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전봉석 2020. 2. 11. 06:59

 

 

네가 알지 못하느냐 예로부터 사람이 이 세상에 생긴 때로부터 악인이 이긴다는 자랑도 잠시요 경건하지 못한 자의 즐거움도 잠깐이니라

욥기 20:4-5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

시편 48:14

 

 

하나님의 뜻은 하나, 우리의 거룩함이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 4:3).” 그런데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일은, 나의 소욕을 따르려하는 일이겠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4:30).” 인치심을 받았다는 것, 그리 한 소망 안에서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4).” 다음으로 사랑 안에서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16).” 이는 예수 안에서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21).” 새 사람을 입는 일이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24).”

 

곧 내가 거룩하여진다는 것은 새 사람을 입는 일로 이는 예수 안에서, 사랑 가운데, 한 소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처럼 말씀을 따라가는 일은 나에게 두신 일이라. 마음이 어려워서 나는 더 다른 짓을 못한다. 스스로 자가 격리가 된 상태와 같다. 할 일이 없어 말씀을 찾고 그에 따른 믿음의 사람들을 따르지만 돌아보면 그것이 유익이다. 이를 잠언은 근신을 지킨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근신이란 떨어져 따로 구분된 시간과 몸과 생활을 일컫는다. 그러니까 나는 허튼 데 마음을 두지 않음으로 누구의 위로를 피하고, 어떤 일에 스스로 열심이지 않으며 공연한 기대로 마음 졸이지 않는다. 근신이란 그러지 못하게 자신을 격리, 분리하는 일이다. 가령 요즘처럼 전염병이 창궐할 때 근신을 지키는 일보다 유이한 일이 또 있겠나? 그러므로 내 아들아 완전한 지혜와 근신을 지키고 이것들이 네 눈 앞에서 떠나지 말게 하라(3:21).” 그야말로 수상한 세월이다.

 

그러할 때 근신을 지키며 네 입술로 지식을 지키도록 하라(5:2).” 이는 지혜의 기본이라. 함부로 나댈 때가 아니다. 다들 나름의 공적을 자랑하는 시기에 막연하게 근신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미워하는 것이다. 상종을 하지 않는 일이다. “나 지혜는 명철로 주소를 삼으며 지식과 근신을 찾아 얻나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8:12-13).” 괜히 속이 부대껴 힘에 겨운 하루였다. 우울감은 쉬 사라지지 않았고 그 때문에 더욱 아무 것도 하기 싫었다. 하기 싫은 마음은 묵묵히 하게 하는 마음을 더했으니, 누구는 어찌 지내는지 또는 어딜 좀 갈까하고, 하는 마음을 근신하는 일은 더욱이 말씀으로 붙들리게 되었다. 그래서 믿음으로 화답하지 못하는 말씀은 유익할 게 없다.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4:2).” 그러니까 말씀이 더욱 친밀하게 다가오는 일은 근신의 때이다.

 

다들 열광하는 어떤 일에 대하여 서로 축하하고 환호하고 즐거워하는데 이를 경계하는 것이다. 곧 우리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1:16).” 그런 구원의 능력이 어떨 때 가장 친근하게 여겨지나 했더니 나를 근신할 때였다. 같이 어울려 다른 데 눈을 돌리고 온통 즐거워할 때는 부산스럽기가 그지없다. 오히려 오늘의 나의 어려운 마음이 믿는 도리를 굳게 잡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4:14).” 다시 말해 곧 안식이 이를 때에 주의 백성만이 남는다.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9).” 근신은 안식의 맛을 닮았다. 무력하고 쓸모없는 것 같으나 그 자체로 이미 충분한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놀라운 능력을 발휘한다. 스스로 하는 게 아니라 내 안의 무엇이다.

 

곧 새 사람을 입는다는 일은 말씀으로 항상 살아있는 일이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 같은데 도리어 큰 일을 하고 있었다. 근신이란 그런 것이어서 내가 즐기던 것을 버릴 때 주께 향하는 마음의 첫 걸음이었다. 이는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4:16).” 내가 주께 아뢸 때, 가만히 주를 바랄 때, ‘주님하고 부르고 마음을 모을 때,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4).” 이처럼 마음을 둘 수 있는 것은 근신함으로 하는 일이었다. 그 어떤 것 하나도 허투루 우리 곁에 두시지 않는다.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4:13).” 떠벌이고 호들갑 떨 것 없다. 오늘 말씀에서 데만 사람 소발의 말은 가볍기 그지없으나 저의 말이 또한 틀리지 않다. “네가 알지 못하느냐 예로부터 사람이 이 세상에 생긴 때로부터 악인이 이긴다는 자랑도 잠시요 경건하지 못한 자의 즐거움도 잠깐이니라(20:4-5).”

