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때와 계절을 바꾸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총명한 자에게 지식을 주시는도다 그는 깊고 은밀한 일을 나타내시고 어두운 데에 있는 것을 아시며 또 빛이 그와 함께 있도다
다니엘 2:21-22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
시편 143:8
비록 포로로 잡혀 갔지만 다니엘은 음식에 대한 규례를 지키려 왕으로부터의 특혜를 마다하였다. 그때의 규례는 저로 하여금 다급한 상황에서 주를 더욱 바라고 의지하게 하는 구속력이 있었을 것이다. 오늘 이어 느브갓네살 왕이 황당한 꿈 해석을 요구하며 폭정을 휘두르는 다급한 때이다.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서도 그 꿈을 알아내라는 것인데, 이 은밀한 것에 대하여 아는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다니엘과 그 친구들은 알고 있었다. 저의 하나님은, “그는 때와 계절을 바꾸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총명한 자에게 지식을 주시는도다 그는 깊고 은밀한 일을 나타내시고 어두운 데에 있는 것을 아시며 또 빛이 그와 함께 있도다(2:21-22).” 이를 알기 때문에 저는 친구들에게도 함께 기도할 것을 부탁한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 은밀한 일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사 다니엘과 친구들이 바벨론의 다른 지혜자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하시기를 그들로 하여금 구하게 하니라(18).” 이를 붙들며 나는 시편의 기도를 오늘 나의 기도로 삼는다.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시 143:8).”
모처럼 멀리 걸어서 병원 약을 타왔다. 양지바른 곳에 앉아 가을볕을 쬐고 한가한 오후를 만끽하다 친구와 통화도 하였다. 아주 오래된 친구인데 아주 오래도록 그는 죄의 심각성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더욱이 코로나로 인해 그나마 교회를 작파하고 다들 그러려니 살고 있었다. 뭐라 한들, 사는 이야기로 한참을 기울다 몸이 예전 같지 않다며, 근력손실로 인해 수술을 했던 고관절이 자꾸 빠져 요즘은 일부러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있고, 퇴근 때는 두 정거장을 일찍 내려서 걸어간다고도 하였다. 육신의 근력손실을 느끼고, 대비책으로 이런저런 운동을 한다면서 정작 영혼의 근력손실은 알지를 못하는가? 당부하듯 예배의 중요성을 말하고 정 뭐하면 나랑 같이 ‘줌’으로 예배드리겠는가? 하고 물었더니 단칼에 거절하였다. 그러고 보니 오래된 친구들이 하나같이 코로나의 폐해를 겪고 있는 셈이다. 누구는 이 위기가 기회로 되고, 누구에게는 기회가 위기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런저런 말 중에 다만 오늘을 사는 게 관심의 전부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이를 어찌 설명으로 이해시킬 수 있을까? 뭐라 말해도 속수무책이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 하였으니(행 28:27).”
우리의 죄는 나이가 들수록 더 단단하게 고착되는 것 같다.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어린이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 세에 죽는 자를 젊은이라 하겠고 백 세가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 받은 자이리라(사 65:20).” 그러니 백 세가 된 죄인이 저주도 크다. 이미 오래 전에 들었고 그것도 여기서는 수한이 짧은 것이어서, 어느새 우리도 중년의 건강과 염려로 시름을 더하는 때가 온 것인데도 저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러니 가만 보면 세월이 죄가 아니라 우리 속에 죄가 날 때부터 지금까지 여전한 것이다. 그렇게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21-23).” 자라서 나이가 들다보니 그리 된 게 아니라, 본래부터 그러하였다. 코로나 때문이 아니라 다들 본래 그러해 왔던 것이다. 그러니 나에게 끼친 주의 강권하심이 대단한 은혜요, 은총었구나! 하는 것을 새삼 절감하였다. '날 때부터 들나귀 새끼 같아서' 도무지 그 주어진 본성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허망한 사람은 지각이 없나니 그의 출생함이 들나귀 새끼 같으니라(욥 11:12).” 그러니 어쩌면 결국을 기대하는 수밖에! 이내 끝장이 나야 두려워도 두려워할 것이고 슬퍼도 슬퍼할 것이겠으니, 그 전에는 알지를 못하는 일이다. ‘귀는 둔하고 눈을 감은 상태라.’ 나는 오래된 친구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저만치 억새가 가을바람에 몸을 부르르르 떨듯이 떨었다. 어머니마저 돌아가시고 누나들과는 아예 만남도 끊긴 모양이라, 사느라 사는데 사는 게 재미없다는 말에 긴 한숨만 나왔다. 그러니 의사인 형님은 삼 일 전부터 술에 절어 추석도 같이 쇠지 못하고 살고 있으니.
