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전봉석 2020. 11. 3. 05:50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호세아 10:12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시편 13:3-4

 

 

 

그러므로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시 13:5).” 시편의 말씀을 우선적으로 붙든다. 곧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6).” 아니면 우리 속의 어리석음은 언제든 헛된 마음으로 사로잡히기 십상이다. 나름 유명한 개그우먼이 그의 모친과 함께 죽었다. 지병을 앓고 있었다는 것 외에 아무 것도 밝혀진 것이 없다. ‘속보’로 저의 소식을 접하는 순간 마음이 어려워졌다. 누구와의 통화에서 이런저런 생활의 질고와 육신의 연약함으로 ‘안 좋은 생각’을 갖고 주께 기도하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하여서일까? 저녁에 딸애와 그 개그우먼의 소식을 말하다, 저가 교회도 다니는 경우였다며, 우울증이었으면 별 수 있어? 하는 말을 대수롭지 않게 하였고, 내내 그 말이 얹힌 듯 마음을 누르는 것 같았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우리는 생각보다 강하지 않다. 대중의 시선을 받고 산다는 일은 그리 호락호락한 게 아니고, 일만 악의 뿌리가 되는 돈을 가까이 하면서 유혹을 견딜 수 있기는 쉽지 않다. 대중의 시선이 돈이 되는 시대를 살면서….

 

나의 두려움은 다시금 말씀 앞으로 끌어다 앉힌다. 나의 불안이 간절함으로 주를 바라게 한다. 오늘 호세아서 10장은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의 참극을 경고한다. 하나님이 속박이 되면 세상이 그리운 법이다.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번영할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호 10:1).” 한 눈에 봐도 하나님이 더하신 은혜의 풍성함을 가지고, 우상을 숭배하는 ‘주상을 아름답게 한다.’ 세속의 물결은 교회의 제단과 혼용되고, 저들의 신앙은 하나님이 아닌 헛된 사랑을 추구하게 한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이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벌을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그 제단을 쳐서 깨뜨리시며 그 주상을 허시리라(2).” 종종 나는 누가 그러한 선택으로 죽었다 하는 소식을 들으면 가장 먼저 저가 교회를 다녔는가, 하는 데 관심을 둔다. 공교롭게도 그렇다 하면 나는 순간 맥이 풀려 마음이 어려워진다. ‘두 마음을 품은 상태’로 산다는 것이 차리리 믿음 없이 사는 사람보다 더한 갈등을 키운다. 그렇게 “그들이 이제 이르기를 우리가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므로 우리에게 왕이 없거니와 왕이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리요 하리로다(3).” 저가 자신을 다스리시는 왕을 없이 하였으니 그 마음은 공허뿐이다. 하나님을 의식적으로 믿되 가까운 현실에 기대어 살려니까 이내 우울감으로 또는 어떤 어려움으로 순식간에 빨려들어 간다.

 

흡사 찰나적인 순간으로 아차, 할 때 이미 일은 벌어졌다. 나는 모든 자살을 그리 규정한다. 누구든 사는 게 고달프지 않겠나? 다들 죽겠다 죽겠다하면서도 열심을 다해 사는 세상에서 잠깐 한눈 판 사이에 사탄은 훅, 하고 저를 채간다. 왜 그럴까? “그들이 헛된 말을 내며 거짓 맹세로 언약을 세우니 그 재판이 밭이랑에 돋는 독초 같으리로다(4).” 맹세는 한 마디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말이다. 아니면 아니다 참이면 참이다 하면 될 것을 맹세는 불신을 억누르고, 서로의 의심을 잠재우려 하나님을 끌어다 증인으로 삼는 불경한 노릇이다. 거짓말의 아비가 맹세다. 실제로 일어났거나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장담하느라, 사실이거나 혹은 거짓이거나 이를 두고 하는 게 맹세다. 그런데 하늘에 대고 하나님의 이름을 두고 맹시한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 20:7).” 이는 매우 끔찍한 일로 자신을 맹신하는 데서 오는 착각이다. 자신을 그만큼 자신하는 교만의 선봉이다. “그들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할지라도 실상은 거짓 맹세니라(렘 5:2).” 하나님을 증인으로 세워 자신의 의를 드러내려는 것으로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일이다. “그가 내게 이르되 이는 온 땅 위에 내리는 저주라 도둑질하는 자는 그 이쪽 글대로 끊어지고 맹세하는 자는 그 저쪽 글대로 끊어지리라 하니(슥 5:3).” 믿음이 더러 맹신으로 둔갑할 때 자신을 스스로 우러른다. ‘나는 절대 안 그래!’ 장담하는 것이다.

