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족속이 그릇하여 나를 떠날 때에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들은 내 성소의 직분을 지켰은즉 그들은 내게 가까이 나아와 수종을 들되 내 앞에 서서 기름과 피를 내게 드릴지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에스겔 44:15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시편 137:1-3
지켜야 할 것을 지키고, 이를 위해 애통해하며 비통히 여길 수 있는 슬픔이 가치 있다. 다들 그릇행하여 떠날 때에도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들은 직분을 지키었다.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하여 나를 떠날 때에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들은 내 성소의 직분을 지켰은즉 그들은 내게 가까이 나아와 수종을 들되 내 앞에 서서 기름과 피를 내게 드릴지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 44:15).” 가만히 있어 말씀에 따른 의미와 나의 생활을 돌아보게 한다. 뭘 꼭 그렇게까지……. 하고 여겨지는 대목에서도 묵묵히 나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그 역할을 감당하는 일에 대하여 묵상하게 된다. 또한 그 지켜야 할 것에 대하여(17-27), 그 말씀의 의미를 살피게 된다. 먼저는 자신을 치장하지 않는 베옷을 입고 머리를 청결하게 자르고, 술 취하지 말고 가정을 바로하며, 늘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구별을 가르치며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분별하고, 송사하는 일을 재판하되 말씀대로 판단하고, 주일을 거룩히 지키며, 몸을 더럽히지 말고, 성소에서 수종 든다. 당시는 포로 생활이라 성전에서의 예배는 고사하고 제사장의 직무를 해나갈 처지도 못 되었고, 그런 때에도 먹이시고 입히시는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풍족함의 은혜를 경험으로 약속하신다(28-31).
이러한 내용을 살피다 보면 오늘 날의 형편과 처지를 돌아보게 되고, 그 위기와 기회는 오늘도 여전하다는 것을 묵상하게 된다. 가령 코로나 사태 이후 누구의 신앙은 급격히 떨어져 믿는다고 하면서도 교회와는 멀어졌고, 오히려 누구는 그러므로 더욱 묵묵히 주를 바라며 그 온 가정이 주 앞에 바로 세워지는 것을 보게 된다. 어느 교회는 꾸준하고 평온한데 어느 교회는 안간힘을 쓰다 현 정부의 방역체계에 대항하듯 성도들을 독려해도 어지럽기만 하다.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매시대은 동일하여서, 오늘 시편의 말씀도 그대로 반영이 되며 의미가 선명하다. 곧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시 137:1-3).” 저들이 우리더러 찬송을 청하는 자리가 패역한 곳에서이고 죄악이 가득한 자리에서다. 마치 술자리에서 찬송 한 가락 불러보라 하는 격이니, 우리가 놀아나듯 같이 트롯처럼 매료되어 흥얼거려야 옳은가? 그러할 때 수금을 버드나무에 걸어두고 강변에 앉아 우는 것이 마땅하다. 성도로 사는 일이 착잡하고 모욕적일 때가 있다. 마치 교회 때문에 오늘의 사태가 진정이 안 되는 것처럼 혀를 끌끌 차며, 그래서 안 믿는다는 듯 자신들을 자신하는 사회에서 말이다.
나는 굳이 누구와도 이런저런 말을 섞지 않고 그러려니, 놓아두고 있으려니까 마음이 어렵다. 다들 살 궁리에는 여념이 없으면서 정작 말씀이 고갈되고 바른 신앙이 자취를 감춘 것에 대하여서는 둔하다. 주의 긍휼하심이 아니면 모든 세대는 곧 멸망할 것처럼 제멋대로들 산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 2:13).”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긍휼은 이를 이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2-13).” 사독의 후손들이 다들 어떠하다 해도 제사장의 직분을 다했던 것처럼, 자신을 돌아보아 온전히 세우고 사는 게 중요한 때이다. 아무리 그리스도인이라 해도 절박한 상황에 빠질 수 있는데, “그러나 야곱아 너는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고 이스라엘아 너는 나를 괴로워하였으며(사 43:22).” 그렇게들 주를 찾지 않았고 오히려 주를 찾자고 하면 이를 못마땅하다는 듯 듣고 마는 불편함을 보면서 “그러므로 내가 성소의 어른들로 욕을 보게 하며 야곱으로 저주를 입게 하며 이스라엘로 비방거리가 되게 하리라(28).” 어쩌면 오늘의 교회와 성도들의 처지가 자처한 일인지도 모른다.
여전히 보수단체를 주도하는 교회들과 그와 같은 정치적인 행위에 열에 아홉은 유튜브를 보며 그것으로 맹신들을 한다. 희한하지? 좀 과격하다 싶게 현정부를 비판하고 기성교회를 운운하며 탓하는 이들의 대부분이 그러하다. 그렇듯 개인방송이 갖는 폐단은 정제되지 않은 말과 지식과 저들 개인의 편향된 경험과 사상이 여과 없이 전파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좀 뭐하지만 노인분들 삼삼오오 모여 앉아 무얼 보나 살펴보면 희한하게 다들 유튜브 영상을 보고 있다. 자신들이 본 것을 퍼나른다. 그런데 애들도 다를 게 없어서 뭘 그리 심취해서 보나 했더니 다들 유튜브 방송이다. 어찌 통제가 안 된다. 애들의 말투, 유행하는 몸짓, 저급한 논리와 조악한 형태의 멋부림이 초중학교 아이들을 강타하였고, 젊은 세대들의 '먹방'과 관음증을 주도하였고, 노인들의 목소리를 현 정부 비판하는 데로 쏟게 하였다. 거기에는 논리적인 근거도 없고, 그저 '그렇다더라', '누가 그러는데' 하는 식으로 모두 유튜브에서 어느 박사, 누구 목사의 강연에 미쳤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으나, 그러니 믿는 자들이 바벨론의 강변에 앉아 본향을 바라보며 우는 슬픔이 필요하다.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할 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나에게 은혜의 보좌는 설교원고를 쓰고, 수정하고 성경을 다시 찾고, 다시 작성하면서 묵묵히 해야 할 일을 감당하는 그 자리 같다. 몸이 힘들어 한 시간 이상 앉아 있기 어렵고, 한 손으로 치는 자판이라 한계가 있어 어깨에는 늘 파스를 붙이고 있으면도 말이다. 책상에 앉아 있으려니 다리는 저리고 시려, 나의 책상 밑에는 365일 난로가 켜져 있다.
