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 같이

전봉석 2020. 9. 25. 05:53

 

 

이는 물 가에 있는 모든 나무는 키가 크다고 교만하지 못하게 하며 그 꼭대기가 구름에 닿지 못하게 하며 또 물을 마시는 모든 나무가 스스로 높아 서지 못하게 함이니 그들을 다 죽음에 넘겨 주어 사람들 가운데에서 구덩이로 내려가는 자와 함께 지하로 내려가게 하였음이라

에스겔 31:14

 

우리의 영혼이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시편 124:7-8

 

 

세상 그 모든 아름다움을 더한 것보다 귀히 세우셨는데, “볼지어다 앗수르 사람은 가지가 아름답고 그늘은 숲의 그늘 같으며 키가 크고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 레바논 백향목이었느니라(31:3).” 그러나 그 쓰임이 주의 뜻을 다하지 못하면 이는 물 가에 있는 모든 나무는 키가 크다고 교만하지 못하게 하며 그 꼭대기가 구름에 닿지 못하게 하며 또 물을 마시는 모든 나무가 스스로 높아 서지 못하게 함이니 그들을 다 죽음에 넘겨 주어 사람들 가운데에서 구덩이로 내려가는 자와 함께 지하로 내려가게 하였음이라(14).” 성경의 교훈은 일관되다. “비천히 여김을 받을지라도 종을 부리는 자는 스스로 높은 체하고도 음식이 핍절한 자보다 나으니라(12:9).” 이는 우리 하나님의 권한이시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삼상 2:7).” 오늘 이와 같은 말씀을 통해 남다른 하나님의 은혜를 갖는다. 저는 사랑이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전에 누가 묻기를 하나님은 공평하신가? 왜 아벨만 사랑하시고, 노아만 구원하시고, 아브라함만 부르시고, 야곱을 더 귀히 여기시며, 요셉을 그리 세우시고, 모세를 크게 사용하셨는가. 굳이 이스라엘 민족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는가. 할 때 먼저는 앞서 저를 그 태중에서 또는 이 땅이 생기기도 전에부터 어찌 구별하시고 선택하시게 된 것인지는 나도 잘 모른다. 하나님의 작정하심에 대하여는 우리의 지식이 너머의 넘치는 사랑이다. 다만 이 땅의 역사와 함께 흐르는 사랑의 물줄기는 억지가 아니셨다. 저들의 제사에서 아벨은 자신을 먼저 드렸고 가인은 종교의식으로 드렸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4:4).” 노아의 때에 숱한 하나님의 아들들은 사람의 딸들을 사랑했으나 노아는 그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6:2).” 우르에서 아브라함은 그곳을 떠나라 하는 말씀을 들었을 때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모두 버리고 길을 나섰다. 야곱이나 요셉은 누구보다 말씀에 귀 기울이며 축복과 은혜를 사모하였고 상대적으로 저들의 형제들은 이를 가벼이 여겨 장자, 축복권을 버리거나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렇듯 가만히 그 시대의 모든 정황을 둘러보면 하나님은 공평하셨고 이를 더욱 사모하고, 순종하고, 말씀을 따랐던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그 하나님은 우리의 빛이시다.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요일 1:5).” 즉 누구는 그 빛을 따랐고 많은 다수의 누구들은 그 빛을 피해 어둠에 거하였다.

 

같은 건물에서도 어느 층은 유난히 칙칙하고 어둡다. 유흥업소나 퇴폐업소가 나란히 들어선 곳은 실내를 밀폐하고 바깥을 음침하게 꾸몄다. 문구점에 들렀다가 다른 층에 잘못 내렸을 때 새삼 그런 느낌으로 부르르 몸을 떨었다. 희한한 조화라. 하나님은 그러한 세상 구조를 다 아신다.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1:17).” 세상의 특성을 그들보다 더 잘 아신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장중에 모으신다.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의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30:4).” 하루의 일과 중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나처럼 실감하며 사는 사람이 또 있을까?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때로 나는 나로 사는 게 너무 힘들다. 가령 어제는 다음 주 명절에 먼 길을 다녀와야 할 것이라 앞서 자동차를 좀 점검하기로 하였다. 서너 달 전에 엔진오일을 갈면서 점검한 터라 굳이 그럴 건 아니었다. 다만 성격상 그리 안 하면 불안한 것이다. 그렇게 고작 동네에 있는 서비스센터에 가면서 평소 동선과 멀어져서 그런가? 신경이 곤두섰고, 유난히 다리는 더 시리고 저려 앉지도 서지도 걷지도 못하겠고, 서너 대 앞 차량을 기다리는데 갑자기 속은 뒤틀리고(앞서 화장실을 몇 번을 들락거리며 다녀온 뒤인데도), 앉았다 일어섰다, 그냥 갈까 어쩔까? 밖으로 나와 서성거리며, 그러는 내가 나는 너무 힘든 것이다. 이래저래 살피고 타이어공기압이나 조절하고 온 게 전부였다. 그러느라 겪는 내가 고달팠을 뿐이다.

