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내게 이 두 가지 일을 행하지 마옵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얼굴을 피하여 숨지 아니하오리니 곧 주의 손을 내게 대지 마시오며 주의 위엄으로 나를 두렵게 하지 마실 것이니이다
욥기 13:20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나를 고치소서 하였나이다
시편 41:4
흔히 낙심은 노력한 것에 비해 결과가 미치지 못해 오는 마음이다. 그 가운데 가장 헤어날 길 없는 낙심은, “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약하게 하시며 전능자가 나를 두렵게 하셨나니 이는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어둠 때문이나 흑암이 내 얼굴을 가렸기 때문이 아니로다(욥 23:16-17).” 하나님이 나를 두렵게 하시는 것. “이제 너희는 아무것도 아니로구나 너희가 두려운 일을 본즉 겁내는구나(6:21).” 그렇게 다들 괜찮은 척하다가 본질적으로 가지고 사는 두려움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라. 그러할 때 우리는 겸손히 기도한다. “오직 내게 이 두 가지 일을 행하지 마옵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얼굴을 피하여 숨지 아니하오리니 곧 주의 손을 내게 대지 마시오며 주의 위엄으로 나를 두렵게 하지 마실 것이니이다(욥 13:20).”
이어서 시인은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나를 고치소서 하였나이다(시 41:4).” 곧 우리 두려움의 근원이 죄로부터인 것을, 이는 고쳐야 하는 일이 아니라 인정해야 하는 것으로 끝이 아니다. 죄가 깊어질 때,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내가 왜 이러지? 싶지만,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성경은 우리가 할 일을 엄연하게 알게 하신다. 그러므로 비로소 주를 기억해내는 일!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시 42:5-6).” 내가 느끼는 낙심에 대하여는 사람을 보면 영락없다. 사람으로 사는 날 동안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살 수는 없는 일이겠으나, ‘주를 기억하나이다.’ 하는 시편의 고백이 전부이다.
한 아이는 감기증세로 오지 않았고 한 아이는 하루를 미뤘다. 이제는 그러려니 하는 수밖에, 변하지 않는 것들로 마음을 쓰다가는 지레 내가 지쳐 못 간다. 이는 도덕적인 타락의 시대라. 내 맘 같지 않은 것이 어쩌면 당연하겠다. 요즘은 악과 선이 혼용되어 정작 어느 게 어느 건지 알 길이 없으니,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사 5:20).” 그저 다만 괜찮다, 잘 될 거다, 네 탓이 아니다, 너만 그러는 거 아니다, 하는 위로가 죄를 키운다. 심지어 이제는 병으로 돌려 자신들이 어쩔 수 없는 의식의 핑계를 댄다. 하지만 죄란 몇 겹의 수레 줄 같은 것,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18).” 어쩌다 그런 게 아니라 거듭, 일부러, 의식적으로 찾는 일이다.
현대 사회가 그런 게 아니다. 노아의 때도 그랬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눅 17:27).”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30).” 아무도 오지 않고 아무 데도 가지 않고 들어앉아 있던 하루는 평온하였다. 혼자 있는 시간이 익숙해지면서 문득 주를 바라고 가만히 누구를 생각하며 아뢰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다. 그럼에도 속은 불편하고 불안은 난데없이 일어나고는 하지만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9).” 우리 안의 죄의 근본은 여전하여서 모두 사하여졌으나 습성은 여전한 것이다. 나는 솔직히 오후에 오는 아이의 말을 어디까지 진실인지 믿지 않는다. 되묻지도 않고 그것이 거짓인가 의심하지도 않는다.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은 그리 두시는 이의 성품을 의뢰하기 때문이다.
