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함정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전봉석 2020. 5. 15. 06:57

 

파수꾼이 이르되 아침이 오나니 밤도 오리라 네가 물으려거든 물으라 너희는 돌아올지니라 하더라

이사야 21:12

 

주 여호와여 내 눈이 주께 향하며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 영혼을 빈궁한 대로 버려 두지 마옵소서 나를 지키사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놓은 올무와 악을 행하는 자들의 함정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시편 141:8-9

 

 

말씀은 때로 어렵다. 입에 머금고 그 맛을 음미하는 데는 좋으나 이를 소화하는 일에서는 배탈이 나곤 한다.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10:9-10).” 쉽게 읽고 말 내용은 없다. 성경은 실제를 사는 실재다. 모든 이야기는 하나님을 드러낸다. 하나님을 멀리하거나 싫어하는 세상에 살면서, 그와 같은 이야기는 어떻게와 연결이 된다. 내가 뭘 어떻게 하려고 할 때면 영락없이 말씀은 거칠고 속을 볶는다. 그래서 나는 종종 성경을 술술 읽는 통독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저 그렇게 읽고 넘어갈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도 온통 경고다. 해변 광야에 관한 경고이고, 두마와 아라비아에 관한 경고다. 오늘 일련의 모든 사태와 벌어지는 일들은 들을 귀 있는 자들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다. 그저 유행하는 전염병의 하나가 아니다. 교육청 통계에 따르면 전염병이 돌 때 이태원을 방문한 교사들이 수백 명이 된다. 그 중 인천에 있는 한 강사의 거짓말로 수십 명이 감염되어 방역당국은 속수무책이었다. 명색이 교사가실은 작가들이 거짓말을 잘 지어내고, 종교적인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위선적인 경우가 많으며, 목사와 교사들이 임기웅변으로 말을 잘 지어낸다. 그 중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거짓말이 가장 나쁘다. 그래서 나는 특히 기독교인들이 정치에 가담하고 사람들을 선동해야 하는 일에 앞장서는 것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도 성경은 거칠다. 아브라함의 잘못과 다윗의 치부를 가감 없이 드러낸다. 야곱의 임기웅변과 베드로의 허풍을 감추지 않는다. 어떻게 저런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인일 수 있을까? 하는 대목에서는 종종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성경은 그래서 성령으로 읽힌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0).” 결국 우리가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의 이야기가 아니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9).”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우리는 다만 유구무언이라. 입은 있으나 할 말이 없다. 나에게 보이시고 이루시는 일에 대하여도 묵묵히 묵상하면 하나부터 열까지 주의 은혜와 은총이 아닌 게 없다. 필리핀 동생 목사와 통화를 하며 그간 고마웠고 감사하다는 뜻을 전하는 데 감동스러웠다.

 

서로는 아이에게 상처를 주지나 않았을까 염려하지만 상처 없이 이 생을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물며 부모는 자식에게, 자식은 부모에게,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가 되기도 하고 상처를 받기도 하면서 살아가는 일이다. 사춘기 한참 여린 성장기에 겪는 상처는 누구에게 독이 되고 누구에게 약이 된다. 상처 없는 사춘기는 없다. 모처럼 같이 모여 점심을 할 때 아들이 한 턱을 쏘고, 누이와 엄마가 나누는 학자금 대출 이자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 그것을 먼저 갚으라며 아들이 그간 모은 돈을 제 엄마에게 주었다. 학교 졸업하고 고작 일 년 반 직장생활을 하다 들어온 시간인데 삼천 정도를 모았다는 소리에 나는 기특하면서도 속상하였다. 그것을 올 초에 천만 원 제 엄마에게 주더니 이번에도 천오백을 선뜻 그리 내어주었다. 물론 당분간 공부를 해야 하니 먹고 사는 값은 엄마가 좀 책임지라는 소릴 하면서. 그동안 누가 다녀갈 때 용돈을 주고 또 받은 월급의 얼마씩을 모아둔 것이었을 텐데.

 

나는 그것이 대견하면서도 안쓰러웠고 기특하면서도 속상하였던 마음인데,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그 앞에 영적이란 표현을 쓰는 까닭은 관객이나 방관자가 아니라 참여자로서의 적극적인 표현이다. 가령 나는 언제부턴가 책을 읽을 때 영적 독서를 찾고, 권하고, 내세운다. 전에처럼 소설을 즐기거나 시를 읽으며 말랑거리는 어감에 감동할 수 없다. 동료 글 쓰는 친구들이 책을 자신들의 책을 보내오고 더러는 자신들이 출판한 유명한 작품을 보내오기도 하는데, 이상하게 잘 읽히지가 않는 것이다. 집중이 안 되고 전에처럼 재미가 없다. 문단의 갈채와 여러 호평에도 나는 시큰둥하니 읽다가 마는 게 수두룩하다. 미안하기도 한데 그와 같은 독서에서는 나의 참여가 결여되기 때문이다. 좋은 날에 외야석에 앉아 목청껏 응원하는 정도의 수준이랄까.

