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전봉석 2020. 3. 3. 07:03

 

 

참으로 잡으려는 그의 희망은 헛된 것이니라 그것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그는 기가 꺾이리라

욥기 41:9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시편 69:30-31

 

 

겁 없이 굴더니 속수무책인 게 사람이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리워야단이라 불리는 하마라고도 하고 악어라고도 하는 어떤 환상의 무엇이기도 한 힘센 것을 두고 큰소리치던 사람에게 이르신다. “참으로 잡으려는 그의 희망은 헛된 것이니라 그것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그는 기가 꺾이리라(41:9).” 그러니 닥쳐봐야 안다. 당해보지 않고는 두려움마저 즐거울 따름이다. 그 두려운 존재를 만드신 이가 하나님이시다. 이러할 때 과연 나는 무엇을 주목하는지. 오늘의 전염병이 이제 주기적으로 되풀이 될 것이고 그것으로 때마다 어려움을 겪을 것인데, 시편은 이에 따른 우리의 자세를 가르친다.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69:30-31).”

 

그것은 모든 높은 자를 내려다보며 모든 교만한 자들에게 군림하는 왕이니라(41:34).” 그 천하의 교주도 두 번 절하며 횡설수설 용서를 구하는 모습이 기이하였다. “그것이 일어나면 용사라도 두려워하며 달아나리라(25).” 그러할 때 우리의 자세는 어떤가? 그러니 무엇에 집중할 것인가? 마치 일련의 사태는 그리 묻는 것 같았다. 나이들어 죽음을 목전에 두고 감옥에서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이른다.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딤후 2:23).” 여기저기 채널마다 전염병을 분석하고 그 진원지인 교주와 교단을 언급하며 설왕설래 온갖 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싸잡아 기독교를 종교 집단화하여 사회의 우려를 빌어 집단이기주의로 몰아가는 경향도 있었다. 그러나 우린 그런 데 갑론을박하지 않는다.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24-26).”

 

이럴 때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 중 하나는 온유와 가르침이다. 곧 올바른 배움이 있어야 한다. 이는 지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11:13).”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성숙된 지혜나 지식이나 보다 나은 삶의 질이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영이 자라가는 일이다. 곧 구하면 주신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 주님은 죽으셨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12:32).” 배워야 한다. 이 모든 사태를 보며, 사람들의 각양각색을 보며 그 임기웅변과 같잖은 호언장담을 들으며 배워야 한다. 리워야단도 별 거 아닌 것처럼 겁 없이 굴다, “네가 낚시로 리워야단을 끌어낼 수 있겠느냐 노끈으로 그 혀를 맬 수 있겠느냐(41:1).” 당해봐야 안다. 우리의 배움은 머리도 아니고 가슴도 아닌 삶이다. 배움과 실천은 같이 가고 행동과 학습은 따로 진행될 수 없다. ‘살며 사랑하며 배운다.’ 이는 동시적인 일이다.

 

또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 비용이 부족하였으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였음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고 또 조심하리라(고후 11:9).” 치대지 않고 의존하지 않는다. 우리가 의지할 이는 오직 예수 한 분이시다. 누가 하도 죽는 소릴 해대서 더 죽을 처지에 있는 이의 사례를 들려주었다. 이는 상대적일 수는 없으나 저마다 감사할 수 있는 조건은 다들 가지고 있다. 그것보다 어려운 처지를 두고 염려하는 것이니, 그도 그럴 수 있겠으나 너무 그러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러므로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딤전 4:13).” 아내는 한 달을 놀게 생겼다. 공치는 만큼 어려움도 따르게 되었으니 당장 나가야 할 돈은 따박따박 턱 받쳐 오는데 헉헉 숨이 막힐 지경이라. 그런 와중에도 우리에게는 감사할 게 얼마나 또 많은가? 아내에게 그리 일렀으나 알지만, 알면서도 떠나지 않는 게 걱정이고 근심이라. “때가 이르렀고 날이 가까웠으니 사는 자도 기뻐하지 말고 파는 자도 근심하지 말 것은 진노가 그 모든 무리에게 임함이로다(7:12).” 오늘 우리의 어려움은 허튼 게 아니다. 고난은 연단이고 연단은 우리로 단련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다.

