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전봉석 2020. 10. 7. 06:04

 

 

그들이 그 문지방을 내 문지방 곁에 두며 그 문설주를 내 문설주 곁에 두어서 그들과 나 사이에 겨우 한 담이 막히게 하였고 또 그 행하는 가증한 일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혔으므로 내가 노하여 멸망시켰거니와 이제는 그들이 그 음란과 그 왕들의 시체를 내게서 멀리 제거하여 버려야 할 것이라 그리하면 내가 그들 가운데에 영원히 살리라

에스겔 43:8-9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 136:26

 

 

은연중에 우리는 하나님을 자신과 동등하게 둔다. 언제부턴가 기도는 감사보다 조건을 단 요구로 행사한다. 신앙은 믿어주는 것처럼 생색을 내고, 자신은 남달리 이렇게 했고 저렇게 했고, 이것도 했으며 저것도 했다는 식으로 자부한다. 바리새인과 다를 게 없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 18:11).” 저의 감사는 자신을 드러내는 것일 뿐,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당당하다(12). 오늘 본문에서 이를 하나님의 문설주와 같게 한 것을 보게 된다. “그들이 그 문지방을 내 문지방 곁에 두며 그 문설주를 내 문설주 곁에 두어서 그들과 나 사이에 겨우 한 담이 막히게 하였고 또 그 행하는 가증한 일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혔으므로 내가 노하여 멸망시켰거니와 이제는 그들이 그 음란과 그 왕들의 시체를 내게서 멀리 제거하여 버려야 할 것이라 그리하면 내가 그들 가운데에 영원히 살리라(겔 43:8-9).” 문턱을 낮춘 것이다.

 

하나님과 나를 같이 놓고 산다. 그러니 문지방과 문설주가 나란한데, 음란하고 부정하다. 나름 하나님을 오래 믿고 잘 안다고 여기는 사람에게서 종종 드러나는 행색이다.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듯 그 속에 부정한 것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나님과 나란히 두고 생각한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 그럼 저만큼 답하시라. 그러한 태도의 기도나 신앙이 안 믿는 자들보다 부정하다는 것을 일깨운다. ‘그것들을 멀리 제거하여 버려라.’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싶은. 이만큼 했으면 됐지, 싶은. 하나님 앞에 공연한 억울함이나 분노가 치밀어 자신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 것처럼 억울해 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를 일깨우듯 오늘 시편은 일관된 목소리를 반복한다.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26).” 그의 인자하심에 감사하라. 음란하고 부정한 나를 참고 또 견디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강조한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자!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은혜는 주의 인자하심에 감사할 줄 알 때 얻는 선한 기쁨이다. 은혜와 자비는 다르다. 자비는 동정하는 마음으로 나를 불쌍히 여기사 무한한 사랑을 베푸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어리석음을 통촉하신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시 11:4).” 어딜 감히 주와 나란히 문지방을 두고 주의 문설주를 낮추어 음란과 부정을 일삼는가. 하나님 앞에 드는 억울한 마음, 서운하여 요구만 하는 부당한 기도를 일깨운다.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26).” 저는 보좌에 앉으셨다. “그 때에 예루살렘이 그들에게 여호와의 보좌라 일컬음이 되며 모든 백성이 그리로 모이리니 곧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에 모이고 다시는 그들의 악한 마음의 완악한 대로 그들이 행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 때에 유다 족속이 이스라엘 족속과 동행하여 북에서부터 나와서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기업으로 준 땅에 그들이 함께 이르리라(렘 3:17-18).”