 

성경은 그런 우리를 두고 보지만은 않는다. 관여하여 참여하게 이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119:103).” 하는 말씀이 전에는 그저 밋밋하고 과장된 표현이라 읽혔는데 이제는 성경을 관통하는 주제이다. 단순히 아들애의 성장과 하나님이 다루신 과정으로 속단하는 말이 아니다. 어쩌다 우리 삶이 더 나빠지든 혹은 좋아지든 하나님은 항상 여전하시다. 여전하신 하나님 앞에 오늘 말씀은 경고와 기원을 당부한다. “파수꾼이 이르되 아침이 오나니 밤도 오리라 네가 물으려거든 물으라 너희는 돌아올지니라 하더라(21:12).” 우리는 지키는 자의 사명을 가졌다. 맡은 자의 입장이다. 내 것을 소유하는 이 땅의 원리하고는 어긋난다. 자식도 건강도 재물도 어느 것도 내 것이 아니다. 파수꾼으로 사는 삶은 안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130:6).” 우리는 다만 주를 기다림으로 간절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오늘 시인의 기도처럼 주 여호와여 내 눈이 주께 향하며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 영혼을 빈궁한 대로 버려 두지 마옵소서 나를 지키사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놓은 올무와 악을 행하는 자들의 함정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141:8-9).” 세상이 너무 혼탁하고 어지럽다. 자칫 탁류에 휩쓸려 떠내려가기 십상이다. 나는 가족들과 저녁에 가정예배를 드리며 기도하였다. 부디 우리에게 바른 분별과 온전한 삶의 자세를 허락하시기를. 특히 젊음을 사는 아이들에게 그 젊음이 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알게 하시기를. 그리하여 더욱 조심하고 귀히 다루며 청년의 때를 소중하고 값지게 살아가기를. 우리가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 필연적으로 육신의 생각을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겠으나, 한데 그 육신의 생각은 늘 하나님과 원수 되나니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8:7).” 우리 의지로는 굴복할 수 없는 일인 것을. 주의 긍휼하심만을 바라였다.

 

하나님에 대한 가장 바른 자세는 순종이다. 모든 참여는 순종에서 나온다. 선수들은 감독의 지시를 따르고 규칙을 준수한다. 군인은 모든 명령에 복종하며 자신을 앞세우지 않는다. 하물며 직장에서도 자기 맘대로 할 수 없는 것인데, 한 번뿐인 막중한 인생에서 자신을 주장하며 자기 취향을 선호한답시고 성적취향을 논하고, 사람의 성격과 각자의 기질을 먼저 운운하며 스스로가 주인 되고자 하는 세상에서,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3:3).” 그러하였던 나를, 또는 우리 아들을 주께서 이처럼 오늘에 두시고, 지난 십여 년의 시간을 떨어뜨려 감사를 알게 하셨으니. 사람의 의지와 욕망은 어떠해도 선할 수 없음을. 허황된 것으로 꿈을 정하고 적잖은 시간을 먼 길로 헤맨 나의 인생을 돌아보며, 부디 아이들의 생은 온전하여서 오직 주를 기쁘시게만 하기를.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4:17).” 그래서도 나는 이제 나의 남은 생에 더는 성경 밖의 삶에서 살지 않기를 위해 기도한다.

 

이렇듯 성경은 우리를 속속 성경 이야기 안으로 관여하게 하신다. 읽을수록 전부 내 이야기다. 나 들으라고 하시는 소리다. 내게 건네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그 이야기에 참여자가 되게 하신다. 이와 같은 새로움은 세상이 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나로 새롭게 하신 것이었으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3:5-7).” 그와 같이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57:15).”

 

주의 뜻하신 바 그 모든 선하신 일에 참여하는 자로서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 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141:2).” 그러므로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 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하지 아니할지라 그들의 재난 중에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5).” 하오니 주 여호와여 내 눈이 주께 향하며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 영혼을 빈궁한 대로 버려 두지 마옵소서(8).” 나를 지키사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놓은 올무와 악을 행하는 자들의 함정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