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전봉석 2020. 8. 11. 05:47

 

 

예레미야가 모든 백성에게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 곧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를 보내사 그들에게 이르신 이 모든 말씀을 말하기를 마치니 호사야의 아들 아사랴와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모든 오만한 자가 예레미야에게 말하기를 네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는 애굽에서 살려고 그리로 가지 말라고 너를 보내어 말하게 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예레미야 43:1-2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시편 79:9

 

 

예레미야가 모든 백성에게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 곧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는 말씀을 전하였는데도 이들은 거짓으로 단정하여 네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하고 공격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저들의 언변은 놀랍다. 결국 애굽으로 못 가게 하여 바벨론의 손에 죽거나 포로가 되게 할 술수라고 공격한다(3). 결국 요하난은 말씀을 무시하고 예레미야와 바룩을 붙잡아 애굽으로 간다(4-7). 애당초 하나님의 뜻은 안중에 없었다. 결국 예레미야는 애굽의 삼각주 디바네스에 머문다. 결국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애굽을 공략하고 저들 장막을 치며 애굽인들도 죽이며 저들 산당을 허물 것이다. 예레미야를 요하난의 손에 붙잡혀 애굽으로 끌려오게 하신 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주의 일을 전하는 데 주의 종은 쓰인다. 다른 목적이 아니다. 그럼에도 무심한 사람들, 엉뚱한 목적으로 나오는 사람들,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말씀을 전하게 하심이다. 오늘 시편의 말씀에 경고를 붙이신다. “주를 알지 아니하는 민족들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나라들에게 주의 노를 쏟으소서(79:6).”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주를 알지 못한다는 것,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은 저주다. “주를 알지 못하는 이방 사람들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아니하는 족속들에게 주의 분노를 부으소서 그들은 야곱을 씹어 삼켜 멸하고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였나이다 하니라(10:25).” 정작 몰라서 못 듣고 알 수 없어서 모르는 게 아니다. 말씀은 엄위하고 두려운 것이다. 누구에겐 달고 누구에게는 쓰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19:9-10).” 이는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신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7-8).” 그러니 당장의 고통과 두려움, 불편함과 압박을 견디기 싫어서 거절하고 돌아서는 일이란. 성경은 엄히 주의 자녀들을 따로 부른다. “너희 자녀들아 와서 내 말을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법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34:11).” 이는 우리를 옥죄고 불편하게 하고 억압한다. 당장의 욕구가 제지당하고 나의 의지는 무시당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하라, 하실 때 미적거림은 뭉개는 시간과 비례하여 더 큰 고통이 가중될 뿐이다.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11:3-5).” 내가 아는 성경의 이치고 주의 사랑이다.

 

주를 경외함으로 즐겁다. 아무도 몰라주어 가족들에게조차 소외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할 때 주가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다. 무엇보다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신다. ‘그의 허리띠는 공의시다. ‘그의 몸의 띠는 성실하심이다. 곧 말씀이 나를 치시고 공의로 나를 붙드시는 데 있어 성실하심을 더하신다. 우리 안에 있는 동물적인 본성열등의식을 깨뜨리신다. 이성적으로는 이해가 가는데 늘 자신도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을 친구는 동물적인 본성이라 표현하였다. 다 알겠는데, 말씀으로 은혜 가운데 있을 때는 의연하고 의젓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막상 돌아서기 무섭게 자기 안에 이는 감정은 유치하기 짝이 없고 모순되며 억하심정이 고개를 드는 것이다. 공격적으로 돌변하고 자기 위주로 판단하고자 한다. 나는 이에 동의하며 우리 안에 있는 알 수 없는 수치심-본능적인 죄책이라 이해하였다. 처음 사람 아담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저 혼자 몸을 숨기고 마음을 드러내려 하지 않고 자기가 알아서수치심을 가리려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 평생에 주를 경외하기를 배워야 한다. “이는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고 명하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행할 것이니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들이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6:1-2).” 알기 위해 배워야 하고 배우기 위해 순종해야 한다. 순종은 쳐서 복종시켜야 하는 치열한 싸움이 되었다. 친구 말처럼 돌아서기 무섭게 동물적이 된다. 금세 허기진 마음은 물어뜯고 공격할 대상을 찾는다.

