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오직 네 죄를 자복하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고 네 길로 달려 이방인들에게로 나아가 모든 푸른 나무 아래로 가서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 3:13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시편 39:7
‘신이 없다면 도덕적 의무도 없다.’는 도스토옙스키의 말이 떠오른다. 신이 없는 삶은 도덕적일 수 없다. 이를 감안할 때 그런 점에서도 기도는 도덕적인 양심의 일과는 무관하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롬 2:14-15).” 곧 우리는 누구나 죄인이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3:9-12).” 마치 나는 좀 괜찮은 듯 내가 그래도 선을 좇고 산다고 여긴다면, 오늘의 말씀이 크게 와 닿지는 않을 것이다. “너는 오직 네 죄를 자복하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고 네 길로 달려 이방인들에게로 나아가 모든 푸른 나무 아래로 가서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3).” 그럴 때마다 우린 여기저기 도움을 구해 기웃거린다. “작은 산들과 큰 산 위에서 떠드는 것은 참으로 헛된 일이라 이스라엘의 구원은 진실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있나이다(23).” 그렇게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시 121:1).” 하면서 말이다.
성경은 일갈한다.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2).” 다른 데 기웃거려봐야 소용없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39:7).” 오늘 다윗의 고백이 내 것이다. 요즘은 하루가 아침 이 한적한 시간으로 모아진다. 아들이 오고 새벽 4, 5시까지 공부하다 오는 시간에 맞춰 자리에서 일어난다. 전날에 읽은 책이나 누구와의 만남, 통화 따위의 것을 메모한 것들이 책상 위에 펼쳐지고 그 위에 성경이 놓인다. 오늘은 어떤 말씀으로 찾아오실까? 하는 기대가 있다. 이를 들고 매일 같은 시간에 교회로 나가 써둔 묵상 글을 다시 읽으며 오전을 보낸다. 아이가 오고, 요즘은 내가 뭘 할지, 뭘 하려고 하는 것을 최대한 줄이고 아이를 있는 그대로 맞이한다. 전날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글을 쓰고 성경을 옮겨 적고 그림을 그리고 같이 순서에 따라 성경을 읽고 점심을 먹고 산책을 조금하다 돌려보낸다. 조금 있으면 아들이 새벽에 잠들었다가 일어나서 올라오고 종일 또 공부를 한다. 단조롭기만 한데 새롭다.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하는 다윗의 고백은 뒤에 이어지는 신뢰 안에서이다.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내가 저 아이에게 또는 아들에게, 어제 모처럼 통화한 친구에게 무엇을 꼭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존재함으로 실제 한다.
실제는 실재로 나는 친구에게 그대로 안일하여질까, 염려를 아끼지 않았다. 코로나19 사태로 기껏 교회로 인도하심을 받고 성경으로 자신을 무장하던 것이 멈추고 말았다. 그는 말하길 ‘넘어진 김에 쉬어 가는 거지!’ 하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예전처럼 생활하는 것에 별로 개의치 않다는 듯 말하였다. 성경도 주석성경으로 사고, 아내와 성경공부도 하고 다니고, 주중에도 묵상하다 이해 안 되는 부문을 묻곤 하던 것이 동시에 다 막혀버린 거였다. 나의 우려에 예전 말투로 ‘다 그런 거지 뭐’ 하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다 불쑥 한다는 소리가 ‘너도 별로 하는 건 없잖아!’ 하고 되돌려주는 말에 특유의 저의 당돌함을 모처럼 느꼈다. 이런 게 마음에 얹혀 종일 속상하고 답답하였다. 아이를 대하는 일에서도 그렇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데서 나는 주의 도우심과 긍휼하심만을 구하였다. 그러니 오늘 예레미야의 설교가 나를 고개 숙이게 한다. “너는 오직 네 죄를 자복하라.” 저의 이런저런 삶의 모양에서 나는 주의 심판을 생각하였고 두려움을 느끼고는 하였다!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고 네 길로 달려 이방인들에게로 나아가 모든 푸른 나무 아래로 가서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음이라.” 그때 우리는 그렇듯 살았다(렘 3:13). 주의 도우심을 바란다는 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 14:23).”
