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희는 보고 들을지어다

전봉석 2020. 5. 12. 07:13

 

세상의 모든 거민, 지상에 사는 너희여 산들 위에 기치를 세우거든 너희는 보고 나팔을 불거든 너희는 들을지니라

이사야 18:3

 

여호와여 세상의 모든 왕들이 주께 감사할 것은 그들이 주의 입의 말씀을 들음이오며 그들이 여호와의 도를 노래할 것은 여호와의 영광이 크심이니이다

시편 138:4-5

 

 

믿음으로 천국에 가지만 믿음으로 지옥에도 간다. 자신은 믿는다고 하면서 그 믿음에 맞는 행실을 하지 못하고 살면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18:8).” 종종 누구와 대화를 할 때면 자신도 안다, 믿는다, 구원 받은 자요 선택된 자라 한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4-15).” 저에게 그리 이르며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도 받지만 믿음으로 구원을 저버리기도 한다고 일렀다. 다만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2: 14).”

 

뜻밖의 만남에서 나는 주의 이끄심만을 구하였다. 의도적으로 저의 말을 막았다. 구구한 사연을 들어줘야 하겠으나 그것이 면제부가 될까봐 먼저 주 앞에 직고 하고, 그러기 위해 자신을 직면하라고 일렀다. 흔히 우리의 말은 누군가의 동조를 얻으면서 더해지고 보태진다. 과장되거나 축소된 말은 극한 지경에서도 자신을 두둔한다. 아담은 나무 그늘에 숨어 하나님 앞에서 그러하였다(3:9-12). 누구 때문에 ‘~하여그리 되었다고 하는 말의 수순은 자기변명과 자기연민에 빠지기 십상이다. 그래서 나는 누구의 말을 애써 묻지 않았고, 나에게 먼저 하게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런 말이 하고 싶어서 강변역에서부터 온 것일 테지만, 회개가 먼저다. 하나님의 용서가 먼저다. 자기변명은 공연한 연민을 자아낼 뿐이다. 그래서 자신을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9:8).” 이미 우리의 만남은 그 증거가 된다.

 

나는 날마다 아이 앞에서 씨름한다. 해야 할 말과 말 사이에서 들어야 할 말과 말 사이를 오가며, 아이의 말은 고대 벽화의 상형문자 같이 난해할 따름이다. 그러니 나는 주께 자주 묻는다. 아이와 대화하면서 주를 부른다. 뭐라 나무라며 주를 바란다. 오후에 누가 왔을 때도 나는 저의 말을 가로막았다. 우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계시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1:6).” 그가 행하실 수 있도록 때론 가만히 또는 수다스럽게,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5:16).” 내가 살면서 주께서 쓸모없는 나를 어떻게 여기까지 인도하셨는지, 오늘의 나는 비루하고 천하기 이를 데 없으나 그 가치는 엄청난 값어치여서 이를 알려주고 비추는데 마음을 기울였다.

 

그래서 나는 전에처럼 누구의 눈물을 선호하지 않는다. 울려고 하면 울음을 다음으로 미루게 한다. 아니, 주 앞에서 울게 한다. 눈물만큼 우리 자신을 교묘하게 속이는 것도 없다. 본래 믿음이란 불확실성의 한복판에 서는 일이다.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하실 때 아무런 확신도 할 수 없었다. 아브라함은 다만 말씀을 의지하여 나아갔다. 나름 일흔다섯 해를 살면서 이제 확실한 생활의 기틀이 마련된 상태에서다. 어쩌면 노년을 준비하고 은퇴 후의 삶을 모색해야 하는 시기였다. 약속의 땅으로 간다는 것이, 자신이 살던 일가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간다는 것이 말이 쉽지 나름의 확실성에서 불확실성으로 걸어 들어가는 꼴이다. 다 늙어 선택할 일은 아니었다. 물론 저는 말씀을 따라 가다가 기근이 오고 어려움이 닥쳤을 때면 보다 확실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곳에 애굽이 있었다. 규격화된 종교와 나름의 격실과 제도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서열이 있는, 확실성의 세계다. 머리가 뛰어났던 솔로몬은 노년에 그와 같은 확실성에 자신의 노년을 걸었다. “전에 애굽 왕 바로가 올라와서 게셀을 탈취하여 불사르고 그 성읍에 사는 가나안 사람을 죽이고 그 성읍을 자기 딸 솔로몬의 아내에게 예물로 주었더니(왕상 9:16).” 저는 이방민족의 딸들을 첩으로 두어 안전을 도모했다.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11:1).”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보다 확실한 근거와 통계와 누군가의 경험을 의지한다. 사례를 들고 예시를 가지며 그것을 자료 삼아 보다 확실한 믿음을 추구하고자 한다. 그러나 믿음은 도전이다. 한 마디로 모호하다. 내가 이것을 계속 붙들고 의지하는 게 옳은가? 하는 의문은 거듭거듭 우리의 믿음을 도전한다. 믿음의 명료성은 우리 안의 확신뿐이다. 세상에서 이를 증명할 길은 없다. 사람들은 그 결과로 교회의 명성과 사람들의 숫자와 목사의 가시적인 영향력을 근거로 삼기를 즐겨한다. 그래서 어느 교회, 무슨 일, 어떤 선교 방식 등을 끌어다가 답습하려 한다. 또는 그리로 저리로 몰려다닌다. 그래도 어쨌든 눈에 보이는 뭔가, 손에 잡히는 확실한 무언가를 추구하는 것이다. 교회는 이를 주어야 한다는 강박증으로 성경공부도 세분화하려 실제적으로 분화시키고, 그것이 변화시킨 삶의 사례를 간증으로 모아 선두에 세운다. 이렇게 그렇게 된다는 확실한 종교의 자료가 애굽에는 많이 있었다. 아브라함 뿐 아니라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믿음을 저버리고 애굽으로 간 것은 그 때문이다. 저들의 종교는 시스템이 있었다. 잘 짜인 확실한 예식과 매뉴얼이 있었다.