 

이에 성경은 일갈하신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5).” 다른 수 없다. 아내를 이해하고 자식들을 사랑하려는 마음으로는 어렵다. 누구를 용납하고 저를 사랑하려는 나의 노력으로는 허사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일에도 자칫 헛된 욕망이 나의 거짓된 주장을 돋우고는 한다. 뭘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6-9).” 마치 자신은 안 그래도 될 것 같이 교양을 떨지만 어림없는 일이다.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12-13).” 언제든 내 안에는 애굽이 있다. 그때의 그리움이 도처에 있어 트롯을 들으며 위안을 삼고 드라마나 영화를 대리만족을 느낀다. 더는 그리 살지 않겠다고 하면서 그리 사는 사람들의 문화를 공유하려는 것이다. 스스로도 모순된 지경이라,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량한 일을 행하라(18).” 내가 보기에 정직과 선량함이 아니다. 주의 길을 가고 더욱이 주의 일을 한다고 하는 사람의 선택은 오늘 예레미야의 경우처럼 자의로는 안 된다. 맥없이 끌려가듯 현장에 세워지는 것이다. 말이 좋아 그렇지 그 고단함고 고달픔에 대하여는 족히 상상이 간다.

 

주를 경외함은 평생의 공부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10:12-13).” 곧 오늘 우리의 행복추구권은 다른 데 있었다. 주의 말씀과 의미를 지키는 데 있지 알고 배우고 머리만 키우는 게 아니었다. 그리하여 평생 읽고 죽을 때까지 곁에 두며 배우고 또 익혀야 할 반복이요, 학습이었다.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17:19).” 한 번 울컥, 하듯 그러다 마는 감정의 일이 아니다. , 하고 치미는 감정이 일순간 쏟아내고 나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이 곳과 그 주민을 가리켜 말한 것을 네가 듣고 마음이 연약하여 하나님 앞 곧 내 앞에서 겸손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대하 34:27).” 통회하고 자복하는 삶이 매일이다. 평생의 일이다. 하염없는 일상이다. 돌아서기 무섭게 은혜를 잊어버리기 십상이다. 왜냐하면 방주에 들어가기 전까지 노아의 일상은 끊임없는 헛됨의 연속이었다. 세상은 여전하고, 사람들은 다를 바 없이 안녕하며, 사회는 잘 돌아가고, 산 사람들은 살아서 잘만 살아간다. 저마다 한 맺힌 트롯으로 구성지게 젖혀대며 노래 한 자락 깔아주면 믿는 자들이고 안 믿는 자들이고 다들 좋다고 감동한다. 이는 너무 기이한 일이 아니라, 너무나도 평범한 일상이기 때문에 언급하는 것조차 뭘 꼭 그렇게까지!’ 하고 눈총을 받기 십상이다.

 

,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들아 그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르시되 너희 형제가 너희를 미워하며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쫓아내며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영광을 나타내사 너희 기쁨을 우리에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라 하였으나 그들은 수치를 당하리라 하셨느니라(66:5).” 말씀은 두려운 것이다. 하나님의 말이기 때문이다. 저는 창조자, 구원자이시면서 심판자이시기 때문이다. 이를 떨며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 복이라. ‘그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이 하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이 하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이 하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행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나 또한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듣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며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라 하시니라(2-4).” 말씀을 읽는 것만으로도 두렵고 떨리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늘 내 안의 안이함과 어쩔 수 없는 열등의식과 동물적인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나도 모르게 쏟아내곤 하는 삶 중에서,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79: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