그저 그런 동행은 없다.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24).” 하물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도 그러한데 내가 주를 믿고 주의 자녀로 산다고 하면서 아무렇지 않고 대수롭지 않은 정도이면, 과연 어떤 사이일까? 하다못해 오전에 오고 가는 아이도 마음이 쓰여 그 무게로 힘에 겨울 때가 있는데…. 그러므로 “내 마음을 주의 증거들에게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하지 말게 하소서(시 119:36).” 다시 예전 생활로 돌아가기야 하겠나만 어떤 느낌, 나는 저의 특유의 무가치한 듯 한 자세, 모든 게 다 그렇지 뭐, 하는 식의 말에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일찍 통화를 끊었다. 사는 동안 인생에 두시는 여러 증거들이 있는데 이를 그저 그러려니 하고, 농담으로나 듣고 말면 허사라. 나의 우려하는 말에 ‘다 그런 거지 뭐’ 하고 얼른 치워버리려는 대꾸에 더는 보탤 말이 없었다. 한동안 성경을 재밌어 하고 궁금한 것을 묻고 자신의 생활을 성경 앞으로 바로 하려 하더니만. 안타까울 뿐 ‘너도 별로 하는 건 없잖아!’ 하는 말에 나는 말문을 닫은 것이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32).” 저의 말 뒤에 간단하게나마 이 말씀을 전하고 그 의미를 설명해주었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 39:7).” 같은 말씀을 여러 번 되뇌며 주를 바란다. 세상에서는 우리가 환난을 당하나 그리하여 주님은 말씀하셨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무엇을 하고 안 하고, 덜 하고 더 하고의 차이가 아니다. 우리의 곤고함을 어디에 하소연하는가?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시 22:24).” 며칠째 들고 있는 본문에서 설교원고 초안을 작성하다 문득 드는 생각은, 우리의 능력은 ‘상한 심령’이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51:17).” 즉 도움이 어디서 올까, 하고 “작은 산들과 큰 산 위에서 떠드는 것은 참으로 헛된 일이라 이스라엘의 구원은 진실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있나이다(렘 3:23).” 누가 무엇을 얼마나 하고 안 하고, 이루고 못 이루고 하는 따위의 문제가 아니다. 성공과 실패, 만족과 자족함의 바탕이 그저 ‘다 그런’ 데서 찾으려고 한다면 이는 오산이다. ‘다 그렇지 뭐’ 하는 말과 ‘너도 별로 하는 거 없잖아’ 하는 말의 바탕에는 자신을 돌아보아 그 죄를 자복하려는 의지가 없는 것이다.
‘내가 뭘, 이 정도는 다들…’ 하는 안이함이 우리 영혼을 좀먹고 있다. 대수롭지 않게 몸에 밴 습성들이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농담으로나 듣고 마는 것이다.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창 19:14).” 아들의 일자리를 위해 여기저기 디밀고 서류를 더해 애태울 줄은 알면서도 정작 그러한 아들을 맡기신 이의 의도는 아랑곳하지 않으려 하는, 그러면서도 그 안에는 ‘내가 이만큼 주를 믿는다’는 확신을 가지고 사는 데 있어 코로나19로 모든 게 정지된 상태이다. 본인이 자처하여 큰 교회 뒷자리를 선호하였으니, ‘온라인 예배’에 그리 크게 의미를 두지 않고 있는 주일의 풍경은 우리의 태만한 신앙을 잠식하고 있는 것이다. 왜 하나님은 고난을 두실까?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 성경의 권고가 의아하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니! 고난을 좀 덜어볼까 하고, 위로함을 얻기 위해 교회를 찾고 성경도 알고자 했던 것인데, 수화기 저편의 친구는 삐딱하게 앉아 입을 삐죽 내밀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귀담아 듣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아이엄마는 ‘그저 그러려니’ 자기 본의의 신앙태도를 그대로 두고 정작 하나님은 돌아보려하지 않는 것이다.
누구와 조금 거리를 두는 까닭도 저는 내게 듣고자 하고 얻고자 하는 것이지, 성경의 위로와 말씀으로의 인도가 아니었다는 데서! ‘인간적으로 나누는 관심과 정’이었고, ‘형이 좋아서 헌금도 하고 성경공부도 간 것이지, 굳이 하나님과는…’ 하는 식의 태도에서, 앗! 저마다 하나님에 대해 알고자 하면서도 하나님은 달갑지가 않은 것이다. 마치 칼빈에 대해 재밌게 읽으면서도 칼빈의 글은 고리타분하고 매일 그 소리가 그 소리 같아서 영, 읽기가 힘든 나의 독서태도처럼! 성경에 대해서는 알아가는 것이 재밌는데 성경으로 사는 건 좀 아니다 싶은 저들의 자세에서… 그래서 누구에게는 더 길게 말할 수 없었고, 누구와의 만남은 내가 아닌 주를 의뢰하게 하려 거리를 두는 쪽이 나은 것이고, 이와 같은 ‘내버려둠’이 자꾸 들쑤시고 뭐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나의 조바심을 유발하고 있는데, 한동안 아이엄마에게 가졌던 마음도 나야말로 선을 긋고 주저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겠나? 요즘은 아들에게 하고 싶은 말도 설교 시간에 말씀으로 전달하는 것 말고는 가급적 말도 않는다. 아이에 대한 조바심도 억제한다.
그 자리에 말씀을 주셨다. 성경으로 내게 말씀하시는 데는 몇 가지 원리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인내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 무엇으로 보상을 바랄까? 하고 인내하는 것이 뭐라도 하려고 바동거리는 일보다 어렵다. 성도의 인내는 가치 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2).” 곧 우리의 견딤은 구원의 대명사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3).” 나도 나에게 다그치지 않는다.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딤후 2:12).” 참고 주신 날에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하는 일이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히 3:13).” 모든 일의 시작은 주가 하셨다. 내가 임의로 한 게 아니다. 교회를 여기에 두신 것도, 이제 나는 모른다. 교회 앞 나란히 하는 공실에 성인도박오락실이 들어왔다. 노래방이 나가 다행이다 했는데, 사람이 밤낮없이 들락거리며 은밀하고 칙칙하다. 그러니 내가 어쩔 것인가? 마음이 심란하지만 이 일도 주의 것이다. 주가 행하실 것이다.
다만 나는, 지금 이 순간 주를 의뢰하고 주신 바 한 날의 삶으로 채워가는 것이었으니.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시 39:6).” 이는 어느 허무주의자의 독백이 아니다. 오직 믿는 자의 고백이었으니,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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