 

온 세상이 무엇에 열광하고 어떤 일에 축하하고 기뻐하는지, 그러나 이는 모두 잠깐이고 그 이김도 영원하지가 않다. 그럼 그럴수록 우리에게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근신함으로 온전한 빛을 따름이다.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그러나 다만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근신하는 일이라니! (12:46-48). 우리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시려고, 심판이 아닌 구원을 이루시려고, 이는 결국 심판이 이를 때에 우리를 지키시려고. 그리하여 말씀은 우리의 골수를 쪼갠다. 혼과 영을 흔들어놓으신다. 나로 하여금 근신하게 하시는 것이다. 전에처럼 누구를 찾고 어떤 자리에 기웃거리고 무엇으로 위로 받고 회포를 푸는 따위의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게 하시려고!

 

누구는 도망치듯 태국에 나가 살았다. 서울대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교수가 되려하다, 기업형으로 약국을 운영하면서 몇 채의 건물을 벌었다. 여태 이혼을 미룬 것은 재산분할문제로 애만 데리고 떠난 길이었다. 저는 그곳에서 액세서리를 만들어 관광객들에게 파는 노점상을 하였다. 그러다 결국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으러 잠시 귀국한다나. 그런 이야기를 누구에게 들으며 나는 그저 할 말이 없다. 여전히 자신을 추켜세우며 사는 일이라, 건물주답게 적당히 돈이 들어오니 아쉬울 게 없는 삶이기도 해서차라리 저가 가나하였으면 복이었을 것을. 배운 게 없고 병약하였으면 좋았을 것을.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19:23).” 내 곁에 그런 사람이 몇 있다. 저의 학식이 또는 그 재물이 저로 하여금 하나님을 마다하게 하고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막아버렸다. 뭐라 해도 들리지 않는다. 그럴 겨를이 없다. 신기한 건 돈이 있으니 더 벌어야 하는 것이고 건강하니까 더 건강해져야 한다. 희한한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과 더 잘 어울려야 하고 일에 쫓겨 날마다 회전하는 문처럼 산다. 저가 교회를 다닌다고 하나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나가는 것도 아닌, 참 희한한 모습이다.

 

예수님도 말씀하시길 본인이 자의로 말한 바 없으시다.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12:49).” 오늘 내게 두시는 이와 같은 근신이나, 그래서 말씀이나, 한낱 저 아이, 남들이 보면 빙충맞기 이를 데 없는 일이겠으나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고전 9:17).” 나의 사명이다. 그래 겨우, 저 애. ‘고작, 이런 일이고, 가소롭기 짝이 없는 신세일 뿐이다. 그럼에도 내가 나를 전파함이 아니라 오직 예수가 주 되신 것,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 4:5).” 누가 교회를 다니면서도 너처럼 사니까좋은 게 뭐야? 하고 물을 때의 난간함에 대하여! 요즘 거리를 보면 다들 마스크를 착용하고 서로에게 거리를 두고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에는 가급적이면 피하고 서로 왕래도 주의하면서오늘의 신종코로나 사태도 나에게 있어 영적인 근신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그야말로 한낱 이생의 불상사로부터 자신을 지키려고 그러면서 하물며 영생의 삶에 대하여는, ‘설마하고 안이한 저들에 대하여! 때로는 얼굴을 가리시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 “이제 야곱의 집에 대하여 얼굴을 가리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8:17).” 나는 기다리며 바라보리라! 근신이 알려주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 소발의 말은 명쾌하기까지 하다. “네가 알지 못하느냐 예로부터 사람이 이 세상에 생긴 때로부터 악인이 이긴다는 자랑도 잠시요 경건하지 못한 자의 즐거움도 잠깐이니라(20:4-5).” 그저 잠시일 뿐인데 아등바등 기를 쓰는 세상에서 우리는,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48:14).” 하는 믿음의 확신으로 근신한다. 스스로 마스크를 쓰고 손을 깨끗이 씻고 자발적인 자가 격리를 하면서,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과 같이 찬송도 땅 끝까지 미쳤으며 주의 오른손에는 정의가 충만하였나이다(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