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전봉석 2020. 6. 2. 06:10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당신이 이른 바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 하고 또 이르되 내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로다 하니라

이사야 39:8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시편 9:10

 

 

히스기야에 대한 여러 평가가 있는데 특히 그가 기도하여 죽을병을 고쳐주셨다, 하는 데에는 항상 주저하게 된다. 그리고 저가 한 일은 그 일을 축하하며 그 때에 발라단의 아들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가 병 들었다가 나았다 함을 듣고 히스기야에게 글과 예물을 보낸지라(1).” 저는 감동하여서인지 아니면 순간 흥에 겨웠던지 히스기야가 사자들로 말미암아 기뻐하여 그들에게 보물 창고 곧 은금과 향료와 보배로운 기름과 모든 무기고에 있는 것을 다 보여 주었으니 히스기야가 궁중의 소유와 전 국내의 소유를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는지라(2).” 이는 그저 실수라고 보기에는 너무 막중한 죄과가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진노하셨고 저로 인해 후손들이 벌을 받게 되었는데,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당신이 이른 바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 하고 또 이르되 내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로다 하니라(8).” 자기 생에서는 평안하니 되었다는 소리니죽었다 살아난 이가 그리 행한 것도 모자라 자신의 잘못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인지, 그와 같은 경고 앞에서도 통회하며 회개하려는 기미가 전혀 없어 보인다.

 

사람이란 그러니 얼마나 어이없고 가벼운지. 누가 일찍 전화를 하였다. 자기 교회에 누가 뜬금없이 교회를 나오지 않는다며 이유인즉 교회가 속한 교단에서 종교통합, 세계종교친선언약식, 3 성전 운동 하는 데에 동조하는 것 같아 이를 묵인할 수 없어 교회를 떠났다는 것이다. 그런 걸 어디서 들었는가했더니 유튜브에서 누구 강의를 들었고 한국교회 보수 교단들의 행태가 심각하다는 연사의 강론에 저도 동의하며 그리 교회를 떠나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저가 듣던 강의 유튜브를 보냈는데 대충 들어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번번이 성경구절 어디를 인용하여 문자적으로 적용하고 대비하는 것이 거슬렸고, 싸잡아 기성교회나 교단의 문제로 거론하는 방식이 무리가 있었으며, 특히 저의 야심찬-마치 자신이 선봉에 서서 그와 같은 적그리스도를 대적한다는 식의 어투나 자세가 민망하였다. 틀린 내용은 아니었고, 경각심의 차원에서 귀담아 들을 내용이기는 하였다. 그런데 그걸 듣고 기껏 신앙으로 양육 받던 교회를 헌신짝 버리듯 버리고 떠나 마치 고고한 듯 자신의 신념과 이상을 신앙의 정수인양 자신하는 저의 태도에는 오히려 그 싹수가 훤히 읽히는 대목이라 뭐라 더 다룰 말이 없었다.

 

그야말로 다들 난리다. 적은 적대로 이를 방어하고 정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쪽은 또 그쪽대로 그렇고, 어떠한 선동도 오히려 복음을 저해한다. 우린 모두 다를 바 없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2:1-2).” 감히 누가 선봉에 서서 복음을 지키겠다고 설치는가?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6:12).” 그러니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는 말에 한 번 찾아가 설명을 했고 그리 권하였으면 됐다. 저의 문제는 정작 교회의 문제이기보다 자신의 교만과 신념이 교회 위에 있는 게 문제인 것이다. 그런 일은 예수님 당시에도 있었고 그 이전에도, 사람의 역사 이래 없던 시절이 없다. 그런데 함께 신앙 생활을 하던 교회공동체는 그처럼 순식간에 매도되어 적대관계로 만들 정도이면, 그만큼 스스로 자신은 자신이 자신하는가?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1:14).” 그런 와중에도 하나님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고 계신단 말인가?

 