그럼에도 이것으로 나의 날들은 그것으로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거기에 열쇠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또 다윗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사 22:22).” 늘 되새겨도 가족이 전부고 아픈 아이 하나가 전부인 청중인데 설교라, 설교원고라는 게 무색한 것도 사실이나 다른 명칭이 없어서 그렇지 나에게 있어 그와 같은 시간, 글쓰기, 묵상이 하루 중에 가장 좋고 재밌고 귀한 시간이어서 참 감사하다. 싫지가 않은 것이다. 이처럼 다 쓴 묵상글을 아침에 올라와 다시 읽으면서 수정하고, 돼새기며 음미하는 것도 “못이 단단한 곳에 박힘 같이 그를 견고케 하리니 그가 그 아비 집에 영광의 보좌가 될 것이요, 그 아비 집의 모든 영광이 그 위에 걸리리니 그 후손과 족속 되는 각 작은 그릇 곧 종지로부터 항아리까지리라(23-24).” 이와 같은 말씀처럼, 다시 되새기며 그 의미를 삶에 두고 적용하는 일은 그것으로 '은혜의 보좌'이었다. 누구와 통화를 하다, 어쩌다 저의 신랑과는 성경공부를 하고 저이하고는 이런저런 면면을 이야기하게 되는데……. 그게 그러니까 아, 사람은 다 개별적인 것이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사역을 감당하는 일이 목사여서가 아니라 사모여서도 아니고, 어느 교회에서 무슨 직분을 맡은 자여서도 아니고 그런 역할을 다하느라 하는 일도 아니어서, 어디든, 어떤 자리에든지 거기 두신 이가 하나님이시고, 그럼 직접 개체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여서, 우리가 수종드는 일이 저를, 교회를, 일개 목사나 어느 성도를 받드는 일의 정도가 아니었다. 이를 바로 알지 못하면 목사에게 실망하고, 교회에 낙심하고, 누구 떄문에 자존심이 상한다.
이런저런 사연을 듣다, 퍼뜩 나에게 주시는 생각이 주의 마음이란 생각을 하였다. 이는 주의 권능에 해당한다. 권능은 부여하신 능력이고, 주께서 맡기신 권한이다. 남편이 목사니까, 사모로서 끌려가듯 수동적으로 따르는 게 아니다. 또는 제 3자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 게 아니다. 엄마이고 한 가정의 아내요, 며느리니까 그 역할과 본분 때문도 아니다. 그처럼 자녀를 맡기신 것도, 그런 남편과 짝지어 주신 것도, 며느리의 역할, 저들 시댁도...... 그 모든 자리는 맡기신 것이라. 이를 감당하는 일은 사역이다. 주의 이름으로 감당하면 말이다. 이런저런 어려움으로 신경쇠약이 오고, 정서적인 어떤 불안이 가중되고 있어도 이를 또한 허용하시는 이도 하나님이다. 전적으로 다 하나님이 주역이시다. 그런데 '안 좋은 생각'이 자꾸 들어 '극단적인 마음'으로 기도하게 된다는 말에 가슴이 아팠다. 나는 저에게 권면하기를 '내게 두신 한 영혼'이라! 자식이나 남편이나, 시댁이나 친정이나, 저런 마누라나 이런 약해빠진 몸뚱이나, 어떤 진저리나는 역할이라 해도 이 모두는 주께서 내게 두시는 일이고, 사람이라. 그야말로 나는 요즘 그런 생각으로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간다. 아들을 대하고 아내를 마주하며 오늘에 처한 이 모든 상황을 대처하면서, 이 모두의 궁극적인 이유는 하나라고 생각한다. 즉 내가 저들과 잘 지내고, 내게 맡기신 역할과 본분을 잘 감당하면 되는 게 아니었다. 그렇게 잘 살라고 하시는 게 아니었다. 곧 ‘주님의 마음으로, 그의 사랑으로’ 맡아야 하고, 맡기신 '주의 양'이라 여기며, ‘내 양을 먹이라.’ 하시는 말씀을 내게도 응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 말할 수 있는 것은 요즘 나 또한 주께 바라며 의지하는 것이 주님의 마음이어서다.
이는 우리에게 부탁하신 일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롬 5:19).” 이렇게 거듭 말씀하시며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요 21:7).” 하시는 것이었으니,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는 이 모든 일에 있어서 딱히 누구여서, 어떤 직분이어서 그리 행하면 되는 게 아니었다! 그러할 때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7).” 저가 예수이시면 그 예수 안에서 우리도 오늘,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일이다. 어떠하든지간에! 그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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