 

감히 얼굴도 들 수 없어 땅에 조아려 몸 둘 바를 몰라 하는 세리의 기도를 바리새인의 것과 나란히 놓고 설명하시는 예수님의 의도를 알 것 같다. 그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게 하시는 이가 그리 행하심이지, 내가 나서 동등한 듯 문턱을 낮출 일이 아니다. 어쩌면 우린 너무, 은혜의 시대에만 산다. 뭘 해도 다 용서하시고 안 될 게 없는 시절을 사는 듯 자신의 의지를 신봉하며 산다. 누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저는 출중한 사람이라, 엄청난 학벌에 나름의 올곧은 판단을 신앙의 척도로 삼는다. 그런데 듣다보면 오히려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엄격하다. 그런 이가 이혼을 했고, 재혼을 했는데 각각 자녀를 두고 있으면서 자신의 소임은 뒷전이다. 희한한 것은 사람들이 저의 판단에 대해 옳다 여기며 고액의 연봉을 주고 스카우트해갔다. 들으면서 나는 민망한데, 저는 진리가 아니다 싶으면(?) 목사와도 싸우고 교회와도 맞선다. 교사를 맡고 어느 부서에서 열심을 다하는데 그때마다 시비가 끊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모두가 저의 잘난 이력 앞에 쩔쩔맨다.

 

들었던 어처구니없는 사연을 미주알고주알 옮겨 놓을 수는 없으나 우리 안에 얼마나 자신에 대한 확고한 의지와 자부심이 하나님의 문설주를 맞추고 문지방을 나란히 하는지! 예배도 드려주는 게 되었고, 기도도 찬송도 해주는 게 되었다. 뭐라 하면 ‘내가 그 동안 어떻게 했는데?’ 하는 심정으로 하나님의 멱살을 잡은 듯 억울함을 늘어놓는다. 주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이 아니면 우리는 참으로 쓸모가 없다. 지엄하기고 엄위하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우리는 너무 가까이에서 보고 다 안다고 여기며 산다. 아,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1).” 그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이 아니면 하루도 살 수 없고, 한 일가를 이룰 수도 없는 주제인데. “그리한즉 나는 네게 대한 내 분노가 그치며 내 질투가 네게서 떠나고 마음이 평안하여 다시는 노하지 아니하리라(겔 16:42).” 주의 선하심이다. “그러나 내가 너의 어렸을 때에 너와 세운 언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라(60).”

 

주의 긍휼하심이다. “내가 네게 내 언약을 세워서 너로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니 이는 내가 네 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 너로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62-63).” 주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존재인 것을, 마치 나란히 서서 아무렇게나 왕래하고 드나들어도 좋을, 음란을 일삼고 사는 삶이라니! “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주들 중에 뛰어난 주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2-3).” 누구는 자신의 높은 학력과 학위를 가지고 자부하느라 문설주를 낮추었고, 누구는 연약함과 부족함을 내세우며 자기연민이라는 문설주로 낮추어 하나님께 함부로 굴었다. ‘어떻게 나한테 이러실 수 있어요?’ 하는 저 둘의 말에 나의 깊은 한숨은 뭐라 할 말을 찾기 어려웠다. 둘 다 자신들이 좋아서 선택한 것이다. 그리 행하지 않기를, 성경은 누누이 일깨우시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딛었던 길이다. 이제 와 그것이 모두 하나님 때문인 것처럼 억울해한다.

 

아,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주께서 옛적에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 대로 야곱에게 성실을 베푸시며 아브라함에게 인애를 더하시리이다(미 7:19-20).” 그렇게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18).” 이와 같은 주의 넘치는 사랑이 아니시면 우리는 살 길이 없다. 사느라 사는 이 모든 것이 헛되다. 누구의 말을 들어주고 저에게 뭐라 일러주느라 말씀을 뒤적이다 나는 알았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 2:13).” 주의 긍휼하심만이 우리로 살게 한다.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만이 인생을 조명하신다. “홀로 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4).” 아, 그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5).” 오늘 나에게 두시는 이 한 날의 무덤이 실은 광명의 계단이었다. 듣다보면 다들 죽지 못해 사는 무덤 같다.

 

그러니 어쩌면 좋을까? “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7-8).” 뭐라 일러 말씀으로 다가간다고 하지만 여전히 우리 눈은 현실에 있었으니.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23).” 이래저래 마음이 어렵다가도,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25).” 오늘도 나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데 대해 감사하다.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2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