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희를 너희 본향으로 돌려보내리라

전봉석 2020. 8. 10. 05:58

 

 

내가 너희를 불쌍히 여기리니 그도 너희를 불쌍히 여겨 너희를 너희 본향으로 돌려보내리라 하셨느니라

예레미야 42:24

 

하나님이 그들을 죽이실 때에 그들이 그에게 구하며 돌이켜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고 하나님이 그들의 반석이시며 지존하신 하나님이 그들의 구속자이심을 기억하였도다

시편 78:33-35

 

 

 

어떤 공식과 같다. “하나님이 그들의 날들을 헛되이 보내게 하시며 그들의 햇수를 두려움으로 보내게 하셨도다(78:33).” 거역하고 거부할 때에 그대로 두신다. 그때의 황폐함으로 주를 기억하고 돌이켜 주께 나온다. 그러면 주는 용서하시고 저들을 돌보신다. 이를 시인은 지존하신 하나님이 그들의 구속자이심을 기억하였도다.’ 주의 은총은 그의 사랑으로 이루어진다. 우리에게는 지식에 넘치는것이다. 지금은 말씀이 완성된 성경의 시대다. 하나님의 말씀은 더는 없다. 나는 감히 그렇게 전하였고 그리 안다. 다른 복음, 다른 더 첨가되는 말씀은 없다. 더하거나 뺄 게 없다. 헛되이 다른 데 기웃거려서는 안 된다. 누가 설교를 잘 할 수 있고, 말씀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좀 더 은혜 가운데 깨달아 증거 할 수는 있으나 그 차이는 여전히 우리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말씀을 사모하고 은혜를 구하는 일이 팍팍한 삶에서 강퍅한 영혼으로 바라는 것이면 이는 순수하지 못하다. 우리는 엄연히 하나님, 그 외의 다른 신을 두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필요로 하는 우리의 필요가 신이 되는 경우가 많다. 주의 은혜를 구하나 실은 자기 방식과 필요에 따른 갈급함이다.

 

누구는 그래서 기도원으로, 어디 용한 목사님이나 남다른 집회를 순례하듯이 선호한다. 저의 신앙은 위협적이고 작위적이다. 그러해야 한다는 당위적인 요소가 강해 몇 시간씩 기도하고 말씀보고 강박적으로 주를 구한다. 분명히 성경은 이를 옳다 하지 않으신다. 은혜와 은사는 선물이며 영원무궁 후회가 없다. “이렇게 계획할 때에 어찌 경솔히 하였으리요 혹 계획하기를 육체를 따라 계획하여 예 예 하면서 아니라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겠느냐(고후 1:17).” 자기 욕구에 따른 아니요는 둘 다 헛되다. 우리에게는 다만 만 있다. 여전한 현실과 늘 똑같은 것 같은 일상의 날들과 그 가운데 넌더리나는 삶을 개선하기 위해 주를 찾고 도우심을 바라는 일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18).” 어떠하든 하나님은 선하시다. 진절머리 쳐지는 현실이라 해도 주는 미쁘시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20).” 나는 이 말씀을 우리 삶의 기준으로 둔다. 하나님의 필요에 따른 적용이시다. 우리 필요에 따른 적용이 아니다. 아니면 그 자리에 굳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엇을 신으로 둬도 무방하다. 성경은 그리 증거하지 않으신다. 어떠하든 성령도 없었던 일로 되돌리실 수 없다!’ 언제는 하나님의 자녀이었다가 무슨 일로 하나님의 자녀의 자격을 박탈당하지 못한다. 또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데 어떠한 환경적인 요인에 의해 변화되었다고 주의 자녀가 되는 일도 없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2:19).” 이는 빼도 박도 못하는 진리다. 언제는 그랬다가 언제는 저랬다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선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20).” 그의 말씀은 예수께서 모퉁잇돌이 되신 터 위에 세우심이다. 허물 수 없는 진리다. 그런 가운데서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21-22).” 이는 어쩌다 그리 된 일이 아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1:4-6).” 이를 우리는 우리의 지식으로 감당할 수 없다. 공교롭게도 내가 아는 주변 사람들 가운데 많이 배우고 학벌도 좋고 직업군도 월등히 상위 몇 프로 안에 드는 사람들이 더 헤맨다. 박사 학위를 몇 개씩 갖고 있으면서도 성경은 쉬운 성경을 찾는다. 그것도 어렵다고 하며 누구 설교나 어느 집회를 배회한다. 이는 모르는 게 아니라 공평한 우리의 한계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3:18-19).” 그럼 우리는 지식에 넘치는 것을 어찌 알 수 있을까? ‘어떠함을 어떻게 깨달을 수 있을까?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이 우리로 충만하게 덮으신다. 곧 나의 조모는 초등학교도 못 나온 학식으로 떠듬떠듬 성경을 소리 내어 읽고는 하였다. 어릴 적 할머니의 성경 읽는 소리와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떠듬떠듬 한 어절씩 끊어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읽던 그 읽음의 이해가 무슨 박사 학위로 어디 교수로 또는 무슨 대기업을 다니며 그 분야의 최고로 일하는 누구들보다 훌륭하다. 나의 조모에게는 성경이 어렵고 쉽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쉽다는 것은 그만큼 이해할 수 있다는 소리가 되고 어렵다고 하면 그만큼 자기 지식으로는 이해가 안 돼 어렵다는 소린데, 이미 그러한 접근 자체가 옳지 못하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8:15).” 어쩌면 그러한 허기 또한 주의 자녀라는 증거가 되겠다. 다만 두려운 것은 자신들이 어찌 좀 할까 하여 애굽으로 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꿈꾸던 이상이 아니다. 추구하던 바도 아니다. 그러니 이를 바람인데.

