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굽의 모든 주민이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애굽은 본래 이스라엘 족속에게 갈대 지팡이라
에스겔 29:6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시편 122:1
주의 도우심은 어김없으시다.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막 4:39).” 이는 마치 용사 같아서 속전속결 전투 같다. “여호와께서 용사 같이 나가시며 전사 같이 분발하여 외쳐 크게 부르시며 그 대적을 크게 치시리로다(사 42:13).” 그렇게 오늘 아침은 나를 괴롭히는 애굽에 대하여, 그러면서 늘 보면 의지하려 하고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려 드는 세상에 대해 경고의 말씀이다. “애굽의 모든 주민이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애굽은 본래 이스라엘 족속에게 갈대 지팡이라(겔 29:6).” 저들로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심을 알게 하시고, 우리의 의지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깨닫게 하신다. 그러할 때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고통의 깊이와는 무관하게 된다. 누구 말처럼 이는 상대적이면서 절대적이어서 저마다의 주관이 다르겠으나,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시 11:3).” 우리는 그로 인하여 주의 선하심을 더욱 의뢰한다. “이는 내게 향하신 주의 인자하심이 크사 내 영혼을 깊은 스올에서 건지셨음이니이다(86:13).”
돌아보면 그러하여서 나는 여전히 내 곁에 있는 흔적들, 가끔 연락이 오는 그때 그 친구들의 사는 모습에서 더더욱 경각심을 갖는다. 저들이 누구 말을 들으려 하나? 나도 그러하였다. 모든 게 이 땅을 구심점으로 잘 되고 평탄하기를 구한다. 더더욱 요즘 나의 한 날은 그 동선이 일정하여서 시계추처럼 움직이고 만나는 사람은 극히 제한적이어서 전혀 그러한 삶을 잊고 있다가 누구를 통한 누구 소식에 내가 본래 어떤 사람이었던가를 되새기게 된다. 그럴 때면 온전한 것이 주의 은혜라. 내 영혼이 음부에서 건짐을 받은 일에 대하여 의심의 여지가 없게 한다. 마치 잊을만하면 저들의 개입이 나의 하루를 흔들어 깨우는 것 같다. 가령 누가 결혼을 할 때 그 집이 어떤 믿음의 사람들인지 개의치 않았고 자신만 잘하면 얼마든지 그 신앙을 유지하며 살 줄 알았다. 둘 다 공부를 많이 하여 학벌은 높고 직장은 반듯하나 늘 사는 게 끌려 다니는 생이라. 곧 추석을 앞두고 2, 3일 시댁에 가서 음식을 만들고 제사를 준비해야 하는 일에 대하여 저의 신음소리는 안타까울 뿐이다. 남편도 자신도 나름은 주를 온전히 바라며 평소에는 신앙을 더욱 온전히 하려(?) 애쓰지만, 이럴 때면 현실의 벽은 난감할 뿐이다. 본인들 살아생전에는 조상들 모시고 제삿밥 올리는 일을 중단할 수 없다고 완고하니, 운다고 될 일이겠나? 이번에도 기도해달라고 하는데,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착잡하였다. 누구는 돈돈거리며 주식에 허송세월을 보내고, 누구는 기껏 믿음을 가졌다가 장기화되는 코로나 사태로 도로아미타불이다.
아, 이 생의 헤어날 수 없는 애굽의 웅덩이여. 온갖 옳은 소리들로 가득하고 저마다의 신의와 나름의 확신들이 난무하며 그 안에 배제할 수 없는 두려움의 웅덩이가 질퍽거리고 온통 사느라 시끄러운 소리에 정신이 팔려 주를 찾을 기력이 없다.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 같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시 40:2).” 저들은 괜찮다고 하지만 모처럼 통화를 하면 열 마디 가운데 여덟 마디가 죽겠다는 소리다. 그러면서도 내가 나의 삶을 두고 주의 살아계심과 그의 인자하심을 증거 하려하면 들으려하지 않고, 가시적으로 보이는 것에 연연할 따름이다. 그러든가 말든가, 나는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3).” 누구에게는 두 아들이 있는데 큰 아들은 대기업을 다녀 벌이도 좋고 씀씀이도 헤픈데 반해 집에서는 망나니라, 결국 작은 아들은 겨우 모 회사의 서류 수발 직원으로 근무하며 기본급에 더해 근근이 벌이가 전무일 텐데 저가 집을 얻어 나갔다고 한다. 큰 아들은 요지부동 집안에서 왕으로 굴림하니 부모도 제어를 못 한다. 조모나 부모를 아랑곳하지 않고 승질을 멋대로 군다. 이를 누구에게 말하기도 뭐해 가끔 푸념처럼 내게 하곤 하는데, 듣는 지경도 그 모양인데 오죽하겠나싶다. 결국 동생이 직장 핑계로 형 등쌀에 살 궁리를 찾은 모양인데, 저는 아이들이 그 모양이라 한숨이 깊다. 좋은 대학 보내느라 평생을 등골 빠져 키워, 나름 번듯한 직장들 구해 남들 보기에는 좋겠다싶은데, 그 속은 반목과 거친 숨소리뿐이다.