참으로 우리 죄는 질기고 무섭다. 죄를 짓기 전부터 죄인이었고, 죄로 살다 비로소 죄인이었다. 그 죄를 정작 죄인만 모른다! 주말에 골프를 치고 반주로 술을 한 잔 하는 것이 요즘의 낙이다. 도로 옛생활로 돌아간 저의 근황으로 나는 안타까움보다 죄의 죄 됨으로 치를 떨었던 것이다. “너는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과 네게 있는 가축의 태에서 처음 난 것을 다 구별하여 여호와께 돌리라 수컷은 여호와의 것이니라(출 13:13).” 구별하여 돌리지 못하는 모든 것의 고통이여! “나귀의 첫 새끼는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하지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네 아들 중 장자는 다 대속할지며 빈 손으로 내 얼굴을 보지 말지니라(34:20).” 나는 나와 가장 친하게 지냈던, 그것도 지금까지 연락이 되는 몇 안 되는 친구들과의 통화에서 우리의 죄의 끈질긴 속성을 실감하곤 한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그러니 어쩔 것인가? 잠언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혼합된 슬픔은 은혜의 보좌로부터 비롯되는 것보다 자신의 죄로 인한 것임을 강조한다. 그렇듯이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은 사람을 부하게 하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잠 10:22).” 그 차이는 확실하다. “미련한 자는 행악으로 낙을 삼는 것 같이 명철한 자는 지혜로 낙을 삼느니라(23).” 나는 저와 통화를 끊고 천천히 걸으며 나의 남은 날을 두고 잎서서 감사하였다. 다를 바 없어 나 또한 저들과 함께 그러하였던 자였는데, 주의 은혜가 나를 강권하심이 오늘에 이르게 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자처하는 염려와 어려움도 있다. 아침에 성경공부에서, 저의 누이와 매형이 이 와중에도 다시 터키 선교지로 가야 한다는 소식이 그러하였다. 아이가 셋이다. 함께 하는 아이들을 생각하다 나는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그 뜨거운 전도의 열망을 품은 선교사 부부의 남은 인생도 생각하였지만 아이들이 먼저 마음을 울렸다. 누구를 위하는 것일까? 저들이 그저 자녀 교육을 위해 또는 먹고 살기 위해 그러는 것이 아니라, '주의 강권하심'이었으니.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시 46:4).” 어째서 이처럼 인생은 서로 다른 길이 엄연히 존재하는가! 나는 애써 은혜의 줄기를 연상하였다.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5).” 오후께 친구와의 통화와 중첩되면서 한 사람은 가고 한 사람은 남을 것에 대하여, 진저리치며 두려움을 느꼈다. 서로의 길이 갈린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110:1).” 그 끝도 확연하게 드러날 것인데, 죄로 이어진 우리 인생은 “아무도 너를 돌보아 이 중에 한 가지라도 네게 행하여 너를 불쌍히 여긴 자가 없었으므로 네가 나던 날에 네 몸이 천하게 여겨져 네가 들에 버려졌느니라(겔 16:5).” 그래서 다들 어렵고 힘든 시절에 트롯에 열광하고 그것으로 위로와 격려를 삼으려는지도. 아무리 그러해도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말씀으로 말씀으로밖에 길이 안 보인다. 나는 나의 이런저런 마음이나 그 어려움에 대하여도 말씀으로밖에 빛이 없다는 것에 이제는 안도한다. 자,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16).” 이를 앎으로 내게 귀한 것이라. 저가 일찍이 건물주가 되고, 형은 의사이고 직장은 평생 근속이라 노년을 평탄하게 맞이하려는가 모르겠으나, 형님이 거의 알코올중독자처럼 살고 둘 있는 누님과는 거의 왕래가 없고, 그러니 사느라 사는데 사는 게 재미없다는 저의 말에 길이 있었다. 염려가 앞서지만 젊은 선교사 부부의 결연함으로, 꿋꿋하게 걸어나가는 우리의 길이 경이로운 축복이었다. 나 같으면, 하고 자주 말을 흐리다가도, 그와 같은 주를 앙모함이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게 아닐 것이어서, 나는 그것이 더욱 경탄스러웠다. 모름지기 나라는 사람은 나의 죄가 짙고 붉어 그것으로 더욱 주의 은혜가 아니면 남은 생을 살 여력이 없다. 저가 아무리 뭐라 해도 나 역시 저의 말을 듣지 않듯이 저 또한 내가 뭐라든지 이와 같은 말을 들으려하지 않을 것이어서, ‘농담으로나 듣다’ 어쩔 것인가?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창 19:14).” 불이 쏟아지고 성이 붕괴되며 사람들의 괴성과 곡소리가 울려나서야 뒤늦게 후회한들. ‘한 사람을 가고 한 사람은 남는다.’
나는 어제에 이어 오늘 다니엘의 기도와 그 결과에 대해, 그리할 수 있게 하시는 주의 은총과 긍휼하심 앞에 감사와 영광을 올릴 뿐이다. 이를 보게 하심은 나에게 두시는 은혜요, 성령의 빛이라.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히 10:32).” 싸운 뒤 빛이 있었던 게 아니라, 빛이 더하여 오늘도 싸우고 있다. 늘 그렇듯 낚시 얘기나 하다 통화를 끊고는 허탈한 마음에 울적하였다. 더는 나의 남은 인생과 그 너머의 영생이 두렵지가 않다! 말씀으로 안도하고 위로를 받는다. “나의 조상들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이제 내게 지혜와 능력을 주시고 우리가 주께 구한 것을 내게 알게 하셨사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고 주를 찬양하나이다 곧 주께서 왕의 그 일을 내게 보이셨나이다 하니라(단 2:23).” 이는 “오직 은밀한 것을 나타내실 이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28).” 비로소 저도 알게 될 것이다.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들의 신이시요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 네가 능히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었으니 네 하나님은 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이시로다(47).” 그러므로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시 143:1).” 주의 뜻 안에서 “내가 옛날을 기억하고 주의 모든 행하신 것을 읊조리며 주의 손이 행하는 일을 생각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 (셀라)(5).”
그러므로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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