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예레미야 2:13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
시편 38:21-22
모두 불안한 눈빛으로 서로를 살폈다. 한 사람은 자꾸 말을 걸고 돌아다녔고 직원은 이를 제지하지 못해 난감해하였다. 혼자 궁싯거리는 소리에 다들 불안해하였다. 불안하고 초조한 공기는 서로의 눈치를 살피게 된다. 정신과 대기실은 언제나 시간이 더해져도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의사의 처방은 늘 같은 말의 반복이었고, 나는 다른 곳으로 옮겨야지 하면서도 다시 저에게로 다녀왔다. ‘둘 사이에 끼었다.’는 바울 사도의 표현이 종일 뇌리에 맴돌았다.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3-24).” 즉 사는 일과 죽는 일 사이에 끼인 상태가 오늘의 우리 형편이 아니겠나? 저의 이와 같은 말의 의도는 복음의 일과 이를 전하는 일에 있어서 서로 대치되는 것을 부각시킨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20-21).” 나는 이 말씀을 내게로 가져와 음미하기를 좋아한다.
곧 나의 나 된 것으로 이제는 그리스도가 나타나기를. ‘나의 이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전에는 부끄러워하고 열등감에 사로잡혀 감추고 싶어 하던 것들까지도,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살 수 있게 된 것은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나의 이러한 구구한 사연이나 살아가는 모습이 누구에게는 본이 되고 산 소망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되어,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가 되기를. 그렇다면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하는 것인데,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22).” 하는 바울 사도의 난감함을 가만히 되새겨보게 되는 것이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덧붙이자면 종종 드는 열패감은 가족들에게 미안하고 누구에게는 짐이 되는 것 같은 자격지심에 사로잡히게도 한다. 어쩌면 나는 아주 어릴 적, 더 오랜 시간동안 내 안에 누적되어온 ‘무의식의 나’로 ‘오늘의 나’를 자극하고 억압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듯 무거운 짐짝처럼 이고 지고 살던 것들에서 이제는 ‘내 일의 열매’를 생각하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한 것이 오늘의 나를 충동하여 더욱 예민하고 불안하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굳이 의사의 이런 설명이 아니더라도 나도 안다. 그렇듯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23-24).”
나는 그렇게 저 말씀을 되뇌며 오늘의 나를 수긍하고 주의 살아계심과 그의 인자하심을 붙든다. 곧 나는 정신과 대기실에 앉아 유난히 몰린 다른 환자들의 천태만상을 지켜보며 저들의 초조한 영혼을 짐작하고 가늠하였다. 덧붙여 바울의 진술을 되새기면, 유독 언제부턴가 내 주위에 ‘이런 고초’를 겪는 이들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전혀 안 그럴 것 같은 누군가 뜬금없이 공황을 호소하고, 누구는 불안과 싸우면서, 실질적인 ‘나의 사례’를 저들의 경우와 비교하여 동의를 얻고 동조를 구하기도 한다. 농담처럼 누가 말하길, 이것도 전염이 되는가? 하고 묻는데 그야말로 ‘웃픈’ 현실이다. 여기에서 바울의 다음 언급이 더욱 와 닿는다면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일까?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25-26).” 실제 나도 내가 이런 목회자로 살줄은 몰랐다! 억지춘향으로 끌려와 이 길을 가는 것 같지만 가만히 돌아보면 아주 오래 전, 내가 한참 어릴 적부터 내 안에는 주의 사랑과 인자하심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그래서 나에게는 ‘택자’니 ‘불택자’니 하는 직설적인 용어에 대한 거부감이 그리 크지가 않다. 이는 엄연히 우리 사람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창조주 하나님에 의한 저의 경륜과 섭리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일이라, 내 의지와 선택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리브가의 난감하였을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를 한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창 25:23).” 저가 아이를 낳기도 전에 이미 정하여진 이와 같은 일에 대하여, 어미로서 한 여인은 이 말씀을 어찌 평생 동안 받아들이고 살 수 있었을까? 어릴 땐 아니 하나님을 멀리하고 외면하며 살고 싶을 땐 나의 나 된 것이 저주만 같아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더했었다. 