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만한 자가 걸려 넘어지겠고 그를 일으킬 자가 없을 것이며 내가 그의 성읍들에 불을 지르리니 그의 주위에 있는 것을 다 삼키리라
예레미야 50:32
시온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다고 말하리니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 하는도다
시편 87:5
나는 저가 무슨 소릴 지껄이든지, 진영논리에 편승해 어느 쪽을 등에 업고 저리도 설치는지, 이를 또 교묘하게 악용하여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드는 무리가 어떤 술수로 그리 행하는지 관심이 없다. 다만 저의 교만이 하늘을 찌르고 그로 인하여 교회가 욕먹고 하나님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컬음을 받는 데 대해 분노하였다. 기독교가 언제부터 이처럼 정치와 이념에 좌우되었는지, 시골 촌부와 농부의 손에도 유튜브가 열려 이를 병기창으로 이용하고 선동하며 대여버스로 이송하여 집회에 가담하게 하였으니… 오늘 날 우리 교회들의 단면이 오늘 말씀으로 경고를 받는듯하다. “교만한 자가 걸려 넘어지겠고 그를 일으킬 자가 없을 것이며 내가 그의 성읍들에 불을 지르리니 그의 주위에 있는 것을 다 삼키리라(렘 50:32).”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 가운데 으뜸은 교만이고, 바벨론은 이 길에 지체하지 않았다. 교만은 반복된다. “활 쏘는 자를 바벨론에 소집하라 활을 당기는 자여 그 사면으로 진을 쳐서 피하는 자가 없게 하라 그가 일한 대로 갚고 그가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라 그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여호와를 향하여 교만하였음이라(29).” 저들은 옳다고 여기는 신념으로 무장하였다.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교만한 자여 보라 내가 너를 대적하나니 너의 날 곧 내가 너를 벌할 때가 이르렀음이라(31).” 이를 들을 수 없다. 교만은 하나님을 적으로 삼는다.
“바벨론아 내가 너를 잡으려고 올무를 놓았더니 네가 깨닫지 못하여 걸렸고 네가 여호와와 싸웠으므로 발각되어 잡혔도다(24).” 그리하여 “교만한 자가 걸려 넘어지겠고 그를 일으킬 자가 없을 것이며 내가 그의 성읍들에 불을 지르리니 그의 주위에 있는 것을 다 삼키리라(32).” 성전이 파괴된다. “바벨론 땅에서 도피한 자의 소리여 시온에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보복하시는 것, 그의 성전의 보복하시는 것을 선포하는 소리로다(28).” 이는 선지자 이사야도 경고한 바이다.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바벨론에 대하여 받은 경고라(사 13:1).” 이에 두려워 떪이 있어야 한다. “보라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 중에서 죄인들을 멸하리니 하늘의 별들과 별 무리가 그 빛을 내지 아니하며 해가 돋아도 어두우며 달이 그 빛을 비추지 아니할 것이로다(9-10).” 자신의 힘으로 착각할 때 더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게 되는 특징이 있다. 더 열렬히 하나님을 내세우지만 이를 정치적으로 또는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 데 활용함으로 타락한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펼쳐지는 일련의 사태, 교회가 점점 정치화 되고 목사의 영향에 좌우되어 사람들이 갈리고 그 현장에 쓸려다니는 사람들-신자들의 무기력함에 마음이 아프다. 선봉에 서던 이가 급기야 그 가족과 주변인들이 확진되면서 주의 손길을 두려워하고 있다. 누구라도 얼마든지 죄악 된 길로 갈 수 있다. 믿음으로 거룩해진 사람들도 죄악 된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 언제든지 죄와 사망의 몸에 매여 끌려 다닐 수도 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깨어 근신으로 옷 입고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 지혜이다. 몸은 언제든지 죄를 취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려 든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거룩함을 덧입어 주의 자녀가 되었다 해도 그와 같은 유혹은 거침이 없다. 하지만 더는 희생제물 되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없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롬 6:9).” 그러니 이고 지고 생고생으로 지내면서 철저하게 죄의 끔찍함을 맛보아야 한다. 물론 이미 창세전에 예정하사 택정하심을 받은 주의 자녀이면 결코 저를 잃어버린 바, 되게 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곧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8, 39).” 그러므로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는다.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마 18:12).” 이는 우리 주님이 포기할 수 없는 영원한 선택이다.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1+1=2’이다.
