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도 못하고, 명철로도 못하고 모략으로도 여호와를 당하지 못하느니라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
잠언 21:30-31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시편 91:11
두려움과 공포심은 믿음의 정도와 상관없다. 신앙이 좋다고 고통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느낌은 고백과 다르다. 고백은 느낌과는 상관없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주를 바라며 주를 의뢰할 수 있다. 온전히 주를 믿는 일은 뜬구름 잡는 삶이 아니고 의연하여 인간으로의 삶을 초월하는 신비가 아니다. 오히려 더 나약함을 느낀다. 주의 도우심이 없이는 한 치 앞도, 단 한 걸음도 뗄 수 없다는 것을… 그리하여 “오직 너는 똑똑히 보리니 악인들의 보응을 네가 보리로다(시 91:8).” 우리를 대적하던 것들로부터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를 너의 거처로 삼았으므로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9-11).” 하는 이와 같은 증거를 얻는다.
다윗은 엄연히 큰소리친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27:1).” 그러나 저의 이어지는 고백에는 공포에 접한 모습이 역력하고 그와 같은 위기 가운데서도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다. 오늘과 같이 전염병이 창궐하여 우리의 일상을 뒤집어놓은 때에 두렵지 않고 공포를 느끼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다만 누구는 객기를 부리듯 젊음과 자신의 건강을 과시하지만 우리는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이 나의 생명의 능력이심을 더욱 의뢰한다. 그리하여 천사들이 나를 지킬 것이다.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91:12).” 그뿐 아니라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13).” 이와 같은 말씀으로 새 힘을 얻는 것이다. 그럴 수 있는 것이 주를 믿는 일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근심과 걱정이 목을 조여 오듯 공포를 가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욱 하나님께만 집중하게 된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19).” 그런데 그 믿음으로 과신하지 않는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0-12).” 이를 알게 하고 격려하는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공포다. 불안이다. ‘큰 물결이 설레는 어둔 바다이다.’ 그러나 ‘내가 탄 배의 사공은 예수시라.’ 이를 알 때, ‘나 두렴 없네, 두렴 없도다.’ 하는 고백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앙고백과 우리가 느끼는 감정과는 다르다. 공포와 두려움을 느낌으로 더욱 주를 의뢰하는 것이 신앙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
돌아보면 역경이 없는 인생은 없다. 어느 의사 내외가 있었다. 저들은 뭘 해도 하는 일마다 형통하였다. 새로 지은 건물에 덩그러니 가장 좋은 위치에 병원을 개원하였더니 반년도 안 돼 상권이 형성되어서 노나는 자리가 되었다. 어디 사람들의 시선이 뜸한 곳에 3층짜리 단독주택을 싸게 구하였더니 몇 개월 뒤에 그 근처로 전철이 생기면서 집값이 배로 뛰었다. 늦게 아들을 낳았는데 얘가 또 천재소리를 듣고 자라더니 영재중학교에서 영재고등학교로 월반을 하였다. 어제는 아주 오랜만에 그들의 소식을 들었다. 여전하지 뭐, 하다가 영재 아들이 대학에 떨어졌는데 그 뒤로 가출을 하여 몇 개월째 소식을 모른다고 했다. 그의 처는 들어앉아 지하에 꾸민 오락실에서 나오지를 않는다고 하고… 그저 안타까움으로 마음만 심란하였다. 이 땅에서의 형통이 무조건 복은 아닌 것이다. 고난과 역경이 누구는 더욱 완고하게 누구는 부드러운 마음으로 주를 마주하게 한다. 다윗이 남다른 것은 어떠하든 주를 의뢰하였다는 것이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 27:4).” 이와 같은 고백이 평안할 때 나온 게 아니다. 공포와 불안 중에 드려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13).” 그 믿음은 하나님께 간구할 때 생겨난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어떻게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고 기도할 수 있겠나? 그러나 기도할 때 염려로 짓눌리던 것들에서 놓여난다. 나는 요즘 하루에도 몇 번씩 이와 같은 체험을 한다. 마닐라가 어떻고, 공항이 폐쇄되어 어쩌고, 아들애 일이 어떻고, 누가 무슨 일로 궁지에 몰렸고, 확진자가 우리 옆 동네에 나왔고, 딸에 직장 건물에도 누가 확진 판정을 받았고… 하는 것들에 불안이 가중된다. 나는 결코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기도한다. 주님, 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고 십자가를 바라고 주께 아뢴다. 도와주세요, 하는 말 한 마디에 눈물이 핑, 돈다. 그러고 나면 순간 감사할 것들이 생겨난다.
내가 두려워하랴, 무서워하랴, 불안하지 않다… 하는 고백은 허풍인 것 같지만 신앙고백이 된다. 두렵지만 두렵지 않다. 무섭지만 무섭지 않다. 불안은 내 느낌이나 주를 의지하는 신앙고백은 값진 은혜다. 단지 큰소리치는 허풍이 아니라 ‘어떠어떠하지만 주가 나와 함께 하심이라.’ 그러므로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리리라.” 하는 것이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겁이 없다는 건 거짓말이고 겁이 나는 것과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지하고 신앙으로 고백하는 일은 별개다.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요일 1:5).” 그러니 내 주제에 아이와 통화하며 저를 위로하고 격려한다. 누구와 통화하다 저의 모친이 병환중이고 곧 또 이사를 해야 하고 엎친 데 덮친 것처럼 죽을 지경인 저에게 말씀으로 위로를 한다.
이는 내가 저들보다 의연하고 담대해서가 아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내가 짊어지고 갈 것인가, 주께 내려놓고 홀가분하게 걸어갈 것인가? 아들애 문제로 속을 끓이다보면 감정은 오르락내리락 조울증처럼 미칠 것만 같은데, 그런 가운데서도 고백은 별개다. 주를 의뢰함으로 고한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 그리하여 내 곁에 두시는 이를 돌아보고 전화로나마 위로하면서 말씀으로 격려하는 일,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 10:29-31).”
내 안은 시끄러워서 매순간 싸우고 갈등하다 간구하고 주를 바란다. 그러다보면 사람을 의지할 수 없고 저들의 무력함 앞에서 있는 자나 없는 자나 배운 자나 못 배운 자나 우리는 모두 주의 긍휼하심이 아니면 살 수가 없음을 깨닫게 된다. 믿음은 출발점이지 종착점이 아니다. 계속 나아가야 한다. 주신 날을 묵묵히 딛고 서야 한다. 이는 오늘 우리의 싸움이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시 91:14).” 오늘의 관건은 주를 사랑함이다. 무엇으로 주를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막 12:33).”
그러므로 더욱 주께 집중하는 삶,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0-12).” 그리하여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를 너의 거처로 삼았으므로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시 91:9-11).” 이와 같은 고백이 오늘의 공포와 불안 중에 내게 머물 게 하시는 은총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14).” 또한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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