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호세아 6:3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시편 9:10
‘서로를 잘 안다’는 것은 그러므로 저가 원하는 것을 행하는 일이다. 또는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하고 오늘 말씀은 힘주어 강조한다. 그저 아는 정도가 아니다. 적당한 거리에서 이루어지는 사이가 아니다.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새벽빛은 곧 밝아 올 날에 앞서 가장 어두울 때라. 그 빛의 선명함이 청아하고 명징하다. 곧 우리의 앎이 뿌연 구름 속에 가리워진 게 아니다.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는 추수 때를 앞두고 만물이 익어야 하는 마지막 때에 꼭 필요한 비다. ‘이른 비’는 씨 뿌릴 때에 필요하였듯이 “이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시는 말씀에서 곧 추수할 때가 되었음을 상기시킨다(호 6:3). 앞서 우리는 어떠했던가?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뒤집어서 보면 떠나있던 우리들이다. 흩어지고 찢어져 더는 희망이 없을 것 같은 나였는데,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1).” 늘 돌아보면 나의 날은 탕자 같이 멀리 떠나 있었고, 사울과 같이 자기가 옳은 줄 알고 살았으며, 말로만 호언장담하던 베드로의 신앙 같았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나를 치셨으나 싸매시고,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셨다. 이를 알자. 힘써 알자.
그러할 때 오늘 시편의 기도가 절박하게 나를 붙드시는 것 같다.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 받는 나의 고통을 보소서(9:13).” 이처럼 주를 부를 수 있는 것은 이제 저를 잘 알기 때문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10).” 주는 결코 버리시지 않는다. 돌아오는 자를 결코 쫓아내지 않으신다는 것을 이제는 잘 안다. 이는 곧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내가 좀 나아지고 돌이켜 새사람이 되어서가 아니라, “오직,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다.” 이 놀라운 진리 앞에 승복하게 하신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이는 거슬러 올라가 처음 사람에게도 약속하신 것이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이를 사울이었던 바울이 다음과 같이 진술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4-5).”
그러니 오늘 어쩌다 부르심을 입은 게 아니다. 우연 속에 가려진 새벽빛을 선명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은혜이다. 그렇지 않으면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계 13:8).” 오늘 우리의 삶이 얼마나 척박한지 모른다. 먹고 사는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세상이다. 누구는 박사 학위를 여러 개 가지고 여기저기서 스카우트를 받아가며 고액 연봉을 받고 일을 한다지만 하루살이가 녹록하지가 않다. 고질적인 목 디스크에 심지어 허리 디스크까지 터져 시술을 하고도 일주일 남짓 쉬었을 뿐, 새벽 여섯 시면 출근을 하고 자정이 돼야 퇴근을 한다. 또한 누구는 혼자 아픈 아이를 돌보느라, 돈을 벌어야 하니 두 탕 세 탕 아이들 가르치는 학원을 돌다 들어오면 밤 아홉 시를 훌쩍 넘겨서야 저녁을 먹는다. 다 큰 녀석은 집에 붙어 있지 않고, 아픈 아이는 혼자 쓰러져 잠든 것을 깨워 강제로라도 정신과 약을 먹여야 한다. 사는 게 다들 고달파서, 새벽빛을 분간할 겨를이 없다. 우리는 고달픈 현실을 통해 주의 선명하신 빛을 분간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빛이 우리를 위해 하늘에서 내려왔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 6:38).” 이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39).” 먹구름 짙은 현실에 가려 죽어라 하고 사느라 사는 사람들을 위하여.
이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곁으로 오신 새벽빛을 보고 믿는 자마다 살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40).” 저는 우리의 구주가 되시려고 오셨다.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눅 3:22).” 저를 믿는 모든 자의 마침이 되신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 그저 우리가 옳다고 여기며 사는 일에서, 사망을 폐하시고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딤후 1:10).” 우리를 밀 까부르듯 하는 마귀를 없이 하시고,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히 2:14-15).” 우리 안에 죄를 제거하신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10:12-13).” 하나님께서 가장 기쁘게 받으시는 것이 ‘돌아오는 자’였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엡 4:7-8).”
돌이켜 하루의 삶이 너그러운데도 나는 여전히 불안을 느낀다. 원인을 알 수 없으나 진정제를 먹고 안정을 꾀한다. 내가 나를 주체하지 못함으로 나는 의지할 것이 필요하다. 가정이나 가족도 아니고, 친구나 선생도 아니고, 나름의 이상과 목표도 아니고, 현실에서 느끼는 보람과 즐거움도 아니었다. 나로 하여금 온전히 주 앞에만 서게 하시려고, 오늘 호세아서의 말씀은 그리 가슴을 울린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 6:3).” 곧 오늘의 나의 어려움이 역설적이다. 이로 인하여 힘써 여호와를 알고자 한다.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말씀 앞에 앉는다. 기도밖에는 없다. 묵묵히 주시하는 세상으로는 나 하나도 감당이 안 된다. 그러는 자에게 누가 연락을 하고, 어떤 어려움을 토로할 때 나로 하여금 이렇게 말할 수 있게 하시려는 것이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1).” 나는 이제 그리 장담하며 산다. 아니면 하루도 어찌될지 알 수가 없다. 다들 잘 산다고 살고 있지만 들어보면 죽기 살기로 사는 삶이라. 그러니 그 수밖에 없겠나? 하고 저에게 묻게 되는 것이다. 그 많은 지식이면 뭘 하고, 부유한 삶이면 뭐 달라질 게 있던가? 이건 마치 더, 더, 한도 끝도 없이 더 수고해야 하고, 더 공부해야 하고, 더, 더, 일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어서…. 오늘 호세아는 말하길,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6).”
인애는 어진 마음이다. 어질다는 것은 그 속에 완고함이 없다. 자기주장이 똬리를 틀고 옹고집으로 살지 않는다. 가만 보면, 그리하여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는 불안이 아닌가싶다.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일어 나를 쥐고 흔들면 순식간에 나의 고집과 아집은 찢어지고 깨진다. 다져지고 으스러진다. 주 앞에서 어진 마음으로 서게 하시려는 것이다. 어진 마음으로 누구의 사연을 두고 저를 위로하게 하심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안다. 힘써 하나님을 아는 일이 그 어떤 중차대한 예배나 행사보다 귀하다. 그러므로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시 9:1).” 말씀은 말씀으로 나를 이끄시며 그와 같은 고백이 내 것이게 하신다. 이 모든 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있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아,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고백하였구나!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나도 그러하기를, 힘써 주를 아는 데에 이르기 위해 오늘의 불안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무시는 거였다. 저의 고백이 내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존하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시 9:2).” 내 코가 석 자나 빠졌으면서도 “여호와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이시요 환난 때의 요새이시로다(9).” 하고 누구더러 권면한다. 위하여 기도하며,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10).” 하는 데에 확신을 더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 6:3).” 곧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딸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시 9: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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