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전봉석 2020. 6. 3. 06:03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이사야 40:8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시편 10:17-18

 

 

책 읽기의 어려움에 대하여는 굳이 말할 게 없다. 마치 공부하는 아이는 해도 해도 끝이 없어 늘 조금밖에 못 했다.’ 하고, 공부 못하는 아이는 조금만 하고도 엄청 한 것처럼 다 했다.’ 한다. 책 읽는 사람은 읽은 걸 또 읽어도 책을 안 읽는 사람은 몇 분 훑어본 것으로 전부 다 읽었다고 생각한다. 또는 기억이 안 나서 들추다가 대충 기억이 나면 읽은 것으로 간주하고 덮어버린다. 책 읽는 사람은 읽기 전과 읽고 난 뒤 달라진 자신을 느낀다. 한 문장이 주는 또는 어떤 내용이 저의 삶을 송두리째 뒤엎는 경우를 느낀다. 이를 요약하고 암송하고 묵상하기도 한다. 요즘은 말씀에 대해 더욱 생기는 마음이어서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40:8).” 이와 같은 구절의 말씀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 성도의 삶은 외치는 자의 소리같은 것이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3).”

 

이는 세례요한이 받은 말씀이고 평생을 두고 되새기며 묵상하는 문장이었다.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1:23).” 곧 사역자란 그처럼 소리로 있다 없어지는 존재이면 족한 것이다. 굳이 누구 뇌리에 각인되어 저의 선생 또는 존경하는 자로 남는 일은 두려운 일이기도 하다. 목사가 두각을 나타내고 어느 교회 하면, 저가 그 대표하는 상심으로 어느 목사님 교회, 하고 사람들이 몰리는 것에 나는 주의한다. 종종 누가 이야기할 때 말씀보다 그 말을 전하는 자의 이력을 두고 강조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그럴 수 있고 그럴 수밖에 없는 경우의 말하기 방식이지만, 나는 종종 누구에게 잊히는 일에 새삼 의미를 둔다. 어느 순간 한 아이가 그쪽 나가는 교회를 자연스럽게 우리 교회라 호칭하고, 목사님을 우리 목사님이라 부를 때면 소외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딸애가 종종 그런 표현을 쓰거나 그런 말투로 이야기할 때면 나는 바보처럼 서운하기도 하다. 그러다 오늘과 같은 말씀은 나를 돌이켜 주 앞에 바로 세우신다.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사 40:6).”

 

나는 다만 말하는 자의 소리이고 외치는 자의 소리이면 족한 것이다. 곧 우리의 목적은 다른 것이다.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3:3).” 주의 길을 준비하는 것, 내가 저 아이를, 내 앞에 있는 이 한 영혼을 마주하는 일은 주가 행하실 일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런 그에게 내가 기억되고 나를 따르듯 나와 함께 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그릇된 감상일 수 있고 자칫 서로의 의지가 잘못될 수 있다. 나는 이를 자주 목격하였다. 목사와 성도 사이가 그러해서 좋을 땐 간 쓸개 다 빼줄 것처럼 굴다 등을 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더 부담스러워 얼굴도 안 보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그렇듯 갈리고 뜯겨 더는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되어야 비로소 참여하는 자의 삶이 된다. 우리가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주를 기념하는 것처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삶에 거하시는 일처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사 40:4-5).”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7).”

 

주신 날을 살아서 주께 화답되는 삶이란,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8).” 말씀만이 온전하게 세워지는 일이다. 그렇다보니 지나친(?) 성경공부가 사회의 이목을 끌고 다소 기이한 현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그러한 우리의 종교행위가 자칫 말씀의 의도를 왜곡시킬 것만 같아서, 나는 요즘 뉴스에 교회가 거론될 때면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어디 소규모 교회의 부흥회가 또는 그에 따른 예배방식이 세간의 이목을 끌 때마다 우리의 지나침(?)이 그릇된 현상으로 비춰지는 것 같아서 두려울 때도 있다. 나는 어제 <하나님의 영광>이란 주제를 가지고 설교초안을 작성하다 내내 그처럼 생각이 많았다. 저마다의 영광을 바라며 사는 세상이다. 누구는 돈의 영광을 바라고, 누구는 출세와 성공의 영광을 바라고, 누구는 권세의 영광을 바라고, 누구는 자신의 신념과 만족의 영광을 바란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6).” 하는 말씀 앞에서 주의하게 된다.