좀 더 들어보니 어쩐지, 학식들이 대단하였다. 여성도는 모 대기업 간부이고 부부가 다 빵빵한 학벌에 상위 1%로 사는 경우에서 자기 신앙에 대한 그와 같은(?) 의지와 믿음-신념이 있었다는 것인데. 그 속은 상처투성이라. 너무 신앙으로 좋은 가정에서 유년시절을 자란 신랑은 어릴 적부터 강압적인 신앙교육(?)으로 지쳐있었고, 아내 되는 이는 그렇듯 주변의 훌륭한(?) 믿음의 본보기들에게 번번이 뒤통수를 맞고 사기를 당한 경험였으니, 저들 안에 믿는 자에 대한 그릇된 판단과 왜곡된 경계가 교회를 불신하고 목사의 가르침에 늘 미심쩍어하는 것이었겠다. 그 이야기를 듣자 어쩌면 저의 반응은 자연스러운 것 같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저가 백옥 같이 성결한 신앙과 정금 같은 믿음을 소유하였다고 하나 사람은 역시 사람이다. 사람은 필연적으로 악하다. 우리의 선함은 기어이 주를 경배함에서 온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위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로 옷 입으셨나이다(104:1).” 이런 기도의 소유자는 어느 쪽이냐 묻는 세상에 대하여 그리 적대적으로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않는다. 부화뇌동하지도 않는다. 쓸데없이 쓸려다니지 않는다. 교회에 뿌리를 내려 자녀들까지 벌써 일 년 반 넘게 함께 했으면서 그런 유튜브의 강연을 듣고 순식간에 아무런 상의도 없이 무 자르듯 교회를 잘라 내동댕이치고 말 정도라면, 할 말 다 했다.

 

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 같이 치시며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바람을 자기 사신으로 삼으시고 불꽃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 땅에 기초를 놓으사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2-5).” 하는 말씀 앞에서 우리는 머쓱해진다. 영원히 흔들리지 않게 하신다는데, 그게 그렇게 미덥지 않아서, 그게 그냥 그러고 말 일이어서, 담임 목사에게 한 마디 상의도 없이 하다못해 같이 신앙을 나누며 동행하였던 옆 사람과 기도 한 번 나눔 없이나는 저의 태도에 더 어이가 없다. 종교화합을 운운하며 세계가 아무리 미쳐 돌아친다 해도, 교단이 아니라 국가적으로 이에 동조하며 함께 휩쓸려 적그리스도의 행태를 보인다 해도, 말세의 때에 나타날 징조로 이는 엄연히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물론 개탄하고 통회하며 나와 내 가족, 내 교회와 우리 곁에 허락하신 성도들과 함께 주의해야 하는 일은 분명한데저러는 거 보면 성도도 없고 교회 공동체도 없고 서로의 나눔도 화목도 어처구니없는 기형적인 신앙이 더 문제다. 스스로 독야청청하여 홀로 고결하다는 것일까? 요즘은 참, 뭐라 할 엄두가 나지 않는 경우들이 여럿이어서.

 

옳고 그름을 떠나 인간에 대한 예의도 상실됐다. 관계는 무색하고 교회는 일개 모임의 집단으로 전락했다. , “주께서 주신즉 그들이 받으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그들이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28-29).” 하면 우리는 죽어 먼지로 돌아갈 따름인가? 나는 오늘 아침 히스기야를 보며 저의 기도 응답이, 그래서 죽을병에서 나음을 받은 15년의 생이 과연 축복일까? 하는 데 다시 또 회의한다. 이를 강조하며 기도하면 응답 받는다는 식의 가르침은 옳지 않다. 병고침 받고, 15년 더 연장하여 그 생명 다하기까지 먹고 마시고 행복을 누렸다 하자. 혹은 역사에 길이 남을 대단한 업적을 남겼다 하자, 그러느라 악을 동조하였고 그 근원을 넓히는 일이었다면, 과연 저의 병고침 받은 기도 응답이 축복이란 설교가 옳기만은 한 것일까? 이어지는 말씀에서 나오겠지만 저가 그때에 나은 아들이 후대에 가장 악랄하고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고 민족의 신앙을 훼손한 무시무시한 므낫세 왕이었다는 사실 앞에 아찔해야 한다. 그리하여 저들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였다.

 

그런 경고에 히스기야는 그래도 좋댄다.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당신이 이른 바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 하고 또 이르되 내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로다 하니라(8).” 뭐라 할 말이 없는 대목이다. 주의 긍휼하심 앞에 무릎을 꿇을 따름이다.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감히 주의 영광 앞에 설 수가 없다. 부끄럽고 송구할 따름이다. 그러할 때 시편의 기도는 어김없이 바른 자세로 교정한다.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9:1).” 오직 감사로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존하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2-3).” 저는 보복하시는 이시고 갚아주실 이시다. 내가 선봉에 서서 나를 따르라, 외칠 수 있는 신앙의 주체가 될 수 없다. 다윗도 바울도 모세도 그런 이가 아니었다. 오히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10).” 이를 알기에 알면 알수록 더욱 주를 의지할 따름이다.

 

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주 앞에서 심판을 받게 하소서(19).” 인생은 죄악 뿐이라. 너는 어느 쪽이냐? 묻는 세사에서 이쪽이 덜 하냐, 저쪽이 더 하냐? 그게 문제가 아니다. 부디 여호와여 그들을 두렵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자기는 인생일 뿐인 줄 알게 하소서 (셀라)(2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