는 이것이 내 자신을 모면하고 회피하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하지만, 감당할 수 없는 일에 대하여는 그러므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다만 내게 더하시는 은총이 크고 귀할 따름이다. 오늘 시편의 말씀이 그리 들린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
저보다 내가 나은 게 있어 무엇을 더 잘해서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말씀으로 같이 하는 시간은 내가 하는 말이 고스란히 내게 하시는 말이 되어 들렸다. 그러므로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11).”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의 사랑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뻐하라는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 뒤에 붙는 은혜와 은총과 사랑은 바라면서 정작 하나님은 외면하는 삶은 아니었을까?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살전 4:11).” 조용히, 묵묵히, 무던하게, 주어진 일에 하는 데 있어, 첫째는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는 것이다. 이는 곧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하는 말씀으로 이어진다. 그러할 때 둘째,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그 뜻을 합하는 일이다(갈 6:4-6). 먼저는 가르침을 받는 것이 가르치는 자와 함께 하는 것으로 다음은 셋째,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2).” 곧 우리가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그렇게 서로의 짐을 지는 일로써 이는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일이 된다.
이처럼 말씀을 따라 산다는 것은 결코 추상이 아니고 막연한 관념도 아니다. 나는 저에게 단 한 줄, 단 5분이라도 좋으니까 말씀 앞에 가만히 앉는 묵상 연습을 하자고 일렀다. 이는 일부러 시간을 내는 일이기도 하다. 운전하면서, 일 하면서, 누굴 만나면서 겸사겸사 하는 일이 아닌 것이다. 그 말은 왜 누구에게 연락하지 않았니? 하고 물었을 때, 저의 대답은 늘 누구는 약속을 하고 가면 누가 같이 있거나 또는 다른 일을 하는 중이라 마음이 썩 좋지 않다는 말에서 비롯되었다. 그런 사람이 있다. 하는 김에 뭘 같이 하고, 지나는 길에 들르고, 것도 겸사겸사 무엇을 같이 하거나 누가 같이 있을 때의 서운함과 난감함을 말하는 것이었다. 아뿔싸! 우리는 얼마나 빈번하게 하나님을 기뻐하기보다 하나님의 무엇 또는 겸하여 어떤 것을 동시에 같이 기뻐하고 좋아하였던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운전을 하면서 말씀을 듣는다. 찬양을 들으면서 기도를 한다. 따로 시간을 내어 온전히 말씀만 읽고 묵상할 시간이 없다. 그래서 성경공부하면서 듣는 말씀과 예배 시간에 설교로 듣는 말씀으로 족하다. 하는 저의 변명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곤 하는 말이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요!’ 하면서 자신의 바쁜 일상을 훈장처럼 가슴에 달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좋아하는가, 사랑하는가? 그 말이 그 말 같지만 좋아한다는 것은 취향의 문제이고 사랑한다는 것은 필연의 문제이다. 사랑은 엄밀하게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내가 아내를 좋아하지만 친절한 옆집 여자도 좋아한다고 할 때, 그 좋아함은 결이 다른 것으로 결코 같은 게 될 수 없다. 내가 모두를 좋아할 수 있으나 사랑하는 일이란 다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의 사랑을 사랑하는 일은 엄연히 다르다. ‘좋아한다’와 ‘사랑한다’의 의미를 분명히 하지 않을 때, 그래서 쉬운 성경도 찾고, 멜랑꼴리한 멜로디의 찬양으로 감정을 돋운다. 찬양을 들으며 눈물을 흘린다고 할 때 그 감정을 자신은 신뢰하는가? 뜨겁게 기도하면서 그 뇌까린 말들을 자신은 자신하는가?
오늘 엘리바스의 말이 그런 우리의 본질적인 문제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욥 4:7).” 한술 더 떠서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다 하나님의 입 기운에 멸망하고 그의 콧김에 사라지느니라(8-9).” 이를 남에게는 서슴지 않고 적용하고 자신에게는 관대한 것은 실은 사실이 아니었나? “사람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깨끗하겠느냐(17).” 그의 말은 틀리지 않고 틀리지 않아서 찌르는 깊이가 더 아프다. 이를 단지 저의 선입견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내가 늘 엘리바스는 아니었나? 되새지게 된다. 말로 훈계하고 장담하고 스스로는 자신하였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은 그의 종이라도 그대로 믿지 아니하시며 그의 천사라도 미련하다 하시나니 하물며 흙 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 앞에서라도 무너질 자이겠느냐(18-19).” 우리의 맹랑함은 종종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로 보지 못하게 한다. 자신만의 하나님을 만족하는 데서 오는 지독한 오해도 있다. 아, 우리의 이 호언장담을 부질없어서 “아침과 저녁 사이에 부스러져 가루가 되며 영원히 사라지되 기억하는 자가 없으리라(20).”
종종 나는 누구와 성경공부를 할 때 또는 이처럼 묵상 글을 쓰면서 되뇌고 확신하고 장담하는 일이 두렵다. 번번이 묵상 때 가지는 마음가짐이 한나절도 되기 전에 사그라질 때가 많다. 돌아서다 마른 혈기로 흩어질 때도 있다. 나는 저에게 말해주다 나의 훈계가 나를 가르치고 나의 권고가 나를 부끄럽게 하곤 한다. 그래서 종종 염치 없게도 ‘날 위해 기도해줘!’ 하고 부탁하는 것이다. 아, 그러니 오늘 시인의 첫 마디가 은혜로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 내가 감히 뭐라고 누구에게 성경을 운운하고 말씀을 가르쳐 권면할 수 있겠나? 나야말로 벽창호에 철면피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를 능가하며 말로써 말로 사람을 찌르며 살았던가? 그래서 나는 기도한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사 50:4).” 늘 나의 기도다.
하나님이 그리하여 주지 않으시면, 열에 아홉은 버려질 말들이고 나머지 하나도 스스로는 주체할 수 없다. 그럼에도 말을 해야 하는 시간이라, 나는 자주 송구하고 미안하고 염치없다. 저에게 해주었던 말이 고스란히 나를 훈계하시고 권면하시면 은총이 아니고는 감당이 안 된다. ‘허물에 사함을 받고 죄가 가려진 자’의 숙명이다. 송구하고 늘 부끄러울 따름이다. 저가 설날 아침 무거운 몸을 이끌고 서둘러 오는 까닭은 나의 말을 듣기 위함이겠나? 내게 정을 두었기 때문이겠나? 오직 말씀뿐이라. 그러므로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11).” 여호와‘를’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다른 목적이 있는 게 아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2).” 부디 전하는 말씀 앞에 내가 먼저 고꾸라져 주를 바라기를. 주만 바라기를. 그러니 그렇지 못한 자신으로 부끄러워하다 그마저 입을 열지 않으려 하면,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3).”
다른 길이 없다.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셀라)(7).” 그러므로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8).” 오직 성경으로, 말씀으로 나는 주를 사랑한다. 사랑함으로 저를 마주하고 누구를 대하고 어떤 이의 아픔도 슬픔도 위로한다. 오직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10).” 그리하여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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