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말 못하는 자와 모든 고독한 자의 송사를 위하여 입을 열지니라 너는 입을 열어 공의로 재판하여 곤고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할지니라
잠 31:8-9
내가 완전한 길을 주목하오리니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리이다
시편 101:2
나는 결코 누구보다 나아서 무슨 말을 해주는 게 아니다. 뭐라 하다 늘 내가 먼저 찔리고 부끄러운 까닭은 결코 나는 완전한 자, 온전한 자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호와께서 온전한 자의 날을 아시나니 그들의 기업은 영원하리로다(시 37:18).” 내가 그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완전한 자의 등에 업히는 것이다. 온전한 자의 수하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고전 2:6).” 내 것도 아니다. 다만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7).” 다시 말해 내가 완전한 자일 수 있는 것은 완전한 자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라. 누구를 탓하고 뭐라 면박하려는 일이 아니라 그리하여 우리의 연약함을 완전한 자에게 아뢰는 일이다. 그에게 의탁하는 것이다.
실은 누구와 통화하다보면 자꾸 속상하다. 고착된 저의 열등의식은 그래서 스스로 못한다는 것을 항상 무의식적으로 두둔한다. 핑계란 그런 것이다. 그래서 “게으른 자는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잠 26:16).” 아무리 뭐라 해도 자신은 항상 그럴 수밖에 없는 처지인 것을 무기로 삼는다. 속상한 것은 그게 늘 나였다. 어쩜 그렇게 나와 같아서 저의 긴 변명을 듣다보면 내 안의 소리를 듣는 것만 같아서 불편해진다. 언제든 나는 그렇지 않다고 하나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으니까… 말하다보면 부끄러움은 내 안에서 꿈틀거린다. 그러다 새삼 그러한 나를 예수께서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말씀이 떠오르면 가슴이 먹먹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뀐다. 고로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요일 3:14).” 그래서 내 곁에 저를 두셨구나! 마치 거울삼아 나를 항상 마주하며 감사를 잃지 않게….
오늘 시편의 말씀에서 완전한 자를 지향하며, “내가 완전한 길을 주목하오리니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리이다(시 101:2).” 할 때의 그 길이란, “너는 말 못하는 자와 모든 고독한 자의 송사를 위하여 입을 열지니라 너는 입을 열어 공의로 재판하여 곤고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할지니라(잠 31:8-9).” 저가 말 못함은 이를 알지 못함이고, 자신이 무장하여 여태 살아온 변명과 핑계의 무게이며 완고한 고집의 철통같은 수비였다. 세상적으로 그와 같은 갑옷을 입은 이를 꼽으라면 빌라도일 테고, 예수님은 빌라도 앞에서 말씀하셨다.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요 18:37).”
들을 수 있는 자는 들을 것이고 곧 그의 들음에서 사랑을 깨닫을 것이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13:1).” 예수님의 끝까지다. 예수는 끝이 없으시다. 그 끝은 상징적인 의미로 영원함을 내포한다. 나는 누구와 통화하다 싫증이 나고 뭐라 하는 것도 지겨워서 마음을 좀 띄우려고 하면 그게 또 속상하여서…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하고 뭔 소린지 알 수 없는 아이의 감정을 추측하고 권면하는 일이란 참으로 지치는 일이다. 그래서 뭐가 어찌 됐다는 소린지. 그럼에도 나를 자유케 하는 것은 저의 호응도 성장도 충실한 순종도 아니었다. 다만 그 안에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8:32).” 요한의 일관된 메시지는 하나였다. 그렇다면 진리가 무엇이냐?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9:24).”
곧 저를 오늘 내게 두신 이가 하나님이시라. 나의 이 형편이 주의 주도하심이라. 내 어려움, 나의 처지, 이 딱하고 불쌍하고 한심한 경우가 모두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가 숨겨져 있다는 것… 이를 아는 앎이 곧 은총이었다. 고로 내 안에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려고(요 15:11), 이로서 서로를 사랑하게 하시고(17), 넘어지지 않게 하시며(16:1), 언제든지 기억나게 하시고(4),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하심인 것을!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33).” 이를 알 때 진리는 우리로 게으르지 않게 하신다.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히 6:12).” 곧 게으르지 않고, 오래 참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며, 앞선 믿음의 사람을 따라가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13:7).”
이처럼 전날에 누구로 인해, 무슨 일 때문에, 어떤 마음의 우울감으로 주께 아뢰다 보면 하나님은 어김없이 말씀으로 응답하신다. 지혜를 더하심으로 주를 온전히 바라게도 하신다. 구하는 것으로 위로를 얻는 것이 아니라 구할 수 있음으로 이미 받는다. 다 저녁에는 솔직히 너무 지치기도 하여 아이의 전화를 누구의 문자를 씹. 었.다. 지겹고 답답하여 모르는 체하였다. 같은 말이 되풀이 되거나 무슨 소린지 알 수 없는 말들로 시달리는 일이란 때로는 도망치고 외면하고 싶은 일이다. 그래 놓고는 마음이 좋지 않아서 주님, 하고 돌아누워 주의 이름을 부르다 잠든 나에게, 그 무엇보다 주를 경외함이라.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잠 31:30).” 현숙함이 필요하였다. “그 손의 열매가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그 행한 일로 말미암아 성문에서 칭찬을 받으리라(31).”
결국 성경의 가르침은 한결같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7).” 그러니 어쩔 것인가? 이 화목은 단순히 잘 지내보자는 게 아니다. 주의 죽으심의 값이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10).” 그러므로 화목도 직분이라. 주가 맡기신 것이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 2:16).” 이 어마어마한 값의 것을 내가 어찌 소홀히 다룰 수 있단 말인가. 이 일 자체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 고로 우리로 거룩하게 하시려고,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22).”
그런 것을 나는 아내 앞에서 투덜거리듯 ‘지겹다’고 하였으니, 아내는 안쓰러워하면서도 ‘그러지 마’ 하고 말해주었다. 그러지 마! 그러지 말아야 한다. 내게 두신 이들이라. …. 무슨 일로 말이 많거나 공연히 사랑을 고백하거나 하면 나는 가슴이 철렁한다. 혼자 어디 왔어요, 하고 누가 말하면 안쓰러워 가슴이 아프다. 그러니 어쩐다? 심리학자 아들러의 표현대로 그거 ‘과제 분리’를 하면 될까? 그것은 각자의 문제이니 각자가 알아서 하라고 둬야 할까? 주가 맡기신 일이라. 할 수 있거든…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 12:18).” 문득 드는 생각이 내게 두신 한 영혼이라! 고로 “너는 말 못하는 자와 모든 고독한 자의 송사를 위하여 입을 열지니라 너는 입을 열어 공의로 재판하여 곤고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할지니라(잠 31:8-9).” 오늘 말씀이 심금을 울리는 듯하다. 이는 곧 세상 그 어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30).” 그러므로 “내가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찬양하리이다(시 101:1).”
내가 무슨 수로 완전할 수 있겠나? “내가 완전한 길을 주목하오리니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리이다(2).” 이는 오직 주만 바람이라. “ 아침마다 내가 이 땅의 모든 악인을 멸하리니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에서 다 끊어지리로다(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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