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

전봉석 2020. 2. 2. 06:50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

욥기 11:7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시편 39:6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사람이 어찌 알까.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11:7).” 나아만 사람 소발의 말이 틀리지 않다. “하나님은 말씀을 내시며 너를 향하여 입을 여시고 지혜의 오묘함으로 네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의 지식이 광대하심이라 하나님께서 너로 하여금 너의 죄를 잊게 하여 주셨음을 알라(5-6).” 이를 그대로 오늘 다윗의 기도로 들으면,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39:6).” 우리 사람의 사는 모습이 얼마나 허망하고 헛될 뿐인가! 그러므로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7).” 삶은 결코 해석하기 나름이 아니다. 분명한 목적과 이유가 있다.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다. 그렇다면 그 자체로 존중해야 한다. 이처럼 의미를 두는 까닭은 내재된 사실이 있고 부여되는 의미가 있어서이다.

 

온통 난리다. 신종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공포는 확산되고 불안은 증가한다. 건강에 대한 염려가 하루도 떠나지를 않는다. 그럴 때 그 의미개인의 행복보다 중요하게 여길 때 참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사는 데 있어 이 모든 것을 잘 견뎌내려면 자아보다 더 큰 무엇에 헌신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욕심에 휘둘리고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며 돌아가는 정세에 일희일비하게 된다. 이는 안 믿는 철학자들도 하는 소리고, 오늘 나아만 사람 소발의 헛소리 같은 말들 속에서도 나타나는 진실이다. 아이에게 말하길 하나님의 선하심만 붙들고 가자, 말씀 의지하고 이겨내자, 그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어서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7:14).” 결국 이 모든 게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리 말해주었다. 이는 마치 날씨와 같아서 폭풍우가 몰아칠 때가 있고 고요할 때가 있는 것이다.

 

그때마다 갈피를 잡지 못한다면 앞으로의 일이 더 큰 문제다. 우리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이 축을 이룬다. 말씀 붙들고 기도하며 이겨내자. 분명한 건 의지다. 어떠하든 나는 주를 의뢰하고 신뢰한다는 강한 의지가 필요하다. 그리 말해주며 여러 번 울컥하였다. 내가 좀 더 강하고 담대하고 뭔가 확신을 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더라면. 무엇에도 개의치 않도록 꽉 붙들어 줄 수 있었더라면. 여러 마음이 나를 옥죄는 것이어서, 그럼에도 담대히 마음먹고 와라! 하고 자신 있게 말해주었어야 하는지. 특히 아이의 증상이 집과 멀어지면 불안을 느끼고 십여 분 떨어진 병원이나 도서관을 나가는 일에도 공황에 휩싸이는 것이었으니. 우리 안의 죄 된 모습이 우리를 죄의식에 몰아넣기도 한다. 당장 오늘에 나타나는 증상으로 희비가 엇갈릴 문제가 아니다. 보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무엇인가를 파악해야 하는데, 이를 주께 아뢰고 내려놓아야 하는데.

 

이런저런 말을 길게 할 수 없었다. 어떤 말이 때로는 더 큰 억압이 될 수 있어 그 무게를 가늠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를 죄로 이끄는 줄이 그저 한 가닥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5:18).” 한두 줄이면 맨손으로 끊고 말 수 있겠으나 하다보다 오래된 습관도 중독과 같아서 스스로는 끊을 수조차 없는 일이었으니, 수레를 끌 정도로 튼튼한 것이다. 다른 대안이 없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4:8).” 회개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12:3).” 그 순서를 아이에게 일러주고 싶었다. 당장은 꼼짝도 못할 것 같지만 이는 단지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할 수 있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먼저는 하나님과 자신의 문제다. 가로놓인 죄의 문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3-24).”

 

누구는 꺼려하고 누구는 미련하게 여기는, 우리의 부르심에 대하여 나는 그리 단언할 수 있었다. 가령 나의 불안은 신대원을 다닐 때 최고조였다. 주 앞에 엎드려 주께 순종한다고 할 때가 더 극에 달했다. 이해할 수 없는 모순이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래서 이제 좀 나아질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심해져 엎친 데 덮친 격이니, 계속 내 안에서는 그래도 할래?’, ‘그래도 계속 이 길을 갈래?’ 하고 되묻는 것 같았다. 다른 방도가 없었다. 아니면 죽는 길밖에 없었다.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의지가 내 것이 아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최고치를 찍은 것은 다 마치고 목사 안수를 받을 때였다. 모두를 환희와 기쁨으로 축하하는 복된 자리에서 나는 안정제를 연거푸 먹어 정신이 다 몽롱한 상태였다. 여기서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포기할 수 없었다. 물러설 곳이 없었다. 그렇게 우리의 부르심은 기이하고 오묘하다. 나는 이를 아이의 경우와도 다르지 않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우리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하나님의 백성과 같은 신세로 사는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 겪는 일이란 모두가 공통된 것이다.

 

어떤 불안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염려가 우리로 더욱 강하고 담대하게 한다. 하나님만을 의뢰하게 한다. 하나님은 죽기까지 우리를 붙드신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12:32-33).” 그러므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17).” 나는 아이에게 이 모든 게 영적인 전쟁이라고 운을 뗐다. 더 깊은 말을 나눌 수는 없었다. 안 믿는 가정에서 사랑하는 부모와 형제를 의존하고자 하는 자기와 하나님을 의뢰하고자 하는 자기의 싸움을 치열하다. 그저 그러려니 하고 있을 땐 대수롭지 않은 일이겠으나 하나님을 더욱 바라고 의지할 때면 한쪽의 서러움과 두려움은 가중되는 것이다. 이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16:33).”

 

다 싸워 이겨놓으신 싸움을 우리가 두려워하고 하도 불안해하는 꼴이었으니, 산다는 게 참으로 허망할 때가 있다. 그러니 우리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소발의 질타는 일리가 있다. “말이 많으니 어찌 대답이 없으랴 말이 많은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함을 얻겠느냐 네 자랑하는 말이 어떻게 사람으로 잠잠하게 하겠으며 네가 비웃으면 어찌 너를 부끄럽게 할 사람이 없겠느냐(11:2-3).”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7).”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안다고 한들,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무엇을 하겠으며 스올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그의 크심은 땅보다 길고 바다보다 넓으니라(8-9).” 이를 호세아의 증거로 다시 들으면,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11:4).” 주께서 우리의 목을 감고 있는 죄의 사슬을 끄르셨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자유함이 없다. 평안을 누리지 못한다. 두려움에 사로잡히고는 한다. 병적으로 불안이 쥐고 흔든다.

 

그러니 하나님 없이도 잘만 사는 사람들의 삶 같으나 저들의 면면을 가만히 보면 온통 허접한 의지뿐이다. 돈을 믿고 사람을 붙들고 가족을 의지하며 이를 극복의 수단으로 삼고자 하는 것이었으니, 삶의 낙으로 삼는 즐거움이라는 게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피리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보지 아니하는도다(5:12).” 오늘 우리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니겠나? 그저 빌라도와 같이 회피할 따름이다.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27:24).” 그러니 참 사는 일이 얄팍하기만 하다. 그러므로 오늘 시편에서 다윗은 말한다.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하지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재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39:1).” 함부로 말하지 않겠다. 뭐라 판단하지 않고 뭐 때문이라고 속단하지 않겠다. 내가 할 일이 아니다. 주의 영이 함께 하시기를, 아이의 마음을 주도하시기를. 온통 난리와 난리인 세상에서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4).” 이는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셀라)(5).”

 

아등바등 다들 기를 쓰고 사는 일에서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