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며 환난 때에 우리의 구원이 되소서
이사야 33:2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시편 3:8
사람간의 일이라, 공든 탑은 여지없이 무너진다. 만물보다 부패한 것이 사람 마음이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애써 마음을 가다듬고 정중히 거절하며 거리를 두었다. 교회는 싫고 글방은 오겠다는 아이에게 나는 솔직히 자신이 없다고 말하였다. 늘 나의 기도는 주님의 마음을 달라는 것이다. 한 영혼을 사랑하는 일에 있어 사람이 그저 사람을 위하고 대하는 마음으로는 어림도 없다. 답답하고 쓸쓸하였다. 정주지 말아야지, 정들면 지옥이다. 누차 그리 마음을 먹지만 나는 병적으로 감정을 이입하고 감당하지 못할 마음으로 누구를 대하고 위하다 혼자 앓는 소리를 낸다.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며 환난 때에 우리의 구원이 되소서(사 33:2).” 오늘 아침은 이 말씀을 여러 번 되뇌며 주의 긍휼하심 앞에 무릎을 꿇는다. 곧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시 3:8).”
사람 볼 거 없다. 늘 그리 다짐하고 또 경계하면서도 번번이 나는 실망한다. 무슨 일인지, 나를 서술할 수 없다. 저가 옳은지 내가 옳은지 나는 분별하지 못한다. 나름 애쓰고 공들여 마음을 주고 온 터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 14:18).” 주의 말씀에 주목한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1).” 위로하심을 얻는다. 참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이상한(?) 아이들만 온다. 내가 이상한 것이 아니면 본래 사람이란 그런 것인지, 상대의 호의를 자신의 권리로 알고 친절과 마음씀을 마땅하다는 듯 여긴다. 그러다 지치면 저는 아무렇지도 않게 떠나고 나는 남아 혼자서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번번이 되풀이 되는 일이라, 내가 잘못된 것인지 저들이 이상한 것인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지, 나는 주의 이름을 부르며 말씀 앞에서 입을 삐쭉거리며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처럼 응석을 부린다. 사람 누구, 저들에게 말해봐야 알아듣지도 못할 암호 같은 말이 되었다. 오히려 내가 왜 그처럼 누구 때문에 애태우고 마음 쓰는지, 저들은 알 길이 없다. 하긴 나도 나를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니까.
추적추적 여름을 재촉하는 비가 내렸고 나는 공연히 우울하였다. 아들은 너무 공부에 전념하는 것 같아 속상하였고, 매일 오는 아이는 아무 것도 나아지는 게 없이 도돌이표의 연속이었다. 도대체 뭐 하고 있는 것일까? 엄마가 교회는 가지 말란다고 해서 안 온다면서 글방은 가도 된다고 해서 오겠다는 아이에게 그만하겠다고 하였다. 마음을 주고 생각을 두었던 만큼 서운하고 서러운 일이었다. 그 속셈이 뻔한데, 거짓말을 다 알아듣겠는데, 나는 아이를 나무라지 않았고 교회를 전제로 서로의 만남을 선을 그었다. 잘못한 일인지, 마음은 우울하였고, 나는 미안하고 불쌍한 마음으로 금세 후회도 되었지만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성경으로 다가가고 시작하였던 일인데,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이를 훼방하는 무리가 내 안에는 극성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닐 거였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0).” 아들의 노력에 대해서도 나는 그저 마음이 아프다. 그렇게 필리핀에서도 공부를 했으려나 생각하면 안쓰럽기만 하다. 정말이지 종일 공부만 한다. 쉬는 시간을 갖는 의미에서 당구라도 한 번 치고 오자 해도, 점심 먹으러 갔다 오는 시간 외에는 혼자 돌아앉아 이어폰을 끼고 인강을 듣고, 공부만 한다. 이런 말을 하면 다들 뭐라 할 테지만 나는 그처럼 열심을 다하는 일에 대해 공연히 마음이 아프다. 거의 말 한 마디 없이 그리 들어앉아 있는 모습이 슬프고 안됐다. 물론 시험을 준비하는 일이니까 그렇다고 하지만, 저녁을 먹고 가정예배 후에도 헬스를 다녀와서는 서둘러 다시 교회로 나가 새벽까지 공부하다 온다. 나는 새벽에 깨서 아들이 아직 오지 않았으면 마음이 쓰이고 속상하다. 그러다 잠결에 아이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깨어 일어나 앉는다. 너무 밀접한 나의 마음이 문제란 걸 잘 안다. 아들에게 뿐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나는 이처럼 너무 병적으로 밀착한다. 그러려니 하고 놓아두지 못하는 마음은 저 혼자 병이 난다.
아, “네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함이 네 보배니라(사 33:6).” 그러는 내게 말씀은 주를 경외함을 제시한다. 오직 주만 바라기를 가르친다. 사람 볼 거 없다. 정들면 지옥이다. 나는 여전히 사람과 이별하고 마음을 정리해야 하는 일이 끔찍이도 싫다. 아이가 그만두면 내가 병이난다. 과연 나의 이런 마음은 주가 주시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임의로 고집하는 것일까?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그럼 주의 성령의 일을 받은 것일까? 혼자 생각이 많았다. 지혜란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7-8).” 그러니까 이를 다시 읽으면 오늘 나를 여기에 두시고 이와 같은 갈등과 마음쓰임과 그래서 안쓰럽고 답답함은 숙명 같이 주께서 맡기신 사명이라는 소린가? 가령 내가 저 관두는(?) 아이로 인해 이처럼 우울하고 속상해할 게 뭐 있겠나? 것도 이번이 처음도 아닌데!
그럼에도 끌탕을 하는 것이면 이건 분명히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바라.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딤전 6:16).” 오직 주만 바라게 하시려고, 오직 주께로만 바르고 온전하게 하시려고, 나로 하여금 일부러 마음 끓이게 하신다. 나도 그러는 내 자신이 낯설고 이해하기 어려우니까. 오직 성령이 보이심이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0).” 그리 여겨 마음을 가다듬는다. 슬프면 슬픈 대로 견딜만하면 견디면서 묵묵히 또 무던하게 하루 또 하루를 살아가는 일이었으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 12:36-37).” 주님 앞에서만 하자. 누구에게 말한들 저들로서는 알 길이 없는 말이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34).” 이를 나는 아니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겠나? 누구보다 내 속을 내가 잘 안다. 미안함이든 속상함이든 그대로 안고, 벌어진 일에 대하여는 주께로만 아뢰자. “네 마음은 두려워하던 것을 생각해 내리라 계산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 공세를 계량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 망대를 계수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사 33:18).” 사람 속 다 똑같다. 위선부릴 거 없다. 수선떨 거 없다. 주시는 바 하루의 삶으로 족하다. 오늘은 이 사람으로 어제는 저 사람으로, 오늘은 이 일로 내일은 저 일로… “여호와는 거기에 위엄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리니 그 곳에는 여러 강과 큰 호수가 있으나 노 젓는 배나 큰 배가 통행하지 못하리라(21).” 주가 함께 하시는 일이라. 설령 내가 또 망쳐놓은 일이라 해도 주께서 도우시고 인도하심으로 “대저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이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라(22).” 오직 주만 바랄 뿐이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시 3:1).” 다윗의 서러운 통성기도가 들리는 듯하다.
그러나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4).” 이처럼 주께 아뢰는 일.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5).” 주만을 의뢰하는 일. 그리하여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6).” 됐다 그럼.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7).” 주께 호소함으로 입을 다문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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