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들의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펴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
이사야 31:3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편 1:1-2
개인이 파괴되고 가정은 붕괴되며, 사회는 혼란하고 나라는 극도로 양극화되며, 세계는 점점 더 자국주의로 치닫고 있는 이때에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오늘의 말씀은 우리를 말씀 앞에 불러 세운다. 겉으로는 아무 문제들 없는 것 같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산다. 기어코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며 산다(사 31:1). 실질적으로 아이들은 코로나19로 학교에 가지 않자 남아도는 시간을 주체할 수 없고 부모들은 저를 통제하기는커녕 자신들의 밥벌이로 전전긍긍한다. 한 집 건너 두 집이 이혼을 하고 두 집 건너 한 집에 우울증을 앓는 식구가 늘어간다. 전에는 암이 죽음으로 몰아갔으나 이제는 점점 정신분열, 양극성성격장애가 파국으로 몰고 간다. 그럼에도 애굽으로 도움을 청하러 가는 형국이니….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들의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펴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3).” 오늘 이사야의 진술은 뼈저린 것 같다. 정치 경제학은 이와 같은 난국을 학문을 갖춰 허망한 위로를 일삼아 곧 이 사회를 바로잡을 수 있으며 그럼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고 일갈한다. 심리학은 그런 우리의 성격을 개선하고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분석하면 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위로한다. 결국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지키고 고치고 보다 나은 미래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데, 나는 내가 어릴 적보다 더더욱 팍팍하고 살기 어려운 지경을 목격하고 있다. 복음은 그러한 환경에 좌우되지 말라고 이르신다. 복음은 이러한 사회를 다루지 않는다. 우리의 환경을 개선하고 보다 나은 삶을 제공하려는 데 목적을 두지 않는다. 사도행전 8장에서 복음으로 변화된 사람들의 특징은 전혀 나아진 게 없는 현실에서 달라진 사람으로 살아간다. 여전한 폭정과 가난, 절망과 위기의 현실 가운데서 박해를 받고 쫓겨 다니고 숨고 고통 가운데 지내야 하는 환경은 달라진 게 없는데도 사람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하였다!
곧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 1:1-2).” 오늘 다시 시작되는 시편의 첫 문장을 암송한다. 그 가운데 ‘오직’이란 부사가 눈에 띈다. ‘다른 것은 있을 수 없는’, ~만, ~뿐인 명사 앞의 ‘오직’이 오늘날 이와 같은 난제들을 들어 올릴 지렛대가 되어준다. 오직 말씀이다. 말씀으로 가장 나는 나다울 수 있다. 오직 기도로 우리는 가장 우리다울 수 있다. 말씀과 기도에는 묵상이 존재하고, 묵상은 우리의 삶을 견인한다. 곧 우리는 주변 환경들로 좌우되지 않는다. ‘오직’ 여호와의 말씀으로 즐거워한다. 이는 곧 일상을 사는 일이라. 함께 식사를 마치고 올라와 이런저런 담소를 나눴다. 손위 처남은 곧 정년퇴직이라 다음으로 뭘 하며 먹고 살아야 할지를 두고 말을 이었다. 노모는 식욕이 왕성하였고, 아내는 모처럼 친정식구들과 둘러앉아 오빠와 주로 이런저런 말을 이어갔다. 딸애는 일찍 서둘러 청년부 예배에 갔고, 아들은 모두 돌아가기를 기다렸다가 준비하는 시험공부를 하였다.
너무 조급한 것 같아 나는 불안하다. 형님도 아들도 우리 모두의 삶은 늘 쫓기듯 산다. 그러는 게 아니라고 말씀으로 전하였어도, 말씀과 일상은 괴리감을 더한다. 그러는 나의 말을 직업적인 말들로 듣고 마는지. 그러한 우리를 위해 주님이 기도하지 않으신다면 어떨까? 순간 아찔한 느낌이 들기도 하였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5-16).” 듣기는 들어도 삶으로 나타내기 어렵고, 알기는 알아도 일상으로 살기는 버겁기만 한 세상에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 이 모든 것을 만드시고 주관하시는 이가 내 편이시라. “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들이 물러가리니 이것으로 하나님이 내 편이심을 내가 아나이다(시 56:9).” 때론 힘에 겨워 마음이 어렵고 몸이 이겨내지 못한다 해도,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118:6).”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7).” 이를 의지하고 사는 것으로 나는 입을 다문다.
그리하여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6-17).” 이를 붙들고 분명히 의지하며 살 수 있는 것만이 살 길이다. 이는 곧 우리를 인격적으로 하나님께 향하게 하려 하심인데, 기도해야 한다.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눅 5:16).” 예수님은 기도의 본이 되신다.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6:12).” 누가는 아홉 번이나 그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서술하고 있다.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물어 이르시되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9:18).” 따로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 머무시던 예수님은 기도하신다. 그리고 우리를 이끌고 가신다.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28).” 곧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11:1).” 기도하시는 예수님이 기도를 가르쳐주신다. 그렇게 기도밖에는 답이 없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22:31-32).” 사탄이 우리를 밀 까부르듯 요구하는 세상이다. 애들은 애들대로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난리속이라. 그러할 때 예수님은,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41).” 그리고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44).” 기도는 우리의 남은 길이 아니라 우리의 전부다. 다른 더 나은 방법을 찾는 게 아니라 그 자체다. 누가는 이를 주목하였고 예수님의 기도를 관찰하고 기록하였다.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24:30).” 따로 떠나 있거나, 어디 한적한 곳에 있거나, 누구를 데려가거나, 가르쳐 이르거나, 음식을 나눌 때이거나… 기도는 말씀과 묵상이 나아가는 일관된 방향이다. 기도 없이는 말씀도 없고, 말씀이 아니면 기도도 없다. 이를 사도들은 예수님과 같이 있으면서 주목하였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 11:25).” 기도로 우리는 알뿐이다.
처남 형님은 은퇴 후 자신의 남은 생을 두고 어찌 살아야 하나 먹고 살 궁리에 여념이 없고, 조카 녀석은 6월까지인 현재의 한시적 계약직이 연장되기를 바라였다. 모두가 돌아가고, 주일은 쉬라고 해도 아들은 결국 교회에 남아서 공부를 하였고, 저녁을 먹고도 다시 교회로 올라가 밤을 지샜다. 모두가 불안하고 모두가 조급한 수상한 세월이다. 앞서 설교를 통해 증거 하였던 말씀은 거품처럼 사그라지고 당장 또 다시 먹고 사는 문제 앞에 우는 질식한다. 앞으로 뭘 해야 할지에 대한 불투명한 불안이 우리를 엄습한다. 그러할 때 예수님은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26:39).” 그리고 돌아와 우리에게 이르시기를,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41).” 이 아침, 나는 이 시점에서 다시 시편을 펼치고 묵상한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시편 1편),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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