 

말이 쉽지 난들 속이 편하기만 하겠나만 그래서 더 배워야 한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오직 하나님 앞에 드려지기를 힘쓰는 삶이라니. 가난도 질병도 이 숱한 어려움도 누구에 대한 끝없는 안타까움도, 이 모든 것은 결코 사색이 아니다. 사색으로 도를 깨닫는 따위의 낭만적인 진리가 아니다. 실전이다. 믿는다는 일이 피부로 느껴지지 않고 현실로 다가오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그림의 떡이다. 성경은 숱하게 강조하신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3:6).” 나는 입이 댓 발 나온 아내의 근심과 긴 한숨을 듣다 그리 일렀다. 같이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그와 같이 기도하였다. 우리의 약함이 그 어려움이 우리로 주를 더욱 바라게 한다.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살전 2:9).” 이 모두는 배움이고 실천이고 우리의 사명이며 아직 살아가는 이유다.

 

사람 마음은 가장 믿을 수 없는 게 자기 자신이다. 오전에 오는 아이가 어디 직장이 되어서 다음 주부터는 매일 오지는 못한다. 그러면 시원할 줄 알았는데 걱정도 앞서고 어떤 서운함도 앞서고 염려도 앞을 가려 괜히 벌써 마음부터 울렁거렸다. 나는 생각하기를 각자의 기질이나 재능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게 아니다. 하나님은 그것으로 사명을 맡기시지 않는다. 도리어 이를 다 말리시고 빳빳하게 마를 때까지 기다리신다. 그래서 오히려 사역을 감당하는 데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 자기 재능이고 자기 기질이었다는 것을 알게 하신다. 결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우리로 우리가 잘하는 것을 가지고 주의 일을 하게 하시는 게 아니었다. 엉뚱하게도 어부가 또는 세리가 혹은 율법주의자가 고꾸라져 그의 직업과는 무관하게 주를 따랐다. 가난함으로 부요하게 하신다는 사실, 다 없이 하신 위에 그 백지 상태에다 하나님이 친히 쓰신다. 모세가 그러했고 다윗도 그리 다루셨다. 하지만 우린 지금도 섣불리 재능을 운운하고 이를 달란트라 여기며 그것으로 마치 하나님의 일을 돕는 것처럼 사역을 감당하려 할 때가 있다.

 

오히려 성경은 우리더러 자발적인 가난을 요구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8:22).” 내가 종종 이런 딜레마에 빠지는 것 같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으로 내가 해야 할 것 같은데, 하나님은 번번이 내가 할 수 없는 것으로 나로 하게끔 하신다. 내가 저 아이를 만나게 되는 과정도 함께 하는 오늘의 이모저모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희한할 따름이다. 난 좀 괜찮은(?) 상대를 만나 조금은 그럴듯하게(?) 사역을 이뤄갈 줄 알았다. 하긴 그 직전에 글방을 운영할 때 대체로 아이들이 다들 똑똑했다. 이름하여 서울대 연고대는 물론 그 수능보다 어렵다는 편입시험 준비에서도 논술로 척척 저들 원하는 대학을 가게 하였다. 우쭐하였고 어이없게도 그래서 글방은 레벨 테스트를 하고 수준이 낮으면 안 받는다는 소문까지 엄마들 사이에 있었다. 그러니 내가 좀 그런 쪽(?)에 실력이 있는 줄 알았고 그리 사용하실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목사가 되는 동시에 모든 게 끊겼다. 거짓말처럼 증발하였다. 하나님은 나의 기질이나 재능을 필요로 하시는 게 아니었다.

 

두시는 자리, 보내시는 영혼, 곁에 두시는 한 사람, 그 일! 그것을 통해서 나를 가르치신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3:5-6).” 가끔 아이와 대화하면서 또는 그 기도를 들으면서 이를 녹화하여 누가 본다면, 저들은 대체 뭘 하는 것일까? 싶을 정도로 난감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아이의 기도에 아멘하고, 그 쓴 글을 같이 읽고, 저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것은 아이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다. 내가 아이를 어찌 도움을 주어 무얼 잘 되게 하려는 줄 알았는데, 매번 그때마다 아이를 날 위해 두시고 말하게 하시고 그 글을 같이 읽게 하시는 거였다. 이러다 내가 돌아버리겠다, 싶다가도 그래서 주를 바라며 저 한 영혼을 두고 기도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에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69:1).” 때로 나는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2).” 대체 이러고 살아야 하나 싶을 때,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우매함을 아시오니 나의 죄가 주 앞에서 숨김이 없나이다(5).”

 

이와 같은 가난이 나로 하여금 주만 바라게 하시는 은총이다. “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하나님이여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2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