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전봉석 2020. 10. 29. 06:00

 

 

제사장들아 이를 들으라 이스라엘 족속들아 깨달으라 왕족들아 귀를 기울이라 너희에게 심판이 있나니 너희가 미스바에 대하여 올무가 되며 다볼 위에 친 그물이 됨이라

호세아 5:1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시편 8:2

 

 

 

어른이 된다는 것, 누구의 ‘제사장’이고 ‘왕족’으로 산다는 것은 그 책임이 무겁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우리 안에 드는 교만은 어찌할 수가 없어서 그것으로 누구에게 올무가 되고 그물이 된다. “제사장들아 이를 들으라 이스라엘 족속들아 깨달으라 왕족들아 귀를 기울이라 너희에게 심판이 있나니 너희가 미스바에 대하여 올무가 되며 다볼 위에 친 그물이 됨이라(호 5:1).” 이를 받쳐서 오늘 시편을 이어 보면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시 8:2).” 이는 예수님도 바울도 그리 증언하신 바 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 11:25).”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서 볼품없는 것 같으나…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8-10).”

 

예전이나 지금이나 나라를 어지럽히는 자들은 위정자들이다. 일찍이 “패역자가 살육죄에 깊이 빠졌으매 내가 그들을 다 벌하노라(호 5:2).” 그러니 “그들이 양 떼와 소 떼를 끌고 여호와를 찾으러 갈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은 이미 그들에게서 떠나셨음이라(6).” 양 떼와 소 떼를 끌고 여호와를 찾는다는 것은 제사로 예배에 나간다는 소리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들에게서 떠나셨다. 왜냐하면 “그들이 여호와께 정조를 지키지 아니하고 사생아를 낳았으니 그러므로 새 달이 그들과 그 기업을 함께 삼키리로다(7).” 이에 경고의 나팔이 울렸다. “너희가 기브아에서 뿔나팔을 불며 라마에서 나팔을 불며 벧아웬에서 외치기를 베냐민아 네 뒤를 쫓는다 할지어다(8).” 기브아와 라마는 각각 이스라엘과 유다의 맞닿아 경계가 되는 높은 지형으로 한쪽에서는 공격하여 들온다는 것을 알리는 뿔나팔을 불고, 한쪽에서는 돌격하라는 신호의 나팔을 불었다. 어쩌다 그 지경에 이른 것일까? “유다 지도자들은 경계표를 옮기는 자 같으니 내가 나의 진노를 그들에게 물 같이 부으리라(10).” 지도자들의 문제가 크다. 경계표는 땅을 구획하고 정하신 바, 넘지 말아야 할 선이 된다. 넘어가면 빼앗는 것이고 넘어오게 하면 잃는 것이다. 그렇게 자초한 일이다. “에브라임은 사람의 명령 뒤따르기를 좋아하므로 학대를 받고 재판의 압제를 받는도다(11).” 하나님의 명령이 아닌 사람의 명령을 따르기를 좋아함으로 학대와 압제가 의당하다.

 

나로서는 아이가 먼저 곁에 있어서, 그 상태가 다시 안 좋아지는 것인지 무슨 이유로 형이 같이 정신과에 동생을 데리고 간다는 것인지가 궁금하였다. 들은 바로는 자꾸 엄마와 싸우고, 이를 형이 훈계하였고, 일부러 월차를 내서 동생을 데리고 병원엘 간다는 소리인데. “그러므로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좀 같으며 유다 족속에게는 썩이는 것 같도다(12).” 그 가정이 좀 먹고 썩게 되는 까닭이 다 있다. 나라의 위정자가 문제라면 가정의 부모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것이다. 내가 보기엔 자신이 먼저 정신과 치료도 필요하고 무엇보다 성경공부나 하나님을 더 알고자 하는 의지가 필요한데도, 자신은 됐다 그런다.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면서 아픈 아이의 어미노릇을 해야 하니 그 책임은 막중하겠고, 늙으신 부모의 잦은 병치레와 속절없는 노년의 생활이 저주 같다. 집 나간 남편은 한사코 외면하며 저를 용서하지 못하는 미움은 그의 영혼의 목을 조르는 것이다. 교회는 가도, 가서 눈물도 흘리지만, 그게 끝이다. 하나님이 그를 만나주지 않으시는 형국이라, 몇 번 언급을 하여도 자신은 됐다고 하니 별 수 없이 스스로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무게이다. 그러니 자꾸 아픈 아이를 상대로 짜증을 내고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싸우게 되는 것일 텐데, 아이는 아이대로 아픈 것이다. 같은 일의 반복이라 곁에 있는 사람들이 지치기는 한다. 그러니 자기 병을 깨달으면 무슨 소용이며, 상처를 깨달아 기껏 한다는 게 이방나라 왕에게 사람을 보내는 꼴이니. “에브라임이 자기의 병을 깨달으며 유다가 자기의 상처를 깨달았고 에브라임은 앗수르로 가서 야렙 왕에게 사람을 보내었으나 그가 능히 너희를 고치지 못하겠고 너희 상처를 낫게 하지 못하리라(13).”