 

두려움과 슬픔으로 영광을 떠나고(호 10:5), 그로 인하여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6). 그리하여 스스로 세운 “사마리아 왕은 물 위에 있는 거품 같이 멸망할 것이”다(7). 곧이어 “이스라엘의 죄 곧 아웬의 산당은 파괴되어 가시와 찔레가 그 제단 위에 날 것이니 그 때에 그들이 산더러 우리를 가리라 할 것이요 작은 산더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리라(8).” 스스로의 부끄러움으로 견딜 길 없어 산에 묻히길 바랄 뿐이다. 자살의 동기는 감추어졌던 수치심을 덮는 일이다. 스가랴 선지자는 이를 “온 땅 위에 내리는 저주라” 규정하고, “도둑질하는 자”의 결과로 “그 이쪽 글대로 끊어지고 맹세하는 자는 그 저쪽 글대로 끊어지리라.” 하였다(슥 5:3). 곧 자신이 지껄이고 자신하고 자부하던 것으로 그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가시와 찔레가 그 제단 위에 날 것’이다. 수치와 부끄러움을 덮을 때 들어갈 곳은 무덤뿐이다. “너희가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르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렘 7:9).”

 

나는 그래서 대중의 사랑을 받고 산다는 기독교인들이 위태롭다. 주식을 하면서 주님을 잘 섬긴다는 사람들이 위험천만하게 여겨진다. 시대가 불안하다. ‘한 탕, 한 방’이 아니면 희망이 없다. 그러니 살아남기 위해 끌어들이는 거짓 맹세와 거짓말은 동질이고, 살인과 간음을 함께 뒤엉킨다. 그러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하는 예레미야서의 말씀이 등골을 오싹하게 한다. 나는 딸애의 말에 한숨이 더 깊어졌다. ‘교회 다닌대.’ 자살인지, 타살에 의한 것인지, 아직 밝혀진 게 없는 상태에서 나는 차라리 저들 모녀가 타살이었으면, 하는 어처구니없는 바람을 가졌다.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 그러므로 이 땅이 슬퍼하며 거기 사는 자와 들짐승과 공중에 나는 새가 다 쇠잔할 것이요 바다의 고기도 없어지리라(호 4:2-3).” 이 땅에 사는 이 시대의 사람들은 모두가 쇠잔하다. 산다고 사느라 저주와 속임이 판치고,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이 포악을 떤다. 서로의 피가 뒤섞였다. 믿는 자나 안 믿는 자나 다들 어쨌든 대중의 사랑을 갈급하며 ‘일인 방송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아픈 아이’도 유튜브 채널을 개설하고 누가 ‘좋아요’를 몇 개 누르고, 몇 명이 봤는지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그러니 뭐라 한들? 다들 그러고 사는 시대에 ‘피가 뒤이음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우상의 제단이 되어버렸다. “에브라임은 마치 길들인 암소 같아서 곡식 밟기를 좋아하나 내가 그의 아름다운 목에 멍에를 메우고 에브라임 위에 사람을 태우리니 유다가 밭을 갈고 야곱이 흙덩이를 깨뜨리리라(호 10:11).”

 

에브라임을 하나님의 은혜를 두 배로 받은 자들을 총칭한다. 그러니 사는 게 다들 멍에를 메우는 일이 되었다. 어쩌다 그렇게 된 것일까? 다른 길 없다. 스스로 깨어 근신해야 하는 시대다.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12).” 나는 오늘 시인의 기도로 읊조린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시 13:3-4).” 바로 눈 뜨고 사망의 잠에 빠지면 안 된다. 다들 그러하다 해도 스스로 “자기를 위하여”도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호세아는 당부한다.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내 안에 쾌쾌 묵은 감정들을 걷어내야 한다. 경작해서 갈아엎어야 한다.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아니면 아차, 싶을 때는 이미 늦은 뒤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이는 소망의 말씀이면서 두려움의 경고다(호 10:12). 그러므로 주여!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시 13:5).”

 

다들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 ‘할로윈축제’다 해서 귀신들 가면을 뒤집어쓰고 밤거리를 헤매며 술독에 빠진 시대라. 젊은이들은 주식이 아니면 미래가 없고, 중년들은 아파트를 로또처럼 기대하며 살고, 늙은이들은 자신들의 완고함에 빠져 진영노름에 도끼자루 썩는 줄도 모른다. 대중의 사랑이 곧 돈이 되는 시대에 교회고 개인이고 사회고 인류고 모두가 제단을 범하며 우상을 숭배하는 시대로 산다. 트롯이 찬양보다 위로가 되는 시대라… 그러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시 13:6).” 아멘.