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면의 도합이 일만 팔천 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
에스겔 48:35
주 여호와여 내 눈이 주께 향하며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 영혼을 빈궁한 대로 버려두지 마옵소서 나를 지키사 저희가 나를 잡으려고 놓은 올무와 행악자의 함정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시편 141:8-9
‘하나님이 여기 계신다.’ 임의로 땅을 나눈듯하나 “이것은 너희가 제비 뽑아 이스라엘 지파에게 나누어 주어 기업이 되게 할 땅이요 또 이것들은 그들의 분깃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 48:29).” 이렇듯 “그 사면의 도합이 일만 팔천 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35).” 이후로 ‘여호와삼마’라.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 나는 저의 처소다. 분배된 땅이며 맡기신 분깃이다. 어제는 그런 생각을 하였다. 가족들만 앞에 두고 설교를 한다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서로의 바탕과 근본을 다 아는 처지라, 말씀을 전하는 데 있어 한 주간의 행실이 그대로 투영되는 것 같았다. 아내의 표정이나 몸짓에서, 딸애와 아들애의 시선에서 주눅이 들기도 한다. 어쩌면 그럼에도 전하여야 하는 자의 숙명 같다. 부끄러워 내가 먼저 숨게 된다. 감추고 흘려보내고 싶은 일들도 여럿이다. 그럼에도 나의 분깃이며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라. 그러니 오늘 시편의 말씀은 더욱 간절하다. “주 여호와여 내 눈이 주께 향하며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 영혼을 빈궁한 대로 버려두지 마옵소서.” 아니면 자칫 여기를 따나, 또는 회피하여 숨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으니 “나를 지키사 저희가 나를 잡으려고 놓은 올무와 행악자의 함정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시 141:8-9).”
그런 거 보면 종종 느끼는 일이지만 단단히 묶인 족쇄 같다. 목사로 두신 것도, 저들 가족을 중심으로 말씀을 전해야 하는 일도, 이를 위하여 말씀을 준비하는 일에서나 가정예배를 늘 같이 드리는 일에서도 자못 절실하기는 하다. 평소의 생활을 자꾸 의식하고 다듬어가지 않으면 예배나 말씀 전하는 일에서 낯부끄러움을 감당할 길이 없다. 가령 어제는 다들 표정이 뚱하였고, 그것이 계속 신경 쓰여서 할 말을 잇지 못하고는 하였다. 그럼에도 나는 전하여야 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롬 1:7).” 부디 나의 말을 나의 말로 듣고 미뤄놓지 말기를 당부하곤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비록 나는 내세울 게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고 본이 되지도 못하나 나로 전하게 하시는 이의 말씀으로 받아 부디 각자의 삶에 말씀의 영이 함께 하시기를. 그렇게 하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요 5:21).” 곧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22-23).”
성부 하나님의 기쁨은 우리가 그의 아들 예수 안에서 그의 말을 듣고 평안을 누리는 일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24).”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그처럼 본이 안 되고 덕도 없는 아버지요, 남편이요, 소시민으로 살아가지만 저는 우리의 구주시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25).” 그러므로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벧전 1:2).” 나는 다만 이를 악물고 전할 뿐이다. 전날에 하필 아내와 뚱하였고, 물론 그러했던 게 아내 특유의 성격으로 금세 없었던 일처럼 되어버렸으나 내 안에는 죄책감이 그대로 있었다. 죄책은 부끄러움을 조성한다. 자꾸 헛된 일에 연연하는 것 같지만 죄란, 끈덕지게 달라붙는 껌 같다. 다른 방도가 아니면 떼어낼 수도 흔적을 지울 수도 없다. 오히려 점점 더 얼룩은 흉측하게 번져서 나를 당황하게 하고 흉물스러워 혐오한다. 그럼에도 전해야 한다. 그러자니 하나의 길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주의 긍휼하심이 아니면 주 앞에 설 수도 없고 누구에게 뭐라 이를 수도 없는 부끄러움이 지배한다.
