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지혜자와 같으며 누가 사물의 이치를 아는 자이냐 사람의 지혜는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의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
전도서 8:1
내가 입으로 여호와께 크게 감사하며 많은 사람 중에서 찬송하리니 그가 궁핍한 자의 오른쪽에 서사 그의 영혼을 심판하려 하는 자들에게서 구원하실 것임이로다
시편 109:30-31
아무리 선거철이고 정치인들의 입이라고 하나, “바람을 주장하여 바람을 움직이게 할 사람도 없고 죽는 날을 주장할 사람도 없으며 전쟁할 때를 모면할 사람도 없으니 악이 그의 주민들을 건져낼 수는 없느니라(8).” 우리 수준을 말해주고 우리의 의식과 관심의 향배를 알려주는 정치인들의 말은 고스란히 오늘 이 사회의 바로미터인 셈이다. 서로를 견제하고 독려하고 다스리려하는 것이야 진영논리에 의에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겠으나 참으로 허망하고 부끄럽고 야비하고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는 국민에게 일억씩을 주네, 매월 얼마를 주네, 하면서 허황된 소리를 하며 한 표를 부탁하는데 헛웃음만 나온다. 누구는 뜬금포를 쏘아대듯 ‘세월호’ 가족들을 운운하며 색깔론이니, 심판론이니 다들 저마다의 주장으로 표심을 공략하는데… 바람을 주장하고 죽는 날을 주장하는 일만큼이나 허허로울 따름이다. 하물며 목사가, 교회가 나서서 당을 짓고 사람들을 선동하는 일에 대하여는 더더욱 할 말이 없다.
우리는 자기 이야기, 자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다만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이 복음의 말씀은 어려운 게 아니다. 뭔가 대단한 자기 체험을 바탕으로 이뤄지는 것도 아니다. 간증을 내세우는 사람들은 복음이 아닌 복음으로 인한 자기 이야기에 주목한다. 사이비나 이단들이 그러하다. 사는 데 유용한 것으로 전락시킨다. 정치적으로 악용한다. 사람들을 선동한다.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 사람들을 부추기는 일이었다면 예수께서 죽으시고 한 세기도 가기 전에 기독교는 사멸하였을 것이다. 저들은 자기 체험이나 남다른 지식을 부르짖은 게 아니었다.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행 17:18).”
다만 예수와 그의 부활을 전하는 데 있어 정치적인 계도와 계몽을 목적으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어려운 말이 아니다. 다른 복음은 없다.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 다만 예수이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 어쩌면 이 복음은 아이라도 읽고 듣고, 알아듣는 내용이다. 성경이 어렵다고 하고 읽으면 도통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고 하는 사람에게 그것은 관심의 문제이지 지식의 문제가 아니다. 가령 나는 보험 약관을 아무리 읽어도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게임 설명서를 아무리 숙독을 해도 그걸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다. 주식이니, 가상화폐니, 은행 금리가 어떻고 하는 소리가 도무지 귀에 들어오질 않는다. 그래서 누가 쉬운 성경을 샀네, 어디서 나온 무슨 그림책으로 샀네 하는 소릴 들을 때면 그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그의 관심의 방향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복음의 수준은 쉽다. 모두가 즐겁게 들을 수 있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듣더라(막 12:37).” 곧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 1:26).” 이를 자꾸 과대 포장하여 지엽적으로 또는 학벌이나 그 수준 정도로 가늠하여 편을 가르듯 자신들의 복음은 남다른, 수준 있는, 고상하고 어려운 것으로 치장하려는 이들이 있으니,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27-29).” 이는 우리의 실력이나 수준의 정도를 초월하는 것이다.
