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욥기 42:3
아하, 아하 하는 자들이 자기 수치로 말미암아 뒤로 물러가게 하소서
시편 70:3
회개의 기본은 자신이 옳다, 잘 안다하고 여기던 것에 대한 실토이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 42:3).” 이를 주께 고하며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6).” 저 또한 친구들과 변론할 때에 자신의 자세로 굽히지 않았던 것인데,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5).” 이와 같은 고백이 연단을 통해 이루어진다. 고난은 허투루 오는 게 아니다. 값없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믿는 자에게 우연이란 없고 괜한 일이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이는 내가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아직 포기하지 못하는 것으로 인해 주의 뜻을 바로 알지 못할 때가 있다. “너희가 이런 일도 행하나니 곧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제단을 가리게 하는도다(말 2:13).”
감상적이고 쓸데없는 집중은 오히려 주의 뜻을 바로 헤아리지 못하게 한다. 그러므로 나이 많아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이른다. “디모데야 망령되고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의 반론을 피함으로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라 이것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딤전 6:20-21).” 즉 헛된 열심과 성의가 우리로 그릇 행하게 할 수 있다. 맹목적이고 스스로 희생적인 행보가 그럴 수 있다. 자기 신념이 믿음의 순종으로 오인될 수도 있다. 그러니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딤후 1:13-14).” 요즘은 자주 드는 생각이 지키는 게 이기는 것이란 생각을 한다. 자리를 지키고 맡기신 일을 지키고 해야 할 것을 지키는 일이야 말로 새로운 그 어떤 도전보다 귀하다. 그래서 성공보다는 실패가 어떤 좋은 결과보다는 안 좋은 결과가 우리를 쥐고 흔든다. 남들이 뭐라 하는 것은 둘째 치고 스스로도 걸려 넘어진다.
이와 같은 고난을 더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다. 욥기를 읽으며 내내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일부러 그러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묵묵히 받아들이는 게 귀한 신앙이겠다. 내 생각, 내 의지, 내 뜻을 모두 내어드리기까지 환난은 교훈을 더한다. 그리하여 어쩔 수 없는 것에서 비로소 주의 전능하심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곧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이는 엄청난 값으로 얻은 교훈이다. 가르친다고 해서 배울 수 있는 덕목이 아니다. 머리로 아는 동안에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고백이다. 그런 뒤에 우리는 주님의 자발적인 가난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곧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 이는 지혜자가 이르는 신앙의 덕목이기도 하다.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전 7:18).”
가난이든 부함이든, 성공이든 실패든, 기쁨이든 낙심이든… 모든 덧없는 것에 대하여,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마 8:22).” 오직 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추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원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사 60:19).” 그 어떤 것도 주님의 영광을 대신할 수 없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그 영광이 우리 안에 계시다. 우리로 신이라 하신 것은 하나님이 내 안에 내주 임재하셨기 때문이다.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행 13:33).” 그런 나를 일컬어, 너는 내 것이라 하신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곧 오늘 주어지는 이 모든 어려움이나 또는 즐거움까지도 이와 같은 영광과 바꿀 수 없다.
욕과 영광이, 실패와 성공이, 십자가와 부활이 내 안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꿈을 버리지 않는다. “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원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끝날 것임이라(사 60:20).” 이와 같은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사는 것이다. 우리는 약하다. 본래 그런 자들로 부르셨다. 병자와 거지와 가난한 자와 행인으로 뜨내기 같은 존재였으나 왕의 잔치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다. 곧 하나님은 그와 같이 천대 받는 사람을 부르셨다. 세상에서 존귀하고 복된 자리를 차지하고 사는 자들에게는 이와 같은 초정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실제로 어려운 것이다. 굳이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신기하게도 하나님을 만나면 우리는 약한 사람이 된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무력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마치 광활한 대자연 앞에 섰을 때 자신이 초라하고 너무나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처럼. 아이러니하게도 그렇듯 세상 사람들은 또한 우리를 한없이 약한 사람으로 본다.
우리는 약하고 부족하고 ‘버러지 같은’ 존재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런 우리가 위대한 것은 이를 들어 주의 복음을 증거하신다. 마음이 상한 자, 슬퍼하는 자, 낙심에 떨어진 자를 위로할 수 있게 하신다. 그리하여 어둠을 쫓아내는 일을 한다. 우리 안에 주의 빛이 비출 때 어둠은 물러가고 영광의 찬란한 빛이 비춰진다. 우리는 그렇게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 이 귀한 것을 나 같은 질그릇에 담으셨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4).” 나는 서둘러 안정제를 입에 물고 숨을 몰아쉬며 그리 묵상하였다. 아이가 감기 기운이 있는지 다 토하고 가슴이 아프다며 코로나에 걸린 게 아니겠냐며 걱정을 하였다. 화장실에 가고 속이 안 좋다고 하면서 자꾸 눕는 아이를 앞에 두고 내가 지레 겁을 먹는다. 아니다, 괜찮다 위로하며 죽을 사다 같이 먹고 내가 가지고 있는 위장약을 나누어주었다. 그럴 때 나는 좀 태연하고 의젓하였으면 좋겠는데, 불안이 엄습하고 덩달아 주체할 수 없는 두려움에 휘말리는 일이라… 서둘러 안정제를 먹고, 아이가 돌아간 후에야 진정이 되어 소파에 누웠다.
왜 하필 나처럼 질그릇에 이 귀한 보배를 담으신 것일까? 아니면 내가 우쭐하여 마치 나서서 내가 해결하려는 듯 선봉에 설 것을 아시고, 나의 약한 데에 그리스도의 권능을 담아놓으셨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나야말로 신경안정제를 먹으면서 여기 있다. 두신 데 머문다. 맡기시는 일을 지킨다. 별 수 없는 일에서 오히려 감사를 배운다. 그리하여 나는 여호와의 영광에 함께 하는 자가 될 것을 믿는다. 하는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임을 안다. 그리하여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사 61:1-3).”
묵묵히 그저 무던하게 또 하루를 맞이하고 주신 바 그 일에 충성하는 것. 그것을 “아하, 아하 하는 자들이 자기 수치로 말미암아 뒤로 물러가게 하소서(시 70:3).” 나는 다만 주께 아뢴다. 그리하여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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