 

내가 너희를 불쌍히 여기리니 그도 너희를 불쌍히 여겨 너희를 너희 본향으로 돌려보내리라 하셨느니라(42:24).” 늘 우리는 주의 긍휼하심 가운데 거한다. 그러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죽이실 때에 그들이 그에게 구하며 돌이켜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고 하나님이 그들의 반석이시며 지존하신 하나님이 그들의 구속자이심을 기억하였도다(78:33-35).” 돌이키지 않은 만큼 먼 길을 가야하고, 갔던 길을 되돌아오는 데는 그만큼의 시간과 또 고생이 따를 뿐이다. 나는 누구와 이야기할 때 종종 나의 그러했던 인생을 돌아보며 후회한다. 87학번으로 신학을 공부했어야 하는데 이를 거절하고 애굽을 찾아갔다가 돌이켜 97학번으로 다시 기회가 주어졌고, 이 또한 마다하는 바람에 09학번으로야 돌이킬 수 있었다. 회개한 돌아서는 일이다. 돌이켜 하던 일을 멈추고 깊은 숨에 빠져 아버지의 집으로돌아가는 것이다. 오늘 시인은 이를 결말에 둔다.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72).” 주가 지도하신다. 우리는 성경을 손에 쥐고 남은 자의 자세를 취한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보이시기를 원하나이다(42:3).” 또한 우리가 당신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보냄은 그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좋든지 좋지 않든지를 막론하고 순종하려 함이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면 우리에게 복이 있으리이다 하니라(6).”

 

주의 이끄심이 싫든지 좋든지 막론하고 순종하겠다고 하는 부분이 회개의 결정적인 부분이다. 여전히 어렵고, 이해가 안 돼, 회의가 일고, 갈등은 더해진다 해도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같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나와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하게 하셨으니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삼하 23:5).” 이 모든 구원의 계획은 우리가 나기도 전에, 모든 만물이 지음을 받기도 전에, 창세 전 아무 것도 없으면서 모든 것으로 충만하였던 하나님의 영원하신 시간 중에서 예정하시고 선택하신 일이다. 부디 이 부분을 바로 알 때 우리는 흔들려도 뽑히지는 않고, 아무리 풍랑이 일어도 뒤집어지지 않는다. 친구만 잠깐 두고 화장실에 다녀올 때 나는 성경을 건네도 에베소서 1장을 앞부분만이라도 읽어보게 하였던 것도 그 때문이다. 또는 언젠가 목숨을 다 잃어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던 누구와 함께 그 부분으로 먼저 성경을 묵상하고 나누었던 것도 그래서다.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1:8-10).” 그냥 어쩌다 생겨난 오늘의 내가 아니다. 우연히 당하는 어려움도 아니다. 이 모든 일에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우리로 그 뜻의 비밀을 알리신다.’ 무엇을? ‘다 그리스도 안에서통일되게 하심을.

 

하나가 되는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 지금 무엇에 의해 갇힌 바 되었나? 이를 해결하려 애쓸 게 아니라 그것으로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이러한 일에 처하게 하신 것도,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9).” 가장 큰 문제는 그 문제에 함몰되는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를 찾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구원을 바란다면 이보다 가벼운 영혼은 없다. 문제는 문제만 해결하려 하는 게 문제다. 나는 말씀을 증거하면서 앞으로 인생의 여러 어려움을 겪으며 장년이 되고 중년이 되어 노년에 이를 것인데, 그때마다 온갖 어려움이 우리를 주도하지 못하게 하자. 그러려면 떠듬떠듬이라도 또는 뭐가 뭔 소린지 모르겠더라도, 한 자씩 한 어절씩 손으로 짚어가며 성경을 읽자.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4:16).” 그러할 때 주께서 인도하신다. 나는 당부하였다.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78:7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