 

교회로 돌아오자 녹초가 되었다. 앞에서 공부하는 아들은 왜 저러나싶은 눈치였다. 누구에게 말한들? 나도 나를 모르겠는데, 이런 나를 달아보시며 그 처지와 사정을 나보다 더 잘 아시는 주를 의뢰함이라니! “누가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쟀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접시 저울로 산들을, 막대 저울로 언덕들을 달아 보았으랴(40:12).” 이를 피부로 여실히 느낄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위대하심이다. “그의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17).” 세상 그 어떤 아름다움도 가치도 하등에 쓸모없는 것이 될 수 있고, 비루하고 비천한데 그 어느 것보다 귀히 여기시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나는 종종 나의 나 된 것으로 하나님의 절실함을 실감한다. 주의 도우심이 아니면 살 수가 없음을 병적으로 느끼는 일이라 해도 귀하다. 그러할 때 나는 주를 힘입어 산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17:28).” 아침마다 이처럼 말씀을 묵상하며 또 하루 주어진 현실로 돌아올 때, 내 몸은 서서히 깨어나는지 불안이 같이 엄습한다. 그럴 때면 도대체 그럴 게 뭐 있나, 싶어서 내 자신이 한심하기까지 하다. 다들 평온히 잠든 시간에 이처럼 창가에 앉아 말씀을 따라가며 주의 은혜를 되새기면서도 나의 육신은 나를 괴롭히지 못해 안달인 것 같다. 슬그머니 안정제를 삼키면서 그러는 내 자신이 처량하고 한심할 때도 있다.

 

그러할 때 주의 세미한 음성이 있어, “보라 이런 것들은 그의 행사의 단편일 뿐이요 우리가 그에게서 들은 것도 속삭이는 소리일 뿐이니 그의 큰 능력의 우렛소리를 누가 능히 헤아리랴(26:14).” 누구에게 말한들 알아줄까? 누구 말이라면 나는 이해할 수 있을까? 가끔은 혼자 화장실에 앉아 또는 고객대기실에 앉았다 섰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안절부절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할 때,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48:14).” 되뇌고 되뇌어 주의 이름을 바랄 뿐이다. 명절이 다가오면서 그렇게 바람도 쐬고 모처럼 모여 같이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좋기는 한데, 어떤 불안이 또는 고통이 나를 엄습할 때면 너무 힘들다. 그러니 어떤 때는 그렇고 어떤 때는 저런 날들 가운데, 건물 저편으로 한 발짝도 못 나갈 것 같을 때도 있고, 늘 지나다니는 길이 어떤 공포로 다가올 때도 있다. 누가 물으면 난들 아나? 어제도 돌아와 기진한 몸으로 책상에 앉아, 내가 나로 사는 이 일이 눈물겹게 힘들기도 하였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이 모든 만물 위에 만물보다 선재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의뢰하는 수밖에.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13:6).” 단지 느낌이 아니라 실제 몸의 고통으로 쩔쩔매는 일이었다. 그러는 나 같은자들이 여럿이다. 딱 그때 누가 전화를 하였다. 며칠째 배탈이 나고 몸이 아파서 출근도 못했다고 했다. 명절 앞두고 신경을 쓰는데 몸이 앞서서 반응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들 참 죄 된 몸을 입고 사는 일이란 고달프기 짝이 없다.

 

이 모두를 지으시고 이 모두를 주관하시는 이를 바랄 따름이다. “이방 사람들의 왕이시여 주를 경외하지 아니할 자가 누구리이까 이는 주께 당연한 일이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들의 지혜로운 자들 가운데 주와 같은 이가 없음이니이다(10:7).” 누가 어떤데, 누구는 어떻고, 그런데 왜 우리는, 하는 식의 푸념은 쓸모없다. 그래서 나는 더 주밖에 의지할 수 없어 다행이다. 내가 나도 의지할 수 없어 다행이다. 전에 한참 겁 없이 돌아다닐 때, 하나님 없이도 마음껏 휘저으며 잘 살 수 있을 거라 여기며 살던 때를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해진다. 바로 한 치 앞이 천 길 낭떠러지였고, 더는 돌이킬 수 없는 이쪽과 저쪽의 경계가 코앞이었는데도 몰랐다. 앞서 믿음의 사람들, 곧 선민이라 불리는 아벨과 노아와 아브라함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선택받은 이들의 절규와 절실함이 이런 게 아니었을까? 저도 그냥 종교적인 의식으로 제사를 지내고, 방주 짓기를 소홀히 하고, 길 떠나는 것을 미적거리고 있었다면? 아니, 남들처럼 외면하고 거역하였더라면? 저들로 하여금 그리할 수 없게 하신 것이 주의 은혜라. 곧 오늘 우리에게 더하시는 어려움이 그것으로 더욱 주를 바랄 수 있게 하는 것이었으니. 이제, “우리의 영혼이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124:7-8).” 오늘 시편의 찬송이 크게 들린다. “우리를 내주어 그들의 이에 씹히지 아니하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