나는 저가 어떤 이인지, 저들이 어떤 이들인지 알 길이 없다. 그 주장과 논리가 어떠하여 무엇을 근거로 입만 열면 그처럼 열성적으로 정권을 비판하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고자 입이 무르도록 떠벌여대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러할 때 저들의 사욕과 정욕이 거룩한 전쟁으로 둔갑하여 마치 자신이 구속자를 대신하려는 듯 투사가 되는 일에 혐오한다. 나는 그래서 ‘너는 어느 쪽이냐?’ 묻는 이들과의 대화를 피한다. 그 이야기의 결말은 없다. 종교와 정치는 어느 한쪽이 죽지 않으면 다른 한쪽이 살 수가 없다. 다만 우리는 그 어느 쪽도 아닌 것이 더는 그러한 법에 매인 바 된 존재들이 아니다! 그러므로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롬 6:14).” 은혜 아래 있다 함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것이지, 어디서 자기주장을 들먹이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8:1-2).” 어쩌면 이와 같은 나의 생각을 이미 글로 표현하는 것 자체가 정치다. 나는 이를 경계하고 혐오한다. 우리는 다만 언약에 의하여 긍휼하심 가운데 거할 따름이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갈 2:19).” 어쨌든 우려하던 것이 현실이 되어 2차 대유행으로 창궐하고 있는 전염병 ‘코로나19’에도 학습된 공포감은 피로감을 더할 뿐 더는 경각심이 없다. 안이하여 성가실 따름이다.
어쩌면 죄의 본질의 ‘어떤 일’이 아니라, 무뎌져서 거듭 그 일을 행함에 있어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사 5:18).” 한 번이 두렵지 두 번 세 번 거듭되는 것에는 학습효과가 있다. 아, 그러니 나는 종일 그러한 기사를 접하면서 왜 더욱 말씀으로 말씀밖에 의지할 것이 없는가를 알 수 있었다.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고전 9:13).” 내가 어찌 해보려하는 모든 행위에는 이미 본질을 그르치는 자기 의가 도사리고 있기 마련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지만 이 또한 이용하는 것이지 의뢰함으로 맡겨짐이 아니다. 맡겨진 자의 입에는 말씀만이 있다. 혹여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막 8:38).” 나는 그래서 두렵고 떨림을 입는다. 남들 앞에 내세울 것 없음이 귀하다. 보잘것없이 쓸모없음이 다행이다. 어쭙잖게 나대지 못하는 게 복이다. 더는 정죄의 대상이 아님을 잘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롬 7:5-6).”
그처럼 얽매였던 것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사람들의 인정과 저들 가운데 있을 때의 안도감을 더는 구하지 않는다. 혼자 이처럼 앉아 하등에 쓸모없을 것 같은 시간으로 이처럼 새벽 일찍 주 앞에 서는 일이 귀하다. 하루 중 이를 잃지 않기 위해 마음 쓴다. 그러할 때 필요로 하는 영혼을 붙이시고, 것도 아니면 나로 하여금 말씀 가운데 머물게 하심을 느낀다. 자식에 대해서도 아내와 가족에 대해서도 달관이나 초월이 아닌 주께 맡김을 거듭 훈련시키시는 것 같다. 애달파 하고 마음 쓰며 신경을 곤두세울 일이 아니었다. 내가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억지를 쓰는 일만큼 미련하고 교만한 일도 없다. 이미, 모든 일은 끝났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곧 주께서 다 하셨고, 또한 여전히 하실 것이다. 모든 것을 완전히 충족시키셨다.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히 10:9).” 옛 법은 채우시고 새 법은 세우셨다.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10).” 그 값을 대신할 수 있는 그 무엇도 세상에는 없다. 나를 죽여서라도 살리시는 주의 은혜라. 내가 어떠한지는 중요하지 않다. 무슨 일로, 어떤 수고함으로 갚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나는 은혜와 생명의 법 아래에 있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6-8).” 그러니 나는 염치없으나 주의 은혜 아래에 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8:2).”
그러한데 뭐 그리 세상에서 인정받고 사람들로부터 추앙받으려 하는지!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히 10:4).” 내가 한 게 아무 것도 없으면서 누굴 어찌 하려 드는 이 모든 게 교만이었다. 자식도 내 일이 아니다. 다만 기도와 말씀뿐이다. 묵묵히 주의 인도하심 앞에 모든 것을 맡김으로 나아갈 뿐이다. 이미 넉넉하였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2-24).”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말씀 앞에 설 뿐이다. 곧 “시온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다고 말하리니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 하는도다(시 87: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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