 

하나님은 저를 더 움키시고 탈취하여 옴짝달싹 못하게 하신다(14). 언제까지 일까? “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그들이 고난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15).” 어쩌면 저들의 시련은 하나님의 기다림과 비례한다. 형도, 아이엄마도 아이문제로라도 하나님 앞에 두 손 들지 않으면 모두 헛일이다. 코로나사태로 인해 그나마 교회를 안 가고 있고, 형은 늘 밖을 맴돌다 주말에 들어와 쉬니 그나마 주일 예배 마치고 아이가 오는 시간에 셋이 모여 앉는 게 고작인데, 그때마다 또 싸움이 비번한 모양이다. 아이 말만 듣고 아이엄마에게 전화를 할까 하다 그만두었다. 목사님한테 바라는 거 없다, 하면서 마치 아이를 탁아소에 맡기듯이 주체할 수 없는 아이의 시간을 때우는 곳으로 여기는 소리를 해서 뭐라 나는 더 입을 열 게 없어졌다. 나는 다시 말씀을 붙들 수밖에.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예수님의 약속이다. 성경의 보증이다. ‘결코’ 쫓아내지 않으신다는 말씀에 주목하였다. 인생의 끈질긴 무게는 결코 덜어낼 수 없다. 죽기 전에는 거기서 풀려날 길이 없다.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 5:26).” 그 결과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25:46).” 돌이켜 주께 나아오는 자는 그가 어떤 처지에 놓였고, 얼마나 큰 죄악에 물려 있는가 하는 데 개의치 않으신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위에 있는 하늘을 측량할 수 있으며 밑에 있는 땅의 기초를 탐지할 수 있다면 내가 이스라엘 자손이 행한 모든 일로 말미암아 그들을 다 버리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37).”

 

대체 뭘 믿고 자신들이 알아서 한다고 저러는 것일까? 감정에 이는 안타까움이야 뭘 해도 별 수 없는 노릇이고 보면,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주야와 맺은 언약이 없다든지 천지의 법칙을 내가 정하지 아니하였다면” 즉 이 자연의 법칙도 주가 세우신 것인데 하물며 “야곱과 내 종 다윗의 자손을 버리고 다시는 다윗의 자손 중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을 다스릴 자를 택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그 포로된 자를 돌아오게 하고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33:25-26).” 끝내 돌이키지 못하는 경우와 이내 돌아오는 자의 차이는 엄연하다. 왜 예수님은 ‘결코’라는 부사를 앞에 붙이시면서, ‘어떠한 경우라도’를 강조하고 계시는 것일까? 끊임없이 공격하고 고소하는 무리가 있다. 먼저는 사탄이다. 저는 늘 우리를 참소한다. 그러나 저들은 쫓겨날 것이다.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계 12:10).” 그렇게 욥을 참소하고(욥 1:9-11, 2:4-5), 여호수아를 모략하던 자이다(슥 3:1). 사탄 마귀는 그것으로 무기를 삼아 우리를 공격하는데, 하나님께는 참소하고 우리에게는 죄의식을 불어넣어 심한 자책에 시달리게 한다. 그때마다 이스라엘을 모세가 변명하듯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멸하리라 하셨으나 그가 택하신 모세가 그 어려움 가운데에서 그의 앞에 서서 그의 노를 돌이켜 멸하시지 아니하게 하였도다(시 106:23).” 우리를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대언자가 되신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모르겠다. 아이는 맥락이 맞지 않는 말로 아무 때나 카톡을 하고 그때마다 이를 무시할 수 없어 일일이 대꾸하는 것조차 지치는데, 같이 사는 그 엄마나 형의 심정이 오죽하긴 하겠나? 안 됐고 불쌍한 일이지만 그러니 주 앞에 엎드려야 하는데, 사는 게 지옥이라. 짊어지고 있는 짐이 너무 무겁다. 자신도 주체할 길이 없어 무릎이 꺾이고 허리가 휘면서도 한사코 하나님은 외면한다. 그러니 애더러 뭐라 하고 나면 그 속이 또 안 좋아서 누가 뭐라 하지도 않는데 혼자 쩔쩔매며 우울감에 젖어드는 일의 반복이다. 성경이 보장하고 계신 바를 어째서 귀 길울이지 못하는 것일까?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롬 7:5).”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보혈이 흘렀고, 이에 저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변개가 없으실 터인데,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 저녁예배를 마치고 아이 일로 아이 이모와 대신 통화를 했다. 그 엄마와의 대화는 푸념뿐이라, 아이의 상태와 그 지경의 상태를 묻다 그만두었다. 나이가 이제 출중하여 성에 대해 뜨겁고, 마음은 앞서고, 분별은 없이 멋과 취향은 선호하는데… 그러니 어쩌면 좋은가. 멀쩡한 아이도 제멋대로인 세상에서… 난감하다. 난감하여 주님, 하고 주님만 찾는다. 나야말로 진정이 어려워 오르락내리락하는 불안의 폭이 널뛰는 날들이나 그래서 더 아이로 인해 마음이 아픈 하루였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시 8:1).”

 

일련의 사태와 상관없이 때론 사리분별 못하는 아이처럼 엄마만 찾듯 주를 찾는다.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2).” 도대체 이런, 하고 다들 무시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일에서 하나님은 권능을 행사하신다. 그러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4).” 그렇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5).” 곧 우리에게 맡겨 살게 하신 날들을 다스리라 하신 것에 오히려 끌려 다니며 허덕거리기 일쑤이고, 먹고 사는 일로 여념이 없는 신세가 되었으니. 그럼에도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6-8).” 그러자면 능력이 있어야 한다. 주의 권능으로밖에는 감당이 안 된다. 주의 마음으로만이 진정 사랑을 할 수 있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절감할 때면, 오히려 주의 은혜가 풍성하여지는 것을 느낀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