 

그런 가운데 우리 안의 믿음이란 건 모호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불안해하며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나름의 신앙을 잘 키워보겠다고 애를 쓰는 누구를 나는 잘 안다. 저는 그래서 성경을 통독한다. 필사를 하고 자녀 교육을 잠언을 암기하는 데서 찾는다. 누구는 소금물을 뿌리고어디서는 인분도 먹인다.’ 모호한 불확실성보다 무모한 확실성이 더 나은 것이다. 세상이 미쳐 날뛴다. 전염병이 창궐하여 서로가 누가 서로에게 옮기고 전염될지 알 수 없는 판국에도 성소수자의 인권이 어떻고, 개인의 선택이 어떻고, 나름의 가치를 기치로 내세우며 우위를 점하려고 한다. 그러나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1).” 우리의 믿음은 결코 모호한 불확실성에 갇힌 게 아니다. 다만 믿음의 명료함을 거부하고 싶은 것뿐이다.

 

누가 말했다. 자신도 믿는다, 영생을 얻었고, 구원 받은 자인 것을 확신한다고 강변하였다. 그러니 어떤가? 저녁에 잘 때 기도하고, 교회는 안 다녀도 가끔 유튜브로 '어느 목사'의 설교를 들으며 예배(?)를 드린다고그것으로 자신은 믿음이 확실하다고 증명하려는 것인지. 나는 어쩌면 그래서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그 먼 길을, 아주 오랜만에 온 것일 텐데하지 못하게 하였다. 울지도 않게 하였다. 감정을 돋을 생각은 없었다. 그와 같이 하여 카타르시스를 풀려면 분위기 있는 야외에서 센티하게 먼 산을 보고 앉아 눈물을 찔끔거리는 정도가 더 낫다. 사람의 말을 듣거나 사람에게 말을 한다는 일은 저의 짐을 내 어깨에 옮겨지는 일이어서, 잠깐! 나는 저에 대해 어찌해야 하는지 연신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 주변 이야기에서 성경 이야기로 이끌었다. 말씀이 먼저다. 전에 같으면 들어주고 같이 울어주는 게 능사인 줄 알았을 텐데, 먼저 하나님께 직고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자신을 직면하고 회개하라고 일렀다. 통회와 자복을 기다리시는 데도 하나님 아버지의 인내는 긍휼하시다. 탕자는 이내 돼지우리에까지 이끌려서야 비로소 자신을 직면하고, 돌아가 아버지 앞에 직고하였다.

 

불확실한 믿음보다 확실한 종교생활을 선호하는 게 요즘 추세라, 다들 가시적인 참여와 독려를 마치 대단한 의로 여기는 것 같다. 그럴 바에는 애굽이 낫다. 세상이 훨씬 조직적이고 짜임새 있고 철두철미하다. 확실성에서 밀리면 기업은 도산하고, 가게는 망하고, 아이들은 우왕좌왕 한다. 어딜 가도 네이게이션이 있어 길 안내를 저것에 의지한다. 스쳐가는 길 위에서는 불안할 따름이다. 그러나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살후 1:11-12).” 우리는 기도라는 모호한 불확실성의 명료함을 의지한다. 그리하여 합당한 자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1:11).” 결코 우리의 신앙이나 믿음은 추상적이거나 개념적인 것이 아니다. 실제적이며 명료함이다. 그것의 원동력이 믿음이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12:1-2).” , 이 불확실성의 명징함이여. “세상의 모든 거민, 지상에 사는 너희여 산들 위에 기치를 세우거든 너희는 보고 나팔을 불거든 너희는 들을지니라(18:3).” 우리에게는 확실성보다 더 확실한 믿음이 있었으니, “여호와여 세상의 모든 왕들이 주께 감사할 것은 그들이 주의 입의 말씀을 들음이오며 그들이 여호와의 도를 노래할 것은 여호와의 영광이 크심이니이다(138:4-5).”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0) 2020.05.14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0) 2020.05.13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0) 2020.05.11
여호와를 송축하라  (0) 2020.05.10
여호와를 송축하라  (0) 2020.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