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전도서 1:8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시편 102:27
사는 일이 참 고단하다. 다윗은 괴로움에 노래하기를, “나의 탄식 소리로 말미암아 나의 살이 뼈에 붙었나이다(5).” 그 외로움은 또 어떠한가? “나는 광야의 올빼미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 같이 되었사오며, 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6-7).” 그러나 이를 드러내어 말하는 상대가 그 모든 것을 지으신 이시요, 주관하시는 자이시다. 저는 그를 한 마디로,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27).” 하고 표현하고 있다. 결국은 이 모든 괴로움의 원인은 사람에게 있었다. 본래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시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애 3:33).” 그러니 지혜자의 표현처럼 사람의 끝 간 데 없는 마음의 일이라,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전 1:8).” 보고 들음이 족한 줄 알지 못하니 거머리의 딸들처럼 다오다오 한다.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오 다오 하느니라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잠 30:15).”
이와 같이 말씀 앞에 앉으면 실타래처럼 엉켰던 생각이 풀리고 혼잡스럽기만 하던 마음이 수긍이 된다. 말씀이 주는 자세는 기도라, “주의 종들의 자손은 항상 안전히 거주하고 그의 후손은 주 앞에 굳게 서리이다 하였도다(시 102:28).” 인생이란 자고로 시드는 일밖에 남은 게 없으니, “내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고 내가 풀의 시들어짐 같으니이다(11).” 온통 세상이 난리법석인 이때에, 나는 여느 날과 같이 토요일 오전에 글방에 앉았다가 사도행전의 전개에서 놀라운 사실을 하나 목격하였다. 행전이란 사도들의 행한 일을 기록한 것인데 어디에도 당대의 형편과 사정을 개선하려는 의도가 느껴지지 않았다. 로마의 압제로 인해 사람들이 불안과 공포에 떨고, 인간관계와 사회갈등의 여러 면모가 짐작이 가는데도 국가적인 재난상태나 그로 인한 사람들의 불안심리를 염려하고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해 어떤 수고와 노력의 기록이 없었다. 그저 당국의 표현대로 저들이 무식하고 평범해서였을까?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행 4:13).” 다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뿐이었다.
교회의 시작도 그 역할도 혁명이나 정치개혁, 사회정화나 민생치안의 문제가 아니었다. 사람에 의해 구성되고 형성된 단체였다면 그러한 목적과 의의를 두고 교회가 시작되었을 텐데(충분히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도), 교회는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주도하에 비롯되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가 있었고 이를 듣고 양심에 찔려 ‘우리가 어찌할꼬?’ 하고 자각이 이루어졌을 때, 사도들의 행전은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행 2:37-41).” 몇 번을 읽을 때도 무심히 지나쳤던 대목에서 새삼 우리의 관심과 그 지점의 정도에 대하여 묵상하게 되었다.
곧 내가 너무 지나치게 누구의 불안과 형편을 염려하고 있었고, 이를 개선하려는 듯 자꾸 뭐라 하고 잔소리처럼 참견하게 되면서… 그러는 게 그다지 옳은 게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곧 우리가 우리의 문제에 함몰하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어느새 수단이 되고, 말씀은 목적이 아닌 도구가 된다. 이 모두는 성령이 하실 일이다. 나는 교회에 있다. 교회이면서 교회이어야 한다. 며칠 전 친구와 통화하다, 누가 개척을 한다는 말에 꼭 그렇게 교회가 많은데 또 교회를 해야 하는가? 하는 저의 물음에 그리 대답한 적이 있다. 교회의 시작도 그 끝도 주의 섭리다. 우리는 모두 개별적인 교회다. 주를 모시는 성전이고 그 삶이 곧 예배이다. 이들이 모여 가정교회가 이뤄지고 지역교회가 형성된다. 엄연히 교회의 시작은 성령으로부터이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4).” 사도들은 구국의 일념으로 교회를 시작한 게 아니다.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이 없음을 알았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4:12).”
그 예수, 그 빛에 대하여 증언하였을 뿐이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요 9:5).” 저는 길이요, 진리이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 다른 증거는 소모적일 뿐이다. 그러니까 내가 왜 요즘 그토록 불안해하는가? 누구로 인하여 왜 그렇게 시달리는가? 무엇이 힘든가? 가만히 생각해보았더니 너무 지나치게 주변 것에 연연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환경을 개선하고, 저의 그릇된 습관을 어찌 뜯어고치려고 하고, 어떻게든 보다 나은 삶을 꿈꾸는 몽상가처럼 생각이 많다보니 하나부터 열까지 염려스러움과 근심뿐이라. 일찍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셨다. 저들의 주거지는 변방의 땅, 팔레스타인이었다. 보잘것없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예수의 제자가 형성되었고, 그를 따르는 무리들의 환경을 개선하려는 게 주된 목적이 아니었다.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7:15).” 곧 이 모든 일의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었다. 성령이 하실 일이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 같던 복음은 로마의 탄압과 같은 민족의 배척에서도 주후 325년에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었다. 이는 이어져 1500년대에 종교개혁을 맞는다. 그러는 동안 교회로 인하여 사회는 정비되었고 야만족과 고트족, 반달족의 공격을 막아냈으며 자연스럽게 병원과 학교가 지어졌고 사람들의 삶의 질은 개선되었다. 목적이 아니라 부수적인 역할이었고 자연스러운 변화의 과정이었다. 누구와 통화를 할까, 어제보다는 좀 어떤지? 마음이 기울던 것을 그만두고 주의 역사를 묵상하게 되었다. 이 모두는 성경의 이루심이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주의 마음을 바로 아는 것이 복된 것은 우리 삶의 본질은 인생을 어떻게든 잘 살고 멋지게 마무리하여 이름 석 자를 남기자는 게 아니었다. 오늘 전도자의 증언도 그 말이다.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들과 미련한 것들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전 1:17).” 우리 노력으로는 헛되며 그 나중은 처음보다 못하다.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18).” 다만 우리에게는 예수 이름뿐이라.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행 3:16).”
다른 무엇으로 내가 저를 또는 나를 개선할 수도 없고 도와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다. 인생은 표면적인 이야기가 전부가 아닌 것이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그러니 내가 어찌 감당하려는 그 자체가 모순이고 그릇됨이었다. 다만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갈 4:4).” 하나님이 주도하신다. 성령이 이끄신다. 내게는 예수의 행적이 말씀으로 손에 있을 뿐이다. 시달리듯 요즘 부쩍 예민해져 스스로 안정제 복용이 늘었음에도 이를 마치 무슨 사명인 것처럼 여겨 개선하고 뜯어고쳐 병 낫기만을 바라는 마음으로였으니… 피곤할 따름이다.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전 1:8).” 아무리 어떠해도 족한 것을 모르는 게 인생이다. 그러할 때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하게 하소서(시 102:1).” 우리의 가장 강력한 무기이며 의지는 기도였다.
비록 “내 날이 연기 같이 소멸하며 내 뼈가 숯 같이 탔음이니이다(3).” 허무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 인생이라 해도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27).” 이를 붙들고,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고 주에 대한 기억은 대대에 이르리이다(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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