주를 바란다는 것은 막연한 평안이 아니라 엄청난 싸움이다. 기력이 쇠하여 자주 휘청거리는 까닭은 내 안의 나와 나 밖의 내가 서로 다투기 때문이고, 내 의지와 상관없는 나의 의지가 지배하려들기 때문이다. 이는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딤후 1:3-4).” 주께서 저를 사랑하시는 까닭이었다. 내 사랑으로는 당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에 대해서도, 벌어지는 그날 하루하루의 일에 대해서도 그러므로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내가 어찌 해볼 수 있는 것처럼 굴지 말자. 나도 나를 이기지 못하면서 저가 자신을 이기지 못하는 일에 대하여 나무라거나 낙심할 게 무언가? 하나님이 그리하라 하셔서 ‘시므이’도 따라오며 욕하고 돌을 던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그 사랑으로 우리를,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4-5).” 그러니 사람보고 할 게 아니다. 명분을 내세우며 갈 길도 아니다. 우리가 우리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 해도, 나라를 구하고 더 큰 이로움으로 인류공영에 이바지했다 해도,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고전 13:1).” 오늘은 이와 같은 덧없음에서 벗어나는 길이 오직 주를 바라고 주만 보고 나아가는 것임을 깨닫게 하신다. 내가 아이를 사랑하나 아이를 사랑해서는 안 된다. 저를 안타까워하나 저를 안타까워해서는 안 된다. 이 나라를 위하나 이 나를 위해서는 안 되고 고통당하는 이들을 고통당하는 이들을 위해서도 안 된다.
오직 주를 위함이라.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사 57:21).” 내 안의 평강은 내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서 사람 위주의 사람 중심의 세상을 사는 일이란, 그것이 옳다 여기는 순간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뜻을 우선하는 일이었으니,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사 5:21).” 인본주의가 성경의 신본주의를 배격한다. 서로는 하나일 수 없다. 두 주인을 섬길 수도 없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전 1:17).” 곧 오늘을 새로이 허락하신 이의 분명하신 뜻은 있다. 이와 같은 의미가 개인의 요구보다 중요하다. 내가 하고자 하는 나의 마음이 늘 보면 발목을 잡는다. 가깝게는 아이를 대하는 데 있어서의 마음이 그러하다. 오늘 욥은 고백한다. “너희가 하나님의 낯을 따르려느냐 그를 위하여 변론하려느냐(13:8).” 내가 따르는 게 아니라 주께서 나를 이끄시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살면서 얻어 쥐는 지혜라는 게 얼마나 허망할 따름인가? “너희의 격언은 재 같은 속담이요 너희가 방어하는 것은 토성이니라(12).” 이와 같은 사람 중심의 사람들에 대하여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눅 18:9).” 예수님은 엄연히 이를 구분하셨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11).” 스스로 다행이라 여기는 일에 대하여 뚜렷한 증거로 삼으셨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12).” 참으로 당당하고 자신 있는 삶이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13).” 곧 이와 같은 극단적인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고자 했던 것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14).” 스스로 내가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들에 대하여 성경은 엄히 경계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 안 하는 게 아니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것이다. 매우 의도적이고 반복적이고 직접적인 것이다.
나는 아이의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과 그 변명과 또 되풀이 되는 일들을 지쳐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저의 처지를 주께 아뢴다. 보면 어쩌다 우리 아이들만 이런 게 아니라 모두가 똑같다. 다들 자기 생각이 있고 그 판단을 따라 자기 의지대로 산다. 사느라 여념이 없으니 하나님을 바라고 구할 엄두가 나질 않는다. 그러다 그러고 있는 이들을 보면 공연히 한심하게 여기며 미련하게 생각한다. 어쩌겠나? 내가 나의 사연을 일일이 열거하며 누구에 대하여, 무슨 일을 두고 거론한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 9:10).” 나는 가만히 하던 일을 멈추고 십자가를 본다. 주를 바라며 아이를 생각한다. 저의 어려움과 어쩔 수 없음과 그와 같은 사정과 사연을 주께 아뢴다. 부디 주께서 저를 붙드시고 인도하심으로 바른 길로 가게 하시기를. 내가 하는 게 아니라, 나는 다만 죄인이로소이다. 주의 은혜가 아니면 단 한 시도 살 수가 없다. 그러니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고전 3:18).”
주를 바라고 의지하는 게 지혜였다. 고로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나를 고치소서 하였나이다(시 41:4).” 곧 “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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