 

저마다의 자랑이 영광이다. 과시다. 우쭐하며 으뜸으로 내세우고자 하는 현실에서의 이상이다. 꿈이고 목표다. 누구는 값비싼 차를 몰며 명품을 들고 큰 집에 살며 나름의 영광을 누린다. 하다못해 이생의 삶에서도 그러하다면 그리스도인으로 살며 우리가 바라는 내세의 영광은 과연 무얼까?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고 사는 삶이란, 오늘 이사야서의 말씀처럼 그저 흩어지는 외치는 자의 소리여도 족한 것이다. 내가 으뜸이 되고 내가 주목받는 생이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엄연히 종교인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종교인이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신앙과 믿음이 종교화되어서는 안 된다. 종교는 사람이 신을 찾는 것이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직접 지으시고, 찾으시고, 만나주시는 존재이다. 여기서 종교화합이니, ‘세계종교 친선 언약식이니, ‘3 성전이니 하는 따위의 운동은 그야말로 적그리스도의 행태이다. 분명히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것이지 우리가 기를 쓰고 그의 가운데 거하는 종파가 아니다. 어떤 부흥회니, 무슨 운동이니 하는 데에 나는 다소 주의를 기울이는 까닭은 그래서이다. 그처럼 죽어라 하고 열심을 다하는 일에 대해 나는 경계한다. 성경은 말하길,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7:16-17).”

 

우리는 이 모든 것에서 자유하다.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18).” 다만 주를 경외하기 때문이다. 모세는 주를 바라며 주의 영광을 바랐다.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33:18).” 당시 백성들이 그릇된 길로 행하여 하나님을 거스를 때였다. 우리가 바라는 영광은 이 세상의 영광이 아니다. 오직 독생자의 영광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설교 본문이 시편 19편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주제로 삼게 하셨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1).” 모든 만물이 주를 찬양하며 우러른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 궁창은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낸다.’ 시인은 이를 노래하고 있었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우리는 과연 무엇을 말하는 자의 소리인가? 그러할 때 시인은 2연에서 말씀의 순전하심에 대해 노래한다(7-10).

 

말씀은 완전하여 우리 영혼을 소성한다. 그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우리를 지혜롭게 한다. 말씀의 교훈은 정직하여 우리 마음을 기쁘게 한다. 말씀은 순결하여 우리 눈을 밝게 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 말씀은 정결하여 우리로 영원까지 이른다. 여호와의 법, 말씀은 진실하여 다 의로우시다.’ 이를 앎으로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하고,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다고 느끼고 누릴 수 있는 것이 성경, 책 읽기다. 책 읽기의 즐거움은 글쓰기의 고단한 달콤함보다 내밀하고 농밀하다. 아들은 앞에 앉아 종일 공부만 한다. 지겹지 않니? 하고 쉬면서 하자고 무얼 요구해도 녀석은 씨익, 웃고는 도로 책상에 앉는다. 어떤 목표가 있는 것이다. 이 땅에서의 꿈도 우리를 붙들고 우리 가운데 거하는데하물며 그리스도인으로 산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한다면느끼지 못하고 누리지 못한다면그러면서 그저 남의 이야기 하듯 누가 그러는데, 우리 교회 목사님이 그러는데하는 식의 수동적인 삶으로 그친다면! “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19:11).” 나는 여기에서 말씀의 엄위하심을 붙들었다.

 

그렇게 하루는 금세 흘러갔고, 하나님은 나에게 아들 녀석과 떨어져 있던 시간을 이처럼 몰아서 함께 하게 하시는가? 하는 생각을 하며 뿌듯하였다. 늘 혼자 들어앉아 그러고 있던 내게 같은 공간에서 책을 보고 그야말로 공부만하는 아들과의 시간이라니! 오후께는 문득 드는 생각이 하나님이 참 내게 복을 많이 주신다, 하는 생각을 하였다. 다만 말씀 앞에서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12).” 그리하여 더욱 주를 의뢰할 따름이다. 세상 어디 기댈 게 못 된다. “귀인들을 폐하시며 세상의 사사들을 헛되게 하시나니 그들은 겨우 심기고 겨우 뿌려졌으며 그 줄기가 겨우 땅에 뿌리를 박자 곧 하나님이 입김을 부시니 그들은 말라 회오리바람에 불려 가는 초개 같도다(40:23-24).” 그러므로 더욱 주를 바라고 구할 뿐,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10:1).”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악할 뿐이라.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압박하오니 그들이 자기가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2).” 저들, “그가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의 얼굴을 가리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 하나이다(11).” 그러한 세상을 향해 무엇을 외치는 자로 살아야 하는가?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17-1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