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집이 벧엘을 의뢰하므로 수치를 당한 것 같이 모압이 그모스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리로다
예레미야 48:13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
시편 85:10-11
우리의 죄는 우상숭배다. “이스라엘 집이 벧엘을 의뢰하므로 수치를 당한 것 같이 모압이 그모스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리로다(렘 48:13).” 오늘 본문은 이를 일깨운다. “너희가 어찌하여 말하기를 우리는 용사요 능란한 전사라 하느냐(14).” 자신을 자신하는 교만은 남을 조롱하는 일과 같다. 더욱이 모압이 이스라엘을 조롱했다. 주의 택하신 바 이를 조롱하고 교만하여 자신의 풍성한 소유를 자랑한 데 따른 결국은 자명하다. 저들의 풍성함이 걸림돌이었다. 이를 반영하듯 오늘 시편은 주께 의뢰하는 이유를 분명히 한다. “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85:12).” 그러므로 “의가 주의 앞에 앞서 가며 주의 길을 닦으리로다(13).” 하는 말씀 앞에서 나의 조바심과 또는 자신한 자부심을 동시에 돌아보게 된다. 조바심은 안달을 부르고 자부심은 자긍하게 함으로 자신만이 옳은 줄 안다. 오늘의 모압에 대한 진술은 앞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묵상하게 한다. 곧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이를 알 길이 없어 분남과 서러움과 어떤 책임전가에 따른 회피와 모면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격이다. “모압이 여호와를 거슬러 자만하였으므로 멸망하고 다시 나라를 이루지 못하리로다(렘 48:42).”
오늘의 나는 여러 날의 나로 어우러진 나다. 말씀으로 붙든다고 하지만 언제 어디서 ‘어떤, 나’로 불쑥 튀어나올지 모른다. 저마다 그 안에 상처와 앙금을 가지고 살며 이는 수시로 둔갑을 하듯 오늘의 나를 지배하려 든다. “여호와의 일을 게을리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 자기 칼을 금하여 피를 흘리지 아니하는 자도 저주를 받을 것이로다(10).” 우리의 쓰임은 주의 일에서이다. “너희가 어찌하여 말하기를 우리는 용사요 능란한 전사라 하느냐(14).” 스스로 자부할 때 재난은 가깝고 고난은 속히 온다. “모압의 재난이 가까웠고 그 고난이 속히 닥치리로다(16).” 어느 날 불현 듯 “그의 사면에 있는 모든 자여, 그의 이름을 아는 모든 자여, 그를 위로하며 말하기를 어찌하여 강한 막대기, 아름다운 지팡이가 부러졌는고 할지니라(17).” 몰라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에 놀랄 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좋을까? 내가 나를 이길 수 있는 재간이 없다. 성경은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시 32:5).”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 사악함과 더러움을 모두 주께 아뢰는 일,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만 의탁하라.’는 엘리바스의 충고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나라면 하나님을 찾겠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욥 5:8).” 그러할 때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시 51:1).” 저가 주의 마음에 합할 수 있는 까닭이다.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2-3).” 주를 의뢰하고 아뢰는 일.
성경은 누누이 이를 일깨우시는 것이다. 주를 신뢰하고,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딤전 1:12).” 주께서 더하시는 힘을 붙드는 것이 능사다. “그 때에 주께서 환상 중에 주의 성도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능력 있는 용사에게는 돕는 힘을 더하며 백성 중에서 택함 받은 자를 높였으되(시 89:19).” 저는 능한 자시다. 구원할 능력이 있으시다. “그는 나이니 공의를 말하는 이요 구원하는 능력을 가진 이니라(사 63:1).” 이를 위하여 구원할 자를 보내신다. “이것이 애굽 땅에서 만군의 여호와를 위하여 징조와 증거가 되리니 이는 그들이 그 압박하는 자들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부르짖겠고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한 구원자이자 보호자를 보내사 그들을 건지실 것임이라(19:20).” 그러므로 쇠하지 않고 낙담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42:2-4).” 가만히 내 곁에 다가오시는 주님의 위로와 숨결을 느낀다. 요지경인 세상처럼 하루에도 엎치락뒤치락 숨이 찰 정도로 마음은 나를 책망하지만,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요일 3:20).” 그러므로 더욱 주를 의뢰하는 것이었다. 아니면, 자기의 죄를 숨기고 덧칠할 때의 경고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
그런 거 같다. 우리 속은 비워질 리 없고 그렇다면 무엇으로 채우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라. 주의 일을 회피하면 사탄의 일을 하고 있기 마련이고, 이는 뭐 그리 대단한 죄로 여겨지지도 않을 정도로 자신을 자긍하고 스스로 채워 얻으려는 거짓된 충만함의 결정이다. 그러할 때 주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이 아니라면 우리는 누구라도 이를 견딜 수가 없는 일이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마 12:20).” 주님의 말씀만이 내 곁에 남는다.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사 42:4).” 내 의지나 나의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닌 것을 잘 알면서도 안달복달 마음만 애달파 저 혼자 속을 끓이는 형국이니, 나야말로 하루하루가 할 말이 없게 만든다. “대저 여호와께서 신원하여 주시고 또 그를 노략하는 자의 생명을 빼앗으시리라(잠 22:23).” 주께서 맡으시기를 원하신다. 주가 담당하신다. 그런데도 우리 안에는 ‘이런 나의 모습 때문에 하나님이 탐탁하지 않게 여기실 것이고 바르게 사용하실 수 없을 것이다.’는 소심함과 낭패감을 거듭 더하는 것이 사탄의 일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때마다 또 기다리시고 참으셨다. “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그들의 소행을 참으시고(행 13:18).” 아니면 오늘의 나는 없다. 얼마나 주를 조롱하고 주를 괴롭혔던 나의 생이었나! 그럼에도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사 40:28).” 주의 인자하심이 아니었으면 벌써 죽어 마땅할 죄인인데.
오히려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29-30).” 오늘 이처럼 새 힘을 더하시니,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29-31).” 나의 나 된 것으로 인하여 의기소침할 때도 있지만 이를 가지고 주 앞에 나아갈 용기도 얻는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말씀 앞에 앉힌다. 내게 말씀을 두지 않으셨다면, 나로 이 쓸모없는 ‘그슬린 막대기’만도 못한 나를 목사로 세우시지 않으셨다면, 그럼에도 나를 씻기시고 아름다운 옷으로 덧입히시니,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지라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내가 말하되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천사는 곁에 섰더라(슥 3:3-5).” 사탄은 그러한 나를 두고 날마다 정죄한다. 하나님께 송사한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2).” <그슬린 나무>는 내 안의 열등의식이고 자격지심이었다.
공연한 미안함이고 괜한 안쓰러움은 동일한 교만이었다. 내가 뭐나 된 줄 아는 자긍심이고 자기 교활함이었다. 이는 여전한 모압의 산당과 같다. 내가 구축하는 도성이다. “여호와의 말씀이라 모압 산당에서 제사하며 그 신들에게 분향하는 자를 내가 끊어버리리라(렘 48:35).” 그리하여 오늘 말씀은 엄한 경고이다. “이스라엘 집이 벧엘을 의뢰하므로 수치를 당한 것 같이 모압이 그모스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리로다(13).” 이를 알면 알수록 나는 주 앞에 설 수조차 없는 부끄러움으로 감당아 안 되는데,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시 85:10-11).” 주의 긍휼하심만이 살 길이다. 우러러 나는 주만을 바라보나이다.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미 7: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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