그러니 은혜의 강물에 잠기는 수밖에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겔 47:9).” 어제 묵상했던 말씀과 같다. 더럽혀지고 섞은 바다를 되살리는 유일한 길이 생명의 강이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8).” 이를 알고 주가 주시는 물을 마시는 수밖에. 아니면 나의 영혼은 목마름으로 기진할 지경이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내가 어찌 다루고 본이 되어 근사하게 그 삶으로 벌써 말이 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는데,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23).” 나는 부끄러워하며 다만 주를 바라게 된다. 눈 딱 감고 주님의 마음으로만 서야 한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24).” 그렇게 가족 중심의 청중 앞에서 말씀을 전하는 일은 서로에게 여간 고난이도의 예배가 아닐 수 없다. 너무 잘 아니까, 서로에 대한 감정이 있고, 서운함과 노여움도 그대로 있으니까.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니, 내가 임의로 어찌 나눌 수 있는 게 아닌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이 아침, 그것이 오늘 나에게 맡기신 분깃이라는 것을 묵상하게 된다. 내 몫의 사역이었다.
그러니 할 수만 있다면 행실을 더욱 더 바로 하고, 가족들에게 먼저 본이 되는 삶이어야 한다. 늘 일관되고 분명하게, 내가 먼저 날마다 매순간 주가 주시는 물을 마심으로 내 안에서 솟아나는 샘물이 되는 수밖에는,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계 7:17).” 그럼에도 부족한 나에게 오늘도 말씀으로 임하시고 더하시고 깨닫게 하심으로 전할 수 있는 기회와 그 시간을 최대한 바르게 관리하는, 분깃 맡은 자로서의 삶의 필요성을 알게 하시는 것 같다. 그렇지, 그러한 생명수만이 나의 영혼을 소성케 하고 만족시키실 수 있다. “하수가 창일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놀라지 않고 요단 강이 불어 그 입에 미칠지라도 자약하니 그것이 정신 차리고 있을 때에 누가 능히 잡을 수 있겠으며 갈고리로 그 코를 꿸 수 있겠느냐(욥 40:23-24).” 먼저는 나로 바로 세우시려고, 다음은 가정을 온전히 하려 교회를 우리에게 맡기심이라. 교회를 중심으로 가정이, 우리 가족에게 맡기신 교회를 위하여서 모두가 헌신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주의 자비하심은 속죄소에서 흘러나온다. “그리한즉 내가 네게 대한 내 분노가 그치며 내 투기가 네게서 떠나고 마음이 평안하여 다시는 노하지 아니하리라(겔 16:42).”
곧 그 은혜가 아니면 내가 저들 앞에 설 수도, 가족들이 나의 말을 들을 수도 없는 것이어서. 왜냐하면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 하였으니(행 28:27).” 우리들로 돌이키고 주를 바랄 수 있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 4:2).” 그 삶이 바뀌고 나의 모든 의식과 그 수준의 역할이 분명하여진다. 그렇게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시 86:17).” 다른 손길은 없다. 도울 사람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오늘 시편의 말씀처럼 “여호와여 제가 주를 불렀사오니 속히 내게 임하소서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내 음성에 귀를 기울이소서(141:1).” 곧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2).” 그러자면 무엇보다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3).” 말에 정도와 질서가 중요하였다. 자칫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롬 3:13).” 이것이 나와 상관없다고 말할 수가 없어서 나는 두렵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 죄악을 행하는 자와 함께 악을 행치 말게 하시며 저희 진수를 먹지 말게 하소서(시 141:4).” 세상 가치와 기준은 물론 내 안의 윤리와 도덕으로 누구를 심지어 가족을 평가하거나 비난하지 않게 하시기를. 부디 “사람이 밭 갈아 흙을 부스러뜨림 같이 우리의 해골이 음부 문에 흩어졌도다(7).” 내 영혼은 황폐할 뿐이지만 “주 여호와여 내 눈이 주께 향하며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 영혼을 빈궁한 대로 버려두지 마옵소서(8).”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그럼에도 주가 여기에 계시는 곳이었으니, 나로 여호와의 삼마가 되게 하소서. “나를 지키사 저희가 나를 잡으려고 놓은 올무와 행악자의 함정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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