해도 해도 감당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하여는 부모를 원망하기도 하고 스스로를 탓하며 열등감, 열패감에 사로잡히기도 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내 비록 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음에도 이처럼 주의 자리에 세우시고 이 복된 말씀으로 이끄시니, 나는 이제 오늘과 같은 말씀 앞에서 절규한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특정하게 누구에게만 그렇다는 게 아니라 저마다 하나님을 저버리고 사는 생이라!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시 38:21-22).” 나는 이 아침 다윗의 호소와 기도를 읊조리며 내 곁의 누구를 생각한다. 의식의 흐름을 주체할 길 없어 저마다 ‘답이 없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아이를 생각한다. 저들의 병명과 그 발병 원인을 운운하려 드는 일은 모두 헛되다. 다만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2:19).” 이와 같은 말씀에서 주의 음성을 듣는다. 그러니 이제 나는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 하고 주를 더욱 바란다. 말 그대로 이 세상은 다 그렇다. '코로나19' 전염병으로 하루 4만 명의 확진자가 발생하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해변에 와글거리고 거리로 쏟아져 나와 ‘노아의 때’와 같이 흥청망청 그 심각성을 외면한다. 이것이 단지 미국만의 일이겠나? 우리 안의 죄의 속성이 그러해서 자신의 유익과 자기안위와 자기만족을 우선으로 하려 드는 것인데,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히 13:14).” 이 땅에는 있을 수 없는,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또는 감사하자(12:28).” 내 안에 두시는 ‘흔들리지 않는 나라’가 있었으니, 비록 지금은 거류민과 나그네에 불과한 삶이겠으나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내 안의 정욕을 제어하고,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또는 감사하자!
나 역시 같은 처지에서 정신과 대기실에 앉아 불안하고 초조한 눈빛으로 저들과 같이 서로를 살피고 있었으나 그러므로 나는 주의 사랑과 은혜를 더욱 선명하게 느끼고 구할 수 있었다. 급기야 누구는 시비가 붙어 애매한 사람을 붙들고 언성을 높이는데, 직원들은 익히 저를 잘 아는지 얼른 담당의에게 묻고 무슨 알약을 얼른 가져다가 저에게 먹였다. 나의 일상이 참으로 기묘하다. ‘흔들리는 나라’에서 초조한 ‘거류민과 나그네’와 같은 영혼으로 살면서 ‘거슬러 싸워야 하는 육체’ 가운데 살아야 하는 일이었으니. 사는 일과 죽은 일, 이 둘 사이에 끼인 형국이라. 얼결에 지하 3층까지 내려가 주차를 하고 숨을 헐떡거리며 초조하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또는 불안하게 그곳을 빠져나오면서… 고단한 일상에서 나는 주의 갑절의 은총을 누리는 셈이었다. 곧 나는 이제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4-10).” 나의 하루에서 많이 견딘다. 이어지는 괴로움들이 서러울 때도 있다. 그런데 그런 가운데서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산다! 아, 그러니 종종 나도 나의 삶에 속는다. 날자, 우울한 영혼이여!
오히려 이 땅은 예레미야서의 서술처럼 “그러나 너는 말하기를 나는 무죄하니 그의 진노가 참으로 내게서 떠났다 하거니와 보라 네 말이 나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다 하였으므로 내가 너를 심판하리라(2:35).” 또한 “네가 두 손으로 네 머리를 싸고 거기서도 나가리니 이는 네가 의지하는 자들을 나 여호와가 버렸으므로 네가 그들로 말미암아 형통하지 못할 것임이라(37).”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나는 이제 두려워 돌아본다. 행여 내가 아직도 하나님 아닌 다른 것으로 위로를 삼으려 드는 게 있는가? 아, 주여!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내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시 38:4).” 나는 다윗의 절규와 같이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께 호소한다.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내가 우매한 까닭이로소이다(5).” 또 때로는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픔 중에 다니나이다(6).” 그러나 그 가운데서 주의 은혜가 넘치게 하시는 것이었으니, “여호와여 주의 노하심으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고 주의 분노하심으로 나를 징계하지 마소서.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1, 9).” 그리하여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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