하나님 없이 산다는 삶이 얼마나 황폐하고 핍절한지, 저들은 물론 아니라 하고 지금의 삶에 안주하며 괜찮다, 좋다 하지만 저들이 몸을 의탁하는 지팡이는 썩은 갈대라. “이제 네가 너를 위하여 저 상한 갈대 지팡이 애굽을 의뢰하도다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그의 손에 찔려 들어갈지라 애굽의 왕 바로는 그에게 의뢰하는 모든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왕하 18:21).” 나에게도 그런 사람들이 곁에 있었고 늘 나의 든든한 자산이고 응원군이라 여겼던 적이 있다. 저들은 내가 추구하는 이상이었고, 그 꿈을 향해 나아가는 나의 인생을 보람되다고 간주하였다. 그런데 모두가 허상이었다. 나는 안 믿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하나님은 뒷전이었고, 그나마 교회를 다니며 ‘기독교인’으로 행세하였던 것은 어떤 불편함과 죄의식 때문이었지 아무런 즐거움도 몰랐던 시절이었다. 늘 그때마다 내 곁에는 이 땅의 거인들이 있었다.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창 6:4).” 나는 늘 저들을 부러워했고 가까이 하지 못해 안달을 떨고는 하였다. 저들은 언제나 백향목처럼 크고 상수리나무처럼 강했다. 사회에서 한 가닥들하는 그들의 모습에 나는 늘 주눅이 들고는 하였다.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 13:33).”
늘 보면 기울어진 운동장이라. 부모의 재력으로 어지간한 학벌을 겸비하였고, 서로 연결된 학연과 지연을 동원하여 끈끈하게 부를 추구하였다. 돈이 돈을 벌고 저들의 부정은 언제든 정당한듯하였고 법의 테두리를 넘나들었으나 서로가 눈감아주었다. 오늘 우리 사회를 어지럽히는 어느 장관들의 자녀에 대한 불공정과 도덕성의 문제는 그야말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듯 격이다. 살아온 사회에서 그러지 못하는 게 바보지, 능력이 되면 ‘엄마찬스’를 왜 안 쓰나? 그로인한 일반 국민들의 박탈감? 국민들 정서에 맞지 않는다고? 그리 떠벌이는 언론이나 정치인들의 의도가 혐오스럽다. 저들고 까보면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을 것을. 하다못해 나도 아이 수행평가로 학교에 봉사시간을 제출해야 할 때 모 관공서에 일하는 친구에게 보내 한꺼번에 한 달치 도장을 받아준 적이 있다. 꼴랑, 그런 것도 비일비재한데 언제부터 청렴결백 운운하며 가증을 떠는 사회가 되었는지, 이런 게 난센스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압을 괴롭히지 말라 그와 싸우지도 말라 그 땅을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롯 자손에게 아르를 기업으로 주었음이라(신 2:9).” 저들은 저들의 땅에서 살 뿐이다. “크고 많은 백성은 네가 아는 아낙 자손이라 그에 대한 말을 네가 들었나니 이르기를 누가 아낙 자손을 능히 당하리요 하거니와(9:2).” 다들 그 밥에 그 나물인 세상에서 “오늘 너는 알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맹렬한 불과 같이 네 앞에 나아가신즉 여호와께서 그들을 멸하사 네 앞에 엎드러지게 하시리니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것 같이 너는 그들을 쫓아내며 속히 멸할 것이라(3).”
결코 저들은 우리가 감당하여 개도할 수 있는 그런 영역의 존재들이 아니다. “우리가 어디로 가랴 우리의 형제들이 우리를 낙심하게 하여 말하기를 그 백성은 우리보다 장대하며 그 성읍들은 크고 성곽은 하늘에 닿았으며 우리가 또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노라 하는도다 하기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1:28-29).” 일련의 사태와 누구와의 짧은 통화에서 나는 세상을 돌아보며, 오늘의 나의 안전에 새삼 안도하였다. 비록 저의 눈에는 나의 도태된 삶이 한심하고 그 사는 모습이 전혀 부러울 게 없을지 몰라도, 이것들로부터 우리를 지지하고 용기를 더해주시는 하나님이 계시고 것을 저는 알 턱이 없다. “그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시 89:26).” 그러니 우리의 주는 이 모든 것들을 주관하시는 아버지시다. “그를 위하여 나의 인자함을 영원히 지키고 그와 맺은 나의 언약을 굳게 세우며 또 그의 후손을 영구하게 하여 그의 왕위를 하늘의 날과 같게 하리로다(28-29).” 그가 우리를 지키시고 붙드심이다. 더는 저들의 왈가왈부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어떤 평가에도 굴하지 않는다. 하나도 부럽지가 않다. 천만금을 준다 해도 지금의 은혜와 바꿀 수 없다.
곧 “여호와여 주의 말씀은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 주의 성실하심은 대대에 이르나이다 주께서 땅을 세우셨으므로 땅이 항상 있사오니 천지가 주의 규례들대로 오늘까지 있음은 만물이 주의 종이 된 까닭이니이다(119:89-91).” 이를 여러 번 음미하며 오늘, 성전에 올라가며 부르는 세 번째 노래에서 나의 즐거움을 새삼 되새긴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122:1).” 신기하지? 누가 잘 믿으며 주 안에서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모습이 이제는 참 좋다. 있었던 일을 말하며 주 안에서 감사를 표현할 때 덩달아서 기뻐한다. 그게 그렇게 귀한 줄 모르고 살던 시절에는, 이 무슨 얼빠진 소린가 했던 것들이 오늘은 같이 찬송이 되게 하신다. “너는 어느 지방에서든지 빈민을 학대하는 것과 정의와 공의를 짓밟는 것을 볼지라도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높은 자는 더 높은 자가 감찰하고 또 그들보다 더 높은 자들도 있음이니라(전 5:8).” 그러니 이 세상 구조가 얼마나 헛되고 헛된 것인지를 일일이 혀깨물어가며 성토할 거 없다. 저들은 저들의 세상을 산다. 나는 이제 안다. 더는 그러한 틈바구니에서 바동거리며 살고 싶지 않다. 이제 나의 남은 생에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 3:30).” 두 번 다시는 잃을 수 없고 바꿀 수 없는 진리가 있었으니,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31-32).”
그러므로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시 122: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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