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
전도서 7:29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들을 밟으실 자이심이로다
시편 108:13
이럴 때가 있고 저럴 때도 있다. 이건가 싶더니 저거고 저건가 싶었는데 이것일 때도 있다. 사람이 특히 그러해서 그동안 마음을 두고 있던 것이 나 혼자 속을 끓인 경우가 더 많다. 그래서 지혜자의 언급은 분명하였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전 7:3).” 시편을 묵상하고 이를 설교원고로 작성하다 보면 우리의 탄식과 한탄이 하나님을 더욱 간절하게 찾는 지름길인 것을 알게 한다. 종종 놀라는 것은 그러고 있는 나의 모습이 신기할 따름이다. 어제도 오전에 일찍 작성하였던 것이 점심을 먹고 오후가 다 지나서야 끝났다. 전날에 쓴 것이고 전전날에 정리한 것이면서 일주일 내내 붙들고 있던 말씀이라 그것이 또한 희한할 따름이다. 아,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4).” 즐거움을 찾는 일보다 더 나은 고통이었다.
결국은 가장 유익한 일이 하나님과 친밀한 시간이다. 오늘 지혜자의 말을 나는 그리 읽는다.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29).” 다시 말하면 하나님만으로 충만하고 더없이 좋고 좋은 마음이었는데 사람이 많은 것을 추구하며 더 나은 무엇을 찾아 떠도는 것이다. 그러할 때 시편의 말씀은 명료하게 고쳐쓴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들을 밟으실 자이심이로다(시 108:13).” 우리의 그 어떤 노력도 또는 희생도 우리에게는 만족함을 줄 수 없다. 가령 어제 가정 예배로 마무리할 때 함께 읽은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요일 4:5).” 왜 낮 동안에 그처럼 오래 앉아 쓰고 다듬고 다시 읽으며 말씀을 더듬었는지를 알 것 같았다.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전 7:5).” 왜 이와 같은 말씀이 크게 들리고 공감하게 되는지 말이다. 결국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이다.
하나님과 친밀하다는 것은 첫째, 그 하나님의 증인이 된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언을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의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것이니라(요일 5:9).” 이를 요한 만일 우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을 사랑하게 되어 있다고 정의하였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2:15).” 세상의 그것은 엄연하여서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16).” 둘째, 그리하여 우리 안에 하나님을 공경하는 마음이 가득하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말 1:6).” 세상에 속하였으면 이를 믿지 않는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요일 5:10).”
셋째, 하나님과 친밀하다는 것은 저를 아버지라 부르며 나의 한탄도 탄식도 가감 없이 토로한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 넷째, 그래서 얼마든지 바라고 구하며 간구한다. 송구하고 민망하고 죄송하고 면목이 없다 해도,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엡 3:14-15).” 다섯째, 이와 같은 간구가 곧 주를 경배하는 일이다.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내 입에서 공의로운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세하리라 하였노라(사 45:23).” 이를 알고 이를 믿는 믿음은 전적으로 예수 안에서이다. 내 의지나 신념의 우상화가 아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 5:13).” 이렇듯 나의 유익은 메모였고 언제고 그 적어둔 것을 다시 읽을 때 다시 떠오르게 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이었다. 그래서 나는 날마다 설교원고를 준비하듯 묵상 글을 쓰고 책을 읽고 누구의 사연을 적어두고 어떤 책을 읽으며 밑줄을 긋는다.
종종 웃긴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게 그래봐야 뭐하나 싶은 것이지만 먼저는 그것이 오늘을 견디게 하고 오늘의 의미를 새롭게 하며 오늘에 맡기신 일인 것을 안다. 그리 여기면 기약 없이 감옥에 갇혀 12년이나 지냈던 존 번연이 그 안에서 쓴 천로역정이 이해가 된다. 이것으로 무엇을 할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다. 나는 다만 쓸 수 있으니 쓸 뿐이고 써야 하는 것이어서 쓴다. 그러고 있는 시간이 싫지 않고 싫지 않으니 즐겁기도 하다. 종일 혼자서 안 지겨워? 아내는 점심을 같이 먹으며 염려어린 마음으로 물었다. 가뜩이나 코로나19 전염병으로 서로의 왕래가 없으면서 나는 그와 같이 혼자인 시간이 지겹다가도 즐겁고 외롭다가도 만족스럽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요 9:37).” 지금 이 시간, 여기 이 말씀이 귀하고 좋은 이유를 나는 잘 알지 못한다. 다만 좋을 뿐이다.
매일 아침 눈을 뜨고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것을 함으로 할 수 있는 오늘의 컨디션과 몸의 상태로 감사하다, 이것도 어떤 날은 이렇고 어떤 날은 저렇다. 그러면 안 좋은 날은 안 좋은 대로 좋고 좋은 날은 좋아서 좋다. 왜 좋으냐고 물으면 나도 잘 모른다. 출퇴근 시간이 정해진 것도 아닌데 나는 늘 그 시간에 교회에 올라가고 커피를 내리고, 아침에 쓴 묵상 글을 다시 읽으며 그걸 또 메모를 하고, 손에 닿은 책을 읽고, 누구를 생각하다 주여, 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러다 보면 어느새 점심시간이고 오후고 저녁이 된다. 어제도 설교원고를 다 마치고 출력을 하고 주보를 만들고 보니 어느새 오후 네 시가 다 되었다. 매주 금요일에는 물걸레질을 하고 책상을 가지런히 하고 주보와 설교원고를 각자의 자리에 놓아주고 잠시 허리를 비틀다보면 7시, 퇴근시간이 되었다. 남들이 보면 웃을 일이겠으나 나의 하루는 늘 똑같다. 한 평 반, 존 번연의 감옥이나 바울의 감옥이 그러했을까? 또는 주인의 문 앞에 종일 앉아 자신의 자리를 지켰던 나사로라 이름 하는 한 거지의 하루도 그러했을까? 무던히 또 나무를 썰고 이어서 틈새를 메우고 엮어 방주를 짓던 노아의 120년 세월이…?
어제는 문득 그러다 그러고 있는 것이 인생이었으려니, 그런 가운데 주를 신뢰하고 저의 말씀을 붙들고 사는 것이 신앙이었으려니, 그런 생각을 하였다. 더는 지난날을 떠올리며 그리워하지 않는다.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은 지혜가 아니니라(전 7:10).” 이는 그저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다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13).” 나는 저의 경험어린 충고가 감사하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14).” 어떤 날은 이렇고 어떤 날은 저렇다. 이렇고 저럴 때마다 그 일에 끌려 다니는 것은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을 훼방한다. 저는 말하길, “내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 내가 그 모든 일을 살펴 보았더니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15-16).” 너무 애쓰지 말자.
뭐 그리 대단하여서 인생을 이루어가야 하는 게 아니었다.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17).” 감사함이 곧 하나님과 가장 친밀한 자의 중심이었다.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18).” 오직 주를 경외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29).” 생각이 너무 많다. 그래서 욕도 온다. 쓸데없는 일이다. 오직 주님 한 분만으로 주신 날에 감사히 또 하루를 보내는 일이라.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시 108:1).” 다른 거 없다.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땅에서 높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5).”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들을 밟으실 자이심이로다(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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