곧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30-31).” 이를 아는 정도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른 것이다. 시대별로 학문에 따라 변형되어 온 게 아니다. 어느 특정인의 사유물이 아니다. 또는 저들의 주장이나 입장을 대변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2:6-7).” 이 복음의 영광은 어린아이들도 안다. 못 읽고 배움이 없는 이들도 기쁨으로 안다. 곧 이는 우리의 지식이 아닌 것이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
물론 말의 홍수와 정보의 범람 수준에 살아가면서도 사람들의 입은 척박하기 이를 데 없고 그 관심은 그저 웃자고 드는 정도이니, 선거철만 되면 느닷없이 나타나는 인물의 허황된 공약이나 저를 지지하고 초청하여 강연을 듣는 이들이나 조직이 또 있는 것이고… 어느 당의 공천을 받은 누가 막말을 하여 저들의 민낯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데, 죽어도 저들을 찍고 지지하고 선동하는 무리가 있는 것이고 보면… 개 버릇 남 못 준다. 우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문제이고 수준이고 정도이니, 부끄럽고 민망하고 두렵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15-16).” 그래서 나는 가지고 있던 SNS 계정들을 없앴다. 그 안에서 소통을 하네, 어쩌고 하는 논리에서 멀어지고 싶어서이다. 들쑤시며 다니는 두더지 같은 사람들의 댓글도 안 본지 오래다. 저들의 댓글을 읽다보면 그야말로 악이 범람하였다.
아, “누가 지혜자와 같으며 누가 사물의 이치를 아는 자이냐 사람의 지혜는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의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전 8:1).” 말씀으로만 살자. 내가 너무 이 땅에, 누구 일에, 또는 정세에 권세에 말려 관심을 기울이는 일도 다 부질없는 짓이다. 누구는 그렇게 지역사회 목사들을 모아 모임을 만들고 이단을 퇴치하고 방황하는 청소들을 선도하자는 취지로 내게도 같이 동참할 것을 호소하며 권하였다. 문득 성경 어디, 사도행전을 살펴보아 저들이 복음 외에 자신들의 신념과 이상과 꿈을 좇아 행하였다는 말씀을 찾아볼 수 없어서…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는… 어떤 목사님이 어떤 역할을 하고, 그 분의 이력이 어떻고 지역사회에서 어떤 영향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 이를 드러내고 주장하여 서로 뜻을 합해야 한다는 주장에 나는 선뜻 가담할 마음이 없었다. 가령 노아가 방주를 짓고 사람들을 돌이켜 때가 이르렀음을 강조하며 세를 모으고 규합하여 뜻을 같이 할 사람들을 모았던가? 지금은 노아의 때와 같아서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눅 17:26-27).” 저들도 노아가 하던 일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뿐인가?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28-29).” 그러하기까지 저들은 전혀 악을 개의치 않았다. 누구의 막말을 지지하고 누구의 허황된 공약을 덩달아 뜻을 같이 하여 선동하면서, 저들 스스로도 말하기를 그것으로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이목을 끌어 자신들은 강연을 하러 다니며 먹고 산다고 하였다. 그러니 더 말해 무엇할까? 오늘 시인은 우리 입을 다물게 한다. “내가 입으로 여호와께 크게 감사하며 많은 사람 중에서 찬송하리니 그가 궁핍한 자의 오른쪽에 서사 그의 영혼을 심판하려 하는 자들에게서 구원하실 것임이로다(시 109:30-31).” 그 입으로 주께 감사하고 주를 찬양하는 것이 은혜라. 일찍이 바울 사도는 경계하였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1-5).” 곧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13).” 사람들과 어울린다는 데는 어쩔 수 없이 그런 시류에 편승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지혜자는 정리하였다. “또 내가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 보니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일을 사람이 능히 알아낼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알아보려고 할지라도 능히 알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알아내지 못하리로다(전 8:17).” 그토록 알아내려고 해도 알아낼 수 없던 복음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졌으나 저마다 외면하고 또는 그나마 조금 있는 관심으로 ‘어렵다. 난해하다. 지루하다.’ 하여 더 쉬운, 더 풀어서 아예 그림책으로 엮어놓은, 기호에 따라 말씀을 선별하는 시대가 온 것이니 이 또한 범람이다. 이 시대는 없어서 곤란한 게 아니라 넘쳐나서 주체할 길이 없다. 그러니 오늘 지혜자의 말처럼 “바람을 주장하여 바람을 움직이게 할 사람도 없고 죽는 날을 주장할 사람도 없으며 전쟁할 때를 모면할 사람도 없으니 악이 그의 주민들을 건져낼 수는 없느니라(8).” 어쩌겠나? “내가 찬양하는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시 109:1).” 악이 악한 줄 모르는 시대에 주여,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여 나의 중심이 상함이니이다(22).” 그러나 “내가 입으로 여호와께 크게 감사하며 많은 사람 중에서 찬송하리니 그가 궁핍한 자의 오른쪽에 서사 그의 영혼을 심판하려 하는 자들에게서 구